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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헛되고 헛된 인생…"당신은 '명품'입니까?"

[취재파일] 헛되고 헛된 인생…"당신은 '명품'입니까?"
우선 아래 동영상을 잠시 보시기 바랍니다.
 



▲ 'Vanitas Bust' 이병호

실리콘으로 만든 흉상 속에 틀을 만들고 내부에 공기 펌프를 연결해서 만든 작품입니다. 바람을 넣고 빼는데 따라 팽팽하던 젊은 얼굴이 관람객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쭈글쭈글 주름투성이로 변합니다. 처음엔 그저 신기하다는 생각만 듭니다. 그러다 작품 뒤에 붙은 짧은 질문을 보며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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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작품 제목에 쓰인 'Vanitas'는 라틴어 '바니타'에서 온 말입니다. '헛되다'는 뜻입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젊음'의 유한함을 명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결국 시간이 흐르면 시들어버릴 수밖에 없는 외형적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우리 인간의 가벼움과 어리석음을 지적합니다.

미술에서 'Vanitas'의 역사는 16~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네덜란드 폴랑드르 지역의 화가들은 독특한 양식의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주로 정물화들인데 해골, 책, 꺼진 촛불, 시든 꽃, 보석 등을 그리는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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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니타스 정물화의 소재들

해골은 생명, 책은 지식, 촛불은 시간, 꽃은 젊음, 보석은 재물의 유한함과 헛됨을 상징합니다. 흑사병이 창궐하고 엄격한 금욕주의가 득세하면서 고통받고 억압받던 당시 사회상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세속적인 삶과 모든 세속적인 욕망, 물질의 무의미함을 그린 바니타스화는 프랑스 등 주변국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면서 당시를 대표하는 하나의 화풍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 짝퉁 가방이 던지는 질문

바니타스 정물화가 유행했던 중세로부터 수백 년 넘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성경 구절이 주는 울림은 현대인들에도 여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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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ill of Snob' 정현목

바니타스 정물화 양식을 차용한 정현목 작가의 스틸 사진 연작입니다. '명품' 전문 잡지에 실렸을 법한 화려한 사진 속에 브랜드 로고가 선명한 가방들이 놓여 있습니다. 작가가 실제 소재를 늘어놓고 찍은 사진입니다. 하지만 화려한 정물 속에 번듯하게 자리 잡고 있는 저 가방들은 모두 '짝퉁'입니다. 가짜, 거짓, 모조품, 싸구려 가방의 속 빈 화려함에 속아넘어간 자신을 힐책하고 있을 때, 액자 옆에 걸린 짧은 글귀가 눈을 찌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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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박 마스크: 지친 현대인의 페르소나

명품에 대한 집착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치열한 경쟁사회의 산물입니다. 남들보다 좀 더 멋지게 좀 더 부티나게 좀 더 폼나게 살고 싶은 욕망의 산물입니다.

멋지고 부티나고 폼나게 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평범하고 옹색하고 찌질한 모습을 내놓고 드러내는 일은 더 어렵습니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탓입니다. 그러다 보니 내면을 가꾸기보다 당장 남들 눈에 보이는 모습을 포장하기에 급급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다 문득문득 스스로에게 던져봤을 법한 질문을 작품이 우리에게 던집니다. "당신은 오늘 어떤 가면을 쓰고 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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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rror Mask' 한승구

● Memento Mori(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곳곳에 적힌 질문들을 따라 전시장을 한 바퀴 돌고 나면 머릿속에 새로운 질문이 떠오릅니다. "젊음도 화려한 부도 번듯한 명성도 모든 것이 헛되다면, 대체 의미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이제 출발점으로 돌아갈 때입니다.
 
'Mirror Mask'가 설치된 입구를 지나 홀에 들어서자마자 독특한 피에타 상이 관람객들을 반깁니다. 한 남성이 벌거벗은 한 노인의 시체를 안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두 사람의 얼굴이 무척 닮았습니다. 실리콘을 이용한 정교한 작품으로 주목받고 있는 호주 출신의 조각가 샘 징크의 '정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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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ill Life(Pieta)' 샘 징크

"죽음이란 우리에게 등을 돌린 빛이 비치지 않는 생의 한 측면이다." 작품 옆에 적힌 릴케의 인용구가 모든 것을 설명해 줍니다. 젊은 남성과 죽음에 이른 노인은 같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화려한 삶도 언젠가는 끝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인간이 'Vanitas!"를 외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인간이 외면에만 집착하는 건 이런 내면과 본질을 외면하고 싶어서일지도 모릅니다. 보잘것없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교만 탓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릴케의 말대로 유한한 인간의 한계를 겸허히 받아들일 때, 그때 오히려 인간은 눈에 보이는 헛된 삶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행복해질 수 있는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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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한 작품들은 모두 현재 서울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All (is) Vanity (모든 것이 헛되다)'전에 전시된 작품들입니다. 작품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무겁지만, 직관적인 구성과 친절한 설명 덕분에 감상하기에 어렵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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