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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금지된 노크 훌륭해!(Prohibited knock smashing, 嚴禁敲?)!"

[월드리포트] "금지된 노크 훌륭해!(Prohibited knock smashing, 嚴禁敲?)!"
“금지된 노크 훌륭해!” 심상치 않은 이 글귀! 과연 어디서 온 걸까요? ‘금지된 장난(1952년 작 프랑스 영화)’ 뭐 이런 야릇한 느낌의 로맨스 무비 제목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들으면 ‘노크: 낯선 자들의 방문(2008년 작 미국 영화)’ 처럼 으스스한 호러 무비 타이틀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이 글귀를 발견한 곳은 독자 여러분들의 상상과는 사뭇 동떨어진 장소였습니다.

얼마 전 요즘 한창 뜨고 있다는 중국 허난성의 국가급 풍경구인 타이항산(太行山)에 가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베이징 서역에서 출발해 고속철로 2시간 반을 달린 뒤 다시 1시간 여 더 차를 타고 가니 ‘중국의 그랜드캐년’으로 불리는 타이항산 대협곡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오리지널’인 미국 애리조나의 그랜드캐년을 아직 못 가본 저로서는 타이항산의 아찔한 산세와 깊은 협곡의 웅장함에 압도돼 미처 원본과 차이나버전의 차이를 비교해 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족히 1킬로미터 높이는 됨직한 수직 낭떠러지 위에서 바로 지면이 내려다 보이는 아찔한 공중 부양식 유리 전망대 위에 올라서니 말 그대로 오금이 저려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땀에 젖은 두 손으로 난간을 부여잡기에 바빴습니다.

세상에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는 중국이니 만큼 수많은 볼거리가 있겠지만 요즘 타이항산 코스가 우리 한국인 관광객들에게도 인기라고 합니다. 동행한 가이드에 따르면 올 상반기에만 타이항산을 다녀간 한국 관광객들이 2만 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아찔한 공중전망대 위에도 친절하게 한글로 적힌 안내판이 곳곳에 배치돼 있었습니다. 타이항산 관광당국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안내판에는 자국어인 중국어를 가장 윗줄에, 그 아래로는 만국 공용어인 영어, 그 다음 세 번째 줄에는 한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중문을 영어와 한글로 번역해 외국 관광객을 위한 안내 서비스를 제공한 겁니다. 아무튼 손에 한 사발의 땀을 쥐고 있는 와중에도 눈에 들어 온 한글이 반갑게 느껴졌습니다.  

     
         

