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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전기 먹는 하마' 셋톱박스의 비밀

김수형 기자 sean@sbs.co.kr

작성 2013.10.24 10:11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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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취재파일] 전기 먹는 하마 셋톱박스의 비밀
케이블 방송이나 IPTV를 시청하시는 분들은 TV 근처에 셋톱박스가 꼭 있게 마련입니다. 검은색 상자같이 생겼는데, TV와 연결되는 선을 주렁주렁 달고 있습니다. 이 셋톱박스로 지상파 방송이나 케이블 방송사의 실시간 방송은 물론 다시보기 프로그램까지 볼 수 있습니다. 시청자들은 보통 TV에는 관심이 있지만, 그 밑에 숨 죽이고 있는 셋톱박스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셋톱박스를 꺼본 기억이 없는 분들 많으실 겁니다. TV를 끄면 같이 꺼진다는 일종의 착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셋톱박스 전력 소모 실제로 측정해보니

이 셋톱박스의 별명이 '전기 먹는 하마'입니다. 얼마나 전기를 잡아먹기에 이런 별명이 붙었을까요? 취재를 위해서 한국전기연구원의 김기현 연구원과 함께 한 가정집을 섭외해서 가전제품의 대기 전력을 측정해 봤습니다.(대기 전력은 꺼진 상태지만 플러그가 꽂혀 있는 상태에서 소모되는 전력을 의미합니다.) 42인치 대형 LED TV가 있는 가정집이었는데, 전력 측정 장비로 재보니, TV는 0.065W, 셋톱박스는 17.39W였습니다. 덩치 큰 TV가 더 전력을 소모할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셋톱박스가 260배 넘게 대기 전력을 쓰고 있었던 겁니다. 다른 가전제품도 측정해보니 전자레인지는 2.88W, 전기밥솥은 4.935W, 에어컨도 12.99W의 대기 전력이 측정됐습니다. 전력 소모의 왕이라고 생각했던 에어컨도 대기전력에서는 셋톱박스에는 상대가 안됐습니다.

셋톱박스 대기전력은 한 달에 얼마?

그렇다면 셋톱박스 대기전력으로 얼마나 전기요금을 추가로 내는 걸까요? 대기 전력을 일률적으로 전기요금으로 환산해 말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전기요금은 사용량에 따라서 누진제가 적용되는 구간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희 취재팀이 섭외한 가정집을 기준으로 개략적으로는 말씀드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이 가정의 요금 고지서를 보니 지난 8월에 330kWh를 사용했는데, 44,050원을 전기요금으로 납부했습니다. 저희가 이 집의 셋톱박스에서 측정한 대기전력 17.39W를 전력량으로 환산해서, 해당 구간의 전기요금을 곱했더니 2,850원이 나왔습니다. 한 달 내내 대기전력 상태로 있다는 가정 하에 가장 짜게 잡아도, 한 달 전기요금의 6%, 3천 원 정도 되는 돈이 써보지도 못하고 공중으로 사라졌던 겁니다.  

셋톱박스 59종 전력 소모 전격 공개


김수형 취재파일김수형 취재파일김수형 취재파일

그렇다면 다른 셋톱박스는 전력 소모량이 얼마나 될까요? 새누리당 박대출 의원이 미래부로부터 받은 셋톱박스 전체에 대한 전력 소모 평균을 취재파일을 통해 공개합니다. 이 표에는 5대 MSO라고 불리는 케이블방송사인 티브로드, CJ헬로비전, 씨앤앰, CMB, 현대HCN과 IPTV사업자인 KT,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가 셋톱박스 제조사로부터 공급받은 59종의 셋톱박스의 대기전력과 가동전력이 나와 있습니다. 대기 전력은 대체로 10W를 넘기고 있었고, 가동전력과 별 차이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셋톱박스는 항상 가동되는 거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전기 먹는 하마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절전형 셋톱박스 만들기는 어렵지 않은데

그렇다면 이렇게 전기를 많이 먹는 셋톱박스 말고는 대안이 없는 걸까요? 시중에 극히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절전형 셋톱박스가 나와 있기는 합니다. 리모컨으로 전원을 끄면 대기전력을 0.8W까지 줄일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한 모델밖에 없기는 한데 제조사들의 말을 들어보니 절전형 셋톱박스에 들어가는 칩이 이미 오래전에 나와 있는 거라서 만들려고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다고 합니다.

전기 덜 먹는 셋톱박스를 선택할 권리가 없다

문제는 소비자가 절전형 셋톱박스를 선택하려고 해도 고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유료방송 사업자가 골라서 설치해주는 셋톱박스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다는데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이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셋톱박스 설치 기사가 와서 기기 목록을 보여주면서 특징을 설명해준 기억이 전혀 없지 않습니까? 소자들이 선택할 수 있었다면, 전력을 어떤 게 많이 먹는지 비교를 했을 테고, 그러면 유료방송 업계에서도 전력 소모가 많은 셋톱박스를 그냥 둘 수는 없었을 겁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상태에서 유료방송 업계가 원하는 셋톱박스 단가에 맞춰서 제조사들은 물건을 납품할 뿐이고, 그러다보니 절전형 셋톱박스 생산에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된 겁니다.

유료방송 사업자 "셋톱박스 개발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유료방송 사업자들은 원가 문제를 얘기합니다. 스마트하게 진화하는 방송 환경에 맞춰 다양한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서 개발비가 수십억 원씩 들어가는데 다양한 모델을 고객들에게 제시하면 돈이 너무 많이 든다는 겁니다. 게다가 전력 소모가 적은 셋톱박스는 프로그램 업데이트 등에서 반응 속도가 느릴 수가 있어, 유료방송사들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전송하는데 차질이 생길 우려도 있습니다. 이래저래 아무 것도 모르는 소비자들만 호주머니에서 돈을 더 내면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 행복한(?) 구조인 겁니다.

권장사항에 불과한 셋톱박스 규제

지난해 정부가 고시한 대기전력 저감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대기전력을 많이 잡아먹는 가전제품을 지정해서 일정 기준 이하로 전력 소모를 낮추라는 제도입니다. 기준을 넘으면 노란색 경고 딱지를 붙이도록 해, 소비자들이 한눈에 알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셋톱박스도 이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권장 사항에 불과해서 실효성이 전혀 없습니다. 업계의 반발을 고려해 의무조항으로는 안 넣었다고 합니다.

곧 닥칠지 모르는 값비싼 전기 시대…‘전기 먹는 하마’ 셋톱박스는 곤란

원전 비리가 잇따르면서 전기요금 인상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있을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쩌면 값비싼 전기 시대가 곧 닥칠지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자도 모르게 셋톱박스가 이렇게 전력을 많이 소모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한 여름에도 에어컨도 못 틀면서 고통을 분담하는 국민들처럼 유료방송 업계도 힘들겠지만 셋톱박스의 전력 소모를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래야 국민들도 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