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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디지털 주홍글씨의 늪

[취재파일] 디지털 주홍글씨의 늪
 지난 3월 4일 방송된 <현장21 디지털 주홍글씨의 늪 -“나를 잊어주세요”>를 취재하면서 가장 가슴이 아팠던 사연은 고등학생 김민수 군(가명)의 이야기였습니다. 취재 내내 참 화도 많이 나고 안타까웠습니다.

민수는 전형적인 ‘사이버 학교폭력’의 희생자입니다. 민수의 악몽은 학교 친구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면서 시작됐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얼마 안 돼 여러 명에게 맞아, 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당해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당연히 가해자인 학생들이 처벌받고 피해자인 민수는 위로와 보호를 받아야하는 상황이었지만, 현실은 거꾸로 돌아갔습니다.

학생들끼리의 단체 SNS가 문제였습니다. 민수가 입원해있는 동안 “민수가 돈을 뜯어내기 위해 벌인 학교 폭력 자작극”이라는 내용의 허위 비방 글이 단체 SNS를 통해 아이들 사이로 퍼져나간 것입니다. 아이들이 퍼 나르기를 거듭하면서 허위 글은 삽시간에 전교 학생들에게 다 퍼졌고, 민수가 퇴원했을 때는 이미 기정사실이 돼 있었습니다. 친한 친구들조차 민수를 의심했다고 합니다. 민수는 적극적으로 해명했지만, 이미 거짓을 진실로 믿어버린 사람들은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뀐 것입니다.

억울하게 ‘사기꾼’이라는 딱지가 붙은 민수가 학교에서 설 자리는 없었습니다. SNS를 통해 모르는 아이들에게서도 욕설이 섞인 비방 메시지가 왔다고 합니다. 기가 막힌 현실에 민수가 받은 정신적 충격은 컸습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누가 자신에게 손가락질할 것 같아 집밖으로도 나가지 못하고 또래 아이들을 피했다고 합니다. 잠도 못잘 정도로 너무 괴로워 신경 정신과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의사는 대인기피증, 공황장애 등의 진단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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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20년 가까이 살던 동네에서 이사하고,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민수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며 새 출발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악몽은 여기까지라고 자신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SNS의 족쇄는 민수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새 학교에서도 곧 소문이 난 것입니다. 이번에도 학교 단체 SNS가 문제였습니다. 민수가 전학을 오자 일부 학교 친구들이 민수의 뒷조사-이것 역시 SNS를 통해서였다고 합니다-를 했고, “민수가 폭행 자작극을 벌여 이전 학교에서 전학을 왔다”는 글이 SNS를 통해 순식간에 퍼졌습니다. 역시 이번에도 너무 걷잡을 수 없이 빨리 확산돼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민수는 저에게 “이미 한 번을 도망쳤는데 똑같은 일이 벌어져서 더 충격이 컸다”고 말했습니다. 새 출발을 하려고 했건만, SNS 주홍글씨의 낙인은 민수를 쉽게 놔주지 않은 것입니다. 너무 낙담이 커 거의 자포자기 상태까지 갔다고 합니다. 극단적인 생각도 여러 차례 했다고 말했습니다. 어린 학생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가혹한 상황인거죠.

또 다시 민수는 이사하고 전학했습니다. 모든 SNS에서 탈퇴했고, 전화번호도 세 차례나 바꿨습니다. 다행히 아직까지 새 학교에서 소문이 안 났다고 합니다.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고, 선생님과도 잘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웃음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민수는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도 또 소문이 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습니다. 똑같은 일이 반복될 것 같다고, 지금의 행복이 깨질 것 같아 불안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주위 친구들 태도가 조금 차갑거나 그런 날이면 “아, 얘가 설마 그 소문을 들었나” 싶어 마음이 영 편하지가 않다고 합니다. 마치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습니다.                           

민수는 물리적인 폭력보다 SNS 폭력이 훨씬 고통스럽다고 말했습니다. SNS의 주홍글씨를 지우고 허위 글도 모두 삭제하고 싶지만,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 이상 확산되지 않기만을 바란다며 체념하고 있었습니다. SNS가 괴물 같이 느껴져 차라리 없어지는 것이 좋겠다며 속상해했습니다. 

민수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각종 청소년 폭력 상담센터에는 학교 단체 SNS로 인한 피해를 호소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에게 스마트폰이 빠르게 보급되고 SNS가 소통의 주요 통로가 되면서, SNS의 부작용으로 고통을 겪는 아이들도 늘고 있는 것입니다. 청소년 폭력예방재단(청예단)의 경우 학교폭력으로 접수된 사례의 60%~70%가 이런 SNS 등을 통한 사이버폭력이 동반된 경우라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상황이 심각한데도 기성세대들이 너무 그 심각성을 잘 몰라서 대책마련이 늦어지고 있다고 안타까워합니다. 아이들이 SNS 부작용으로 죽을 만큼 힘들어하는데도 어른들은 이제 겨우 문제가 있나보다 정도의 인식에 머물러있다 보니 잘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아이들이 SNS에 올라온 글 하나, 사진 한 장 때문에 괴로워하는지 이해 자체가 잘 안되다 보니, 무엇이 왜 문제인지조차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취재하면서 참 뼈아프게 들은 말이 있었습니다. 한 SNS 피해학생의 말이었는데, 그 아이는 자신과 관련된 모든 온라인 기록을 다 삭제해서 신분세탁을 한 뒤에 외국에 나가 새 출발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주홍글씨가 너무 끔찍하고 지금의 생활이 지옥같이 느껴진다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을 어쩌다 이 지경까지 내몰았을까,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하고 부끄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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