그곳에서 마주한 한글 글귀가 바로 “금지된 노크 훌륭해!” 였습니다. 이 절경 한가운데서 이 무슨 시적 표현인가 싶어 한 걸음 다가가 자세히 안내판을 들여다 봤습니다. 한글 판 바로 윗 줄에 적힌 영문은 "Prohibited knock smashing". 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그 한 줄 더 위 중문 안내문을 보니 그제야 감이 왔습니다. "嚴禁敲?(엄금고잡)." 우리말로 옮기자면 "(유리구조물을) 두드리거나 깨뜨려 부수지 마세요". 어디서부터 잘못돼 이 해괴망측한 한글 문구가 탄생했는지 앞뒤를 꿰어 맞춰봤습니다. 우선 일차 번역인 영문이 매끄럽지 못했고 이 잘못된 영문을 다시 한글로 바꾸면서 한 번 더 말이 뒤틀리게 된 겁니다. 그런데 이런 얼토당토않은 한글 번역은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 말고 붐비다(Please do not crowded, 請勿擁? - 바른 번역: 한 곳에 몰려 있지 마세요)", "포물선 마(Do not parabolic, 禁止抛物 - 바른 번역: 물건을 버리지 마세요) 같은 단문은 물론이고 "행사장 에서 우뚝 솟다 걸음 처마 에 점프, 추격전, 냉기 이다(It is strictly prohibited to step in impending jumping on a porch, chase, playfulness. 嚴禁在懸空步廊上跳躍, 追逐, 嬉鬧 - 바른 번역: 공중전망대 통로에서 뛰거나 남을 쫓거나 소란하게 하지 마세요)" 와 같이 도대체 무슨 말인 지 알 수 없는 해괴한 장문의 한국어 입간판이 한두 개가 아니었습니다. 한류 팬이라는 10대 중국인 여학생 몇 명이 그 뒤죽박죽 적힌 한글을 한자씩 읽어가며 자꾸만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정말 기가 차더군요. 한류 드라마나 K-POP을 온 몸으로 느끼려고 독학으로라도 한국어를 배우려는 중국인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는 마당에 참 안타까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 난수표 같은 안내판의 등장 배경에 대해 하얼빈 출신의 재중 동포 가이드 분으로부터 몇 가지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타이항산 코스를 수없이 오갔을 이 가이드 분 역시 엉터리 한국어 안내문을 보고 문제성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가 안내했던 많은 한국관광객들 도 마찬가지로 “기왕에 있는 거 제대로 된 한글 안내판이면 더 좋을 텐데...”라며 혀들을 차곤 했다고 합니다. 성미 급하거나 적극적인 분들은 돌아가시는 길에 관리사무소 측에 이런 의견을 전달하기도 했다고 하더군요. 개중에는 귀국 전에 대사관 측에 이런 의견을 제시하거나 귀국 후에 한국관광공사에 민원 제기를 한 분들도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엉망진창 안내판들은 조금도 수정되지 않은 채 지금껏 방치돼 있습니다.

추정컨대, 한국 관광객의 수가 급격히 늘면서 타이항산 풍경구 측이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한국어안내판 제작에 나서긴 했지만 전문 번역가들의 손을 빌리는 대신 비용 안 들고 손쉬운 방법인 인터넷 자동 외국어번역기에 의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실제로 중국에서 자주 사용되는 '바이두' 외국어번역기나 야후 번역기 프로그램을 사용해 위에서 예시해 드린 글귀들을 넣어 변환시켰더니 역시나 엉뚱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물론, 중국 친구들의 세심하지 못한 일처리가 일차적인 원인이겠지만 이런 일들을 대수롭지 않게 보고 지나치고 듣고 흘려버리는 우리 관광당국이나 해외공관의 무심함도 아쉬운 대목입니다. 한중 양국 간 연간 인적 교류 1천만 명 시대를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상황에서 상호 커뮤니케이션 편의성 제고를 위한 첫 걸음은 다름 아닌 정확한 상대국어 안내 표시판 확보일 겁니다.         

중국 각지의 관광지나 박물관, 공항이나 철도역, 도로, 공공기관 등에 구비되어 있는 한국어 안내 서비스를 점검하고 오류를 수정하는 일은 따지고 보면 그리 어렵거나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중국 측에 전문 한국어 번역사(중국 각지에 거주하시는 조선족 동포들 도움만으로도 충분합니다)들을 지원해 감수토록 하고 필요하다면 시설물 교체 비용의 일부를 지원해 줄 수도 있을 겁니다. 국가이미지 제고나 관광 진흥, 혹은 재외국민 서비스와 관련해 배정된 예산 규모가 얼마인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만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겁니다. 아울러 차제에 국내에 산재해 있는 다국어 표지판들에 대한 모니터링도 필요합니다. 국내에도 영어 스펠링 틀리거나 매끄럽지 못한 번역이 그대로 적힌 표지판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국내 관광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국 요우커(遊客)들에 대한 배려이자 우리의 관광 인프라 수준도 높일 수 있도록 타이항산의 '금지된 노크' 표지판을 타산지석 삼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금 국경일로 지정되며 그 의미가 재평가된 ‘한글날’이 한 달 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일회성 기념식이나 전시회 준비에만 신경 쓸 게 아니라 이번 참에 해외 공관과 관광공사 해외 지점망이 중심이 돼 ‘해외 한글 안내판 바로 잡기 캠페인’을 벌여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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