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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시리아 난민 취재기 ③ 시리아 난민 아동에게 '집'이란?

[월드리포트] 시리아 난민 취재기 ③ 시리아 난민 아동에게 '집'이란?
레바논 베카밸리는 중동에서 알아주는 비옥한 농토가 드넓게 퍼져 있습니다. 여기서 길러진 싱싱한 야채는 중동 곳곳에 수출되기도 합니다. 이곳 땅이 이렇게 비옥한 건 수백 년에 걸쳐 농토로 가꾸어진 탓도 있지만 중동에선 드문 뚜렷한 사계절 때문이기도 합니다. 중동은 여름에 비가 없습니다. 겨울이 우기입니다. 베카밸리가 해발 900미터의 고지이다 보니 중동치곤 겨울이 춥습니다. 바람이 매섭고 비도 오고 눈도 내립니다. 농토 위에 지어진 천막촌은 진흙탕이 됩니다. (어릴 적 눈 온 뒤 찰흙 못지 않은 밀도를 자랑하던 학교 운동장 기억하십니까?) 가을까지 맨발과 슬리퍼로 지내던 난민 아이들은 동상에 걸리기 일쑤입니다. 얇은 비닐 천막이 겨울 바람은 막아주어도 뼈 속까지 파고드는 시린 추위를 막기엔 역부족입니다. 나무 난로를 천막 안에 설치했지만 하루 종일 불을 피울 여력은 없습니다. 땔감도 돈을 주고 사야 하니까요.

제가 베카밸리를 찾았던 10월 말, 난민촌 구석에 지어진 천막이 있습니다. 크기는 5m X 10m 정도의 직사각형 모양, 그 안에 50여 명의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의자도 책상도 없는 바닥에 4살부터 13살까지 ‘일을 나가지 않는’ 아이들이 옹기종기 다닥다닥 모여 앉았습니다. 가난해 정식 학교는 못 가지만 그나마 부모가 일을 하는 덕분에 일 나가지 않고 집에서 지내는 나름 ‘선택’받은 아이들입니다. 하지만, 어른도 없는 난민촌 천막에서 혼자 지내야 한다는 의미기도 합니다. 물론 가난한 것도 다른 가정과 다를 게 없습니다. 시리아 난민들은 이 천막을 ‘마드라사 마합브’ ‘사랑의 학교’라고 부릅니다.
시리아 난민 취재기

제가 천막학교를 방문한 날은 겨울철 난민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선물을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우기인 겨울철에 아이들이 맨발로 다니지 말라고, 발 시리지 말라고, 동상 걸리지 말라고 신는 ‘장화’입니다. 장화 생김새는 한국의 꼬마 아이들이 비 올 때 신는 장화와 참 많이 닮았습니다. 파란색, 빨강색, 노란색에 예쁜 캐릭터도 그려져 있습니다. 선물 때문일까요? 평소보다 많은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이름을 호명하면 한 사람씩 앞에 나가 장화를 받습니다. 아이들은 그저 새 신을 받는 마음에 들뜬 표정입니다. 아끼느라 너무 소중해서 받은 장화가 발에 맞는 지 신어볼 생각도 못하고 가슴에 꼭 품고 있습니다. 얼굴 가득한 미소는 얼마나 좋은 지 말이 없어도 알만한 할 정돕니다.

아이들에게 장화를 나눠주는 이는 한국인 선교사 부부입니다. (장화의 취향에서 짐작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 정병훈 목사와 아내 이민정씨입니다. 두 분이 천막학교의 재단 이사장이며 교장 선생님이며 학생주임, 교무주임, 서무과장, 청소 관리까지 다 도맡아서 합니다. 부부는 2년 전부터 베카밸리에서 시리아 난민 아동을 위한 천막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교육사업까지는 생각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집트에서 13년 동안 선교사업을 하다가 3년 전 레바논으로 옮겨왔는데 처음에 구호사업 목적으로 베카밸리에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구호활동을 하다 보니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당장의 굶주림을 채우는 것보다 미래의 꿈을 살려주는 것이라고 느꼈다고 합니다. 전쟁의 공포로 겪은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고 배움의 기회마저 잃으면서 사라지는 꿈을 지켜줘야 아이들이 나중에라도 다시 일어설 힘을 얻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게 지금의 천막 학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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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라지만 정식학교처럼 ‘국.영.수.사.과’ 같은 정규과목을 일일이 가르치지는 못합니다. 천막을 절반으로 나눠 한쪽은 유치원생, 다른 한 쪽은 초등학생으로 나눠 수업을 진행합니다. 배움의 수준은 기초적입니다. 왜냐고요? 전쟁 통에 배움을 중단하고 아예 학교 근처에도 가지 못한 아이들이 대부분이라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숫자로 모르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아랍어 숫자는 우리가 아는 아라비아 숫자와는 전혀 다릅니다)

하지만, 배움의 열정만큼은 뜨거웠습니다. 갓난 동생을 안고 온 아이도 있었고, 제가 확실하게 느낀 열정은 교실이 앞줄부터 채워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아이들이 수업에 집중하고 배우고 싶어한다는 의미로 느껴졌습니다. 수업 칠판도 책상도 의자도 없는 곳이지만 아이들은 눈은 선생님의 입과 손짓에 고정돼 있습니다. 글쓰기, 산수 말고도 손 씻기와 같은 생활 습관도 배웁니다. 위생상태가 열악한 베카밸리에서 손 씻기는 아마도 아이들의 건강을 지켜주는 유일한 보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렇게 천막학교는 하루 2시간, 오전 오후반으로 나눠 수업을 진행합니다. 한 학부모는 천막학교를 다니면서 달라진 아이를 자랑하더군요. 글을 읽기는커녕 연필 잡는 법도 몰랐던 아이였는데 이제는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을 다 할 줄 안다고요. 아이들의 지식만 커가는 게 아니었습니다. 전쟁의 참상을 겪으면서 소극적이고 폐쇄적이었던 아이들의 성격이 긍정적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정병훈 목사는 처음엔 말도 더듬고 밤에 악몽 때문에 소변을 지리던 아이들이 조금씩 자신감을 되찾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느낀다고 합니다.
시리아 난민 취재기

많은 아이들이 모인 김에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기억과 꿈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림으로 그려보자고 했습니다. 한 쪽은 잊고 싶은 기억, 다른 한 쪽은 나의 꿈을 그리도록 했습니다.

