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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K리그 마지막 드래프트와 감독 유상철의 고민

썰렁했던 K리그 마지막 드래프트 현장과 남은 과제

[취재파일] K리그 마지막 드래프트와 감독 유상철의 고민
“패스하겠습니다” “패스합니다” 지난 9일 오후 서울월드컵경기장, 프로축구 신인 드래프트 현장에서 가장 많이 들린 말이다. 신인 선수들을 지명하기 위해 참석한 각 구단 담당자들은 제 순서가 오기 바쁘게 ‘패스’를 외쳤다. 예전 드래프트 행사에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던 환호성과 박수 소리는 자취를 감췄다. 올해를 마지막으로 사라지는 K리그 드래프트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썰렁했다.

● “드래프트 취업률 16%”
분위기는 수치로도 나타났다. 올해 드래프트에 지원한 526명 가운데 드래프트를 통해 선발된 선수는 84명에 불과했다. 전체의 16%에 해당하는 수치다. 이마저 우선지명 선수를 제외하고 드래프트 현장에서 선발된 선수만 따지면 그 숫자는 48명(약 9%)으로 초라하게 줄어든다. 지난해 드래프트에서는 전체 지원자 가운데 23%(114명)가 입단 기회를 얻었다.

썰렁한 드래프트 분위기는 어느 정도 예견된 바였다. 드래프트 제도 폐지는 우리 축구계에서 사실상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우선 선수단 규모 자체가 줄었다. 각 구단은 자체 정보력을 갖추고 유망주를 미리 발굴해 자유계약을 체결한다. 한국 축구가 지향하는 ‘유스 시스템 활성화’도 이에 한몫한다. 각 구단은 산하 유스팀에서 키운 선수들을 우선 지명할 수 있다.

● “비싼 돈 주고 데려올 이유가 없다”
 자유계약과 우선지명, 이 두 단계를 거치고 나면, 드래프트 무대에 서는 선수 규모는 확 줄어든다. 각 구단은 이미 뽑을 만큼 뽑았고, 또 선택의 폭이 줄어든 상태에서 드래프트를 맞게 된다. 이쯤 되면 구단의 입장은 명확하다. “잘 하는 선수는 이미 다 뽑혔거나, 뽑았다”는 얘기다. 비싼 돈 주고 신인 선수를 드래프트에서 데려올 이유는 없어진다. (드래프트 1순위는 5천만원, 2순위는 4천4백만원 순으로 지명 순위에 따라 연봉 계약을 하게 되어 있다)

이번 드래프트에서 나타난 대거 ‘패스 사태’는 이런 배경에서 기인한다. 올해 K리그 클래식 12개 구단 가운데 1,2순위를 지명한 팀은 단 한 팀도 없었다. (내년부터 승격하는 광주만 1순위를 지명했다).  이번 드래프트에서 1~6라운드에 선발된 선수는 고작 22명에 불과했지만 (연봉을 2천만원 이하만 지급하면 되는) 6라운드가 끝난 뒤에는 26명이 호명됐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이러한 변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그동안의 드래프트 시스템은 신인선수 영입과정에서 구단끼리의 과열 경쟁을 막고, 비용을 아끼기 위한 측면이 강했다. 선수의 특성과 개인 능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연봉 순위가 결정되고, 소속팀이 무작위로 결정되는 기존 시스템은 비합리적이다. 조금 거창하게 얘기하면, ‘직업 선택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 15조에도 위배된다.

유스 시스템의 활성화를 위해서라도 드래프트 폐지는 옳은 흐름이다. 이전까지는 우선 지명에 인원 제한을 뒀다. 드래프트 쿼터를 보장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애써 선수를 키우고도, 제한에 걸려 다른 팀에 넘겨야 하는 황당한 상황이 종종 발생했다. ‘유스팀 활성화’라는 한국축구의 전반적인 흐름에 걸림돌이 됐던 악습이었다. 비록 이번 시즌에는 주춤했지만, 구단 산하 유스팀 선수들을 리그 정상급 선수로 키워낸 포항의 사례는 앞으로도 한국축구에 귀감이 되어야 할 모델이다. 이와 함께 프로축구의 전반적인 침체로 인한 투자 위축도, 이 모든 현상을 관통하는 요인이다. 이 역시 어쩔 수 없는 오늘날 한국 축구의 한 현상이다.

● ‘대학 축구부 감독’, 유상철의 고민
그러나 남은 과제와 고민도 있다. 이날 찬바람 부는 드래프트 행사장 뒤켠에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2002월드컵의 4강 주역 유상철 현 울산대 감독이었다. 이날만큼은 축구 스타가 아니라 대학 축구부 감독으로 자리를 찾은 유 감독의 낯빛은 썩 밝지 않았다. 자리에 앉지도 않고 일어서 드래프트를 지켜보면서 썰렁한 드래프트 행사를 관전하며, 걱정스러운 심정을 내보였다.

“안타깝죠.” 유상철 감독은 드래프트 폐지가 당장 대학 축구에 미칠 영향을 걱정했다. 유 감독은 많은 선수들이 대학에서 축구를 하면서 더 성장하고, 프로에 갈 수 있는 기량을 기를 수 있다고 전했다. 자유계약, 우선 지명이 마냥 반길 일만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대학팀은 존재 이유가 없어져요. 선수들에게 기회도 적어질 거고요. 선수들이나 중고등학교 지도자들도 구단과 관계가 있는 일부 대학을 더 선호하겠죠.”

유 감독은 어린 선수들의 ‘대학 쏠림 현상도 지적했다. 프로 구단이 우선 지명 제도를 통해 산하 유스팀에서 키운 선수들을 데려올 수 있다. 포항을 예로 들면 영남대가 그렇다. (김승대, 이명주 모두 영남대 출신이다). 이렇게 되면 선수들은 구단과 관계를 맺고 있는 특정 대학을 더 선호하게 된다. 문제는 대학팀은 많은데 프로팀은 그만큼 많지 않다는 점이다. 현재 전국에 (남자부) 축구부가 개설된 대학교는 74개다.

자유계약이 선수들에게 폭넓은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맞지만, 자유 계약 오퍼를 받지 못하는 선수들은 문이 더 좁아질 전망이다. 우선 지명을 받을 수 있는 것도 해당 대학에 입학한 선수들의 경우다. 유상철 감독이 이끄는 울산대의 경우 5명이 졸업을 앞뒀다. 이 가운데 2명만 우선지명을 받았고 1명은 울산 현대가 3순위로 지명했다. “나머지 아이들은 내셔널리그나..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죠.” 그나마 유 감독은 사정이 괜찮은 편이다.

물론 ‘프로’는 적자생존의 무대다. 잘 하는 선수가 더 많은 기회와 혜택을 제공받고, 더 치열한 경쟁으로 기량을 입증하는 곳이다. 장기적으로는 프로축구도, (대학야구가 그 무게를 많이 잃어버린) 프로야구처럼 된다는 게 스포츠계의 중론이다. 그러나 우리 축구의 빈약한 현실을 고려하면 부작용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축구는 아직까지도 사실상, 학원축구가 지탱한다. 상급 학교로 진학할수록 축구를 포기하는 학생 선수의 비율은 높아진다. 가뜩이나 좁은 ‘풀’이 더 좁아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남는다.

드래프트 제도는 과거 몇 번씩이나 없어지고 다시 생기기를 반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3년 전에는 대학 축구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선수 기회를 제한한다며 드래프트 폐지를 주장했다. 업보이자, 예견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좁아진 문에 대해서는 한국 축구 전체의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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