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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폐지 줍는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취재파일] 폐지 줍는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낮에도 수은주가 영하로 떨어지는 추운 날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잰 걸음으로 골목을 돌며 버려진 종이 한 장 그냥 지나치지 않고 기계적으로 수레에 착착 담으셨습니다. 할머니를 밖에서 다섯 시간 정도 따라다니다 보니 손발이 얼어 감각이 없고, 등에도 한기가 돌더군요. 하지만 함께 취재하던 카메라기자도, 저도, 오디오맨도, 말없이 눈만 마주칠 뿐, 누구 하나 감히 '춥다'는 불평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습니다. 두툼한 다운점퍼 입은 저희들이 어쩜 그렇게 민망하고 죄송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솜누빔 외투에, 면장갑과 얇은 스카프 만으로 칼바람을 이겨내는 할머니가 마치 작은 거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백 킬로그램이 넘는 수레를 끌고 고물상까지 가는 동안, 할머니는 몇 번이나 걷가 쉬다를 반복했습니다. 관절 수술을 하고서도 하루종일 쉴 새 없이 혹사당하는 무릎이 성할 리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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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지 가격은 보통 종이 1kg에 80원, 잘 쳐주는 곳이라야 100원입니다. 수레가 넘치게 모아서 갖다줬지만 번 돈은 고작 7천원. 그것도 평소보다 많이 받은 거랍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고개를 연신 숙여 인사하며 기쁨의 웃음을 감추시지 못하는 할머니를 보며 가슴이 뜨끔뜨끔 했습니다. 할머니가 악착같이 버는 몇천 원, 그 피 같은 돈을 우리는 밥 사먹고 커피 사먹는데 얼마나 쉽게 쓰는가 싶어서 말입니다.  

할머니는 월세 25만원짜리 지하 셋방에 삽니다. 국민연금과 노령연금 받는게 고스란히 들어갑니다. 중학생 손녀와의 생활비는 직접 벌어야 합니다. 소득이 턱없이 적은데도, 이혼하고 집을 나간 아들이 부양자로 되어있어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근처 교회에서 주는 성금과 이웃들이 나눠주는 쌀과 김치, 반찬이 큰 힘이 된다고 합니다. 할머니가 지금 가장 원하는 건 손녀가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 사시는 거랍니다.

폐지 노인 캡쳐_5
우리나라 노인들은 유난히 어렵고 힘들게 삽니다. 노인의 상대적 빈곤율*은 49.3%로 절반이나 됩니다. (* 연간 평균 가처분소득이 중위 소득의 절반도 안 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OECD 평균의 4배나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할머니처럼, 거리에서 폐지나 고물을 주워 팔아서 생계를 꾸리는 노인은 우리나라에 175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자원재활용연대 추산)  이분들의 월 평균 수입은 26만원으로 집계되는데 이마저 더 줄어들 가능성이 큽니다. 폐지 수거업체에 대해서 정부가 해 주던 세액공제를 점차적으로 줄일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억원 어치의 고물을 사들이는 업체라면 지난해까진 570만원의 세금을 깎아줬지만 올해는 480만원, 내후년부터는 290만원만 공제받을 수 있습니다. 고물상 협회에 문의하니, 당장은 아니라도 세금혜택이 절반으로 줄어들게 되니 수익을 내야하는 입장에선 폐지 사들이는 가격을 깎을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1kg당 100원에서 80원 정도로 낮춘다는데,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폐지줍는 노인들의 수입도 한 달에 몇만 원 줄어들게 됩니다. 정부의 부가가치세법 개정이 폐지 줍는 노인들에게 직접 세금을 거두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분들에게 영향을 준 셈입니다.

기사가 나간 후에 기획재정부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폐지 줍는 노인 175만 명이라는 수치가 잘못되었다고 말입니다. 자원재활용연대 추산으론 175만 명일지 모르나, 정부는 20만 명 정도로 보고있고, 많아야 60만 명일 거라는 설명입니다. (다른 얘기지만, 집회 참석자 수를 계산할 때 주최측에서 집계한 것보다 경찰 추산 인원이 늘 차이나긴 합니다.) 직접 세어보기 전에는 폐지 줍는 노인이 정확히 전국에 몇 명이나 되는지 파악할 재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175만명이라는 숫자가 맞느냐 틀리느냐를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이 세액공제 축소가 절대빈곤 노인들에게 미칠 영향이 아닐까요? 복지재원 마련하기 위한 세수확보 정책이 결과적으로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노인들의 삶을 더 팍팍하게 하는 건 아닌지...

할머니의 동그랗게 움츠린 등이 생각납니다. 취재 후에도 두고두고 그 모습이 떠올라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제 가슴을 먹먹하게 하네요. 전해드린 돈과 선물이 잠시나마 할머니를 따뜻하게는 해드렸을지 몰라도 근본적으로 그분의 삶을 바꿔드릴 수는 없으니...안타깝기만 합니다. 제가 직접 만나뵙지는 못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고되고 힘든 삶을 사시는 많은 분들께 새해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어제보다 좀더 나은 오늘이, 오늘보다 좀더 나은 내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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