잊기 싶은 기억은 예상대로 시리아 내전의 참상을 목격하고 느낀 아이들의 시선이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전투기와 탱크, 폭탄, 미사일, 총이 빠짐없이 아이들 그림에 등장했습니다. 시리아 정부군과 다에쉬(IS)는 커다랗게 표현됐고, 그들의 총구와 폭탄에 쓰러지는 사람들은 조그맣게 그려졌습니다. 아이들은 탱크와 폭탄이 친구를 죽이고 집을 부셨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렸습니다. 한 아이는 아직도 팔과 다리가 잘리는 꿈을 꾼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아픈 기억, 가슴의 상처를 표현한 그림을 서로 보여주고 설명하고 싶어했습니다. 숨는 아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저마다 그림을 얼굴 위로 들고 제게 보여주고 싶어했습니다. 순전히 제 감정이고 생각이지만 그런 아픔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건 아이들이 전쟁이 안긴 공포심을 잊어가고 서서히 그 아픔을 털고 일어서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꿈을 그린 그림에 어떤 게 담겼을까요? 하늘을 날고 싶은 아이, 공주가 되고 싶은 아이 여러 그림이 완성돼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점은 ‘잊고 싶은 기억’에 등장했던 ‘집’이 ‘나의 꿈’에도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 안에는 모양과 크기, 색깔은 달라도 우리가 어릴 적 그리던 삼각형 지붕을 가진 집들이 한결같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스케치북을 집 한 채로 채운 아이도 있었습니다.
시리아 난민 취재기

시리아 난민 아이들에게 집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걸까? 잊고 싶은 기억에선 집은 시리아 정부군의 포탄이 떨어지는 장소로 많은 그림에서 등장을 했습니다. 나의 꿈에서는 미래의 나와 함께 등장하는 사물로, 심지어 나보다 더 중요하게 표현되는 사물로 ‘집’이 등장했습니다. 아이들은 나를 지켜주는 공간, 나를 품어주던 공간, 가족과 함께 했던 공간이었던 집을 전쟁으로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낯선 이국 땅에서 허름한 비닐천막의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서 새우잠을 자야 합니다. 튼튼하게 벽돌로 지어진 집, 찬바람과 추위에서 나를 지켜주고, 커다란 창문으로 따스한 햇빛이 나를 보듬어 주는 그런 집이 얼마나 그리울까요? 그런 아이들이 나중에 훌륭한 어른으로, 돈을 많이 번 어른으로, 아름다운 어른으로, 힘 센 어른으로 성장했을 때 꿈을 이루고 다시 행복을 되찾았다는 증거로 보여주고 싶은 것이 ‘되찾은 집’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성장한 아이 옆엔 항상 집이 있는 것이고, 스케치북을 가득 채운 큰 집은 성공의 크기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시리아 난민 취재기

아이들이 그린 한 장의 그림. 그 어떤 말과 영상보다 제게는 시리아 난민 아동의 현실을 가슴 깊게 느끼게 한 소재였습니다. 제 눈으로 아무리 오랫동안 난민촌의 생활을 들여다본다 한들, 제 귀로 아무리 많은 난민의 이야기를 듣는다 한들, 아이들의 솔직한 심정을 고스란히 담은 한 장의 그림만 하겠냐는 생각이 듭니다. 한 때 그림 보는 공부 좀 하겠다며 미술사 인터뷰 강의도 들고 책도 사보면서 그림 속에 담긴 이야기를 알아보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왜 인물의 손이 이렇게 그려졌고 왜 배경에 이런 사물들이 들어가 있는지 화가가 말하고 싶은 건 무엇인지, 마치 기호학을 공부하듯 그림에는 단순한 인물과 풍경만 아닌 철학과 사상, 역사, 종교가 담겨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대화가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그린 그림에는 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이 고스란히 담기게 마련입니다. 아이들의 그림도 마찬가집니다. 보면 볼수록 아이들의 마음이 조금씩 읽혀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왜 총을 든 군인은 거인처럼 그렸는지, 포탄에 떨어지는 집의 사람들은 왜 그리 작은지, 전쟁의 참상을 그릴 땐 왜 배경이 하나도 없는지 그리고, 나의 꿈에는 왜 그리 나무와 풀이 그렇게 많이 그려졌는지…. 전쟁의 제 3자인 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상처받은 동심’이 담겨있었습니다.
시리아 난민 취재기

베카밸리는 이제 더 추워질 것입니다. 아이들에겐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베카밸리 리포트를 방송에서 접하고 어떻게 도움이 주면 좋을 지하는 문의를 몇 분한테서 받았습니다. 그래서, 정병훈 목사에게 문의해 베카밸리 난민촌의 천막학교를 위한 후원계좌를 남기겠습니다. 어떤 종교적 개인적 목적 없이 남긴다는 점 이해바랍니다.

기업은행 431-043415-97-879 계좌명은 ‘열방선교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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