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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방통대 정상수 교수 "명성황후는 을미사변 당시 시해당하지 않았다"

▷ 한수진/사회자:

비운의 국모 명성황후는 을미사변 당시에 시해된 것이 아니라는 새로운 외교 문서 사료가 발견되어서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관련해서 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정상수 교수와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 정상수 교수 / 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안녕하십니까.

▷ 한수진/사회자:

이번에 찾아내신 자료들. 어떤 국가의 외교 문서인가요.

▶ 정상수 교수 / 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이것은 주변국가인 일본이나 중국이 아니라 독일과 영국의 외교 문서들입니다.

▷ 한수진/사회자:

공식 외교 문서인 것이 분명하고요. 어디서 찾아내셨습니까..

▶ 정상수 교수 / 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독일은 외교부 정치문서 보관소에서 찾았고요. 영국 문서는 국립문서 보관서에서 찾았습니다.

▷ 한수진/사회자:

그러면요. 일단 독일 외교 문서는 누가 작성한 문서인가요.

▶ 정상수 교수 / 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독일 외교 문서는 러시아 주재 독일대사 라돌린이 작성한 것입니다.

▷ 한수진/사회자:

을미사변 당시에 러시아 주재 독일대사 라돌린. 이렇게 되어 있나요.

▶ 정상수 교수 / 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을미사변이 있고 나서 4개월 쯤 뒤에 1896년 2월 6일 날 작성된 문서입니다.

▷ 한수진/사회자:

이 문서에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 건가요.

▶ 정상수 교수 / 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3가지 내용이 있는데요. 첫 번째는 죽었다고 이야기 되고 있는 한국의 왕비가 아직 살아있다고 하는 것이고요. 두 번째는 한국의 왕비가 서울주재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할 수 있는지를 문의하고 있다는 내용이고요. 또 하나는 청나라 군대가 철수를 했으니까 일본 군대도 한반도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 한수진/사회자:

한국 왕비가 아직 살아있다. 그 왕비가 러시아 공사로 도피할 수 있는지 문의했다. 이런 내용이군요. 을미사변 이후에 아관파천이 있었던 것이죠. 실제적으로 당시에 고종과 왕세자가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기도 했었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다는 말씀이시고요. 그러면 영국에 외교문서는 어떤 내용인가요.

▶ 정상수 교수 / 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그것도 독일의 외교문서와 비슷한 시기에 작성되었는데요. 1896년 2월 15일. 영국 문서는 아관파천 이후에 작성된 문서인데요.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 힐리어가 작성한 것으로 고종의 명성황후 생존에 대한 태도가 어떠했는지. 보여주고 있는데요. 고종은 왕비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여전히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 한수진/사회자:

고종에게 이런 내용을 물어봤었나 보죠.

▶ 정상수 교수 / 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여전히 라고 되어 있으니까 그 전에도 계속 물어봤던 것 같습니다.

▷ 한수진/사회자:

그러면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보세요?

▶ 정상수 교수 / 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서 시해되었다는 것을 반박할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자료라고 볼 수 있겠죠.

▷ 한수진/사회자:

당시에 명성황후가 피신을 했고 시해를 당하지 않았다. 이런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말씀이시네요. 그런데요.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역사의 정설과는 많이 다른 것 아닙니까.

▶ 정상수 교수 / 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그렇죠. 완전히 180도 바뀔 수 있는 중요한 자료들입니다.

▷ 한수진/사회자: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역사를 배운 것에도 나름의 근거가 있지 않겠습니까.

▶ 정상수 교수 / 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명성황후가 시해 당했다고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들은요. 주로 일본 문서들에 의해서 확증하려고 그런다는 것이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 한수진/사회자:

일본의 문서들이요. 어떤 문서들이 있나요.

▶ 정상수 교수 / 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에조 보고서 같은 것이 있는데요. 에조 보고서와 지금 영국, 독일 문서와의 차이점은 애조 문서는 그 당시 사건에 참여했던 일본 낭인 에조라는 사람이 재판 청원서용으로 작성한 것인데요. 명성 황후가 시해 당하고 시신이 불태워졌다. 라고 보고한 내용입니다만 그것은 하급 낭인이 작성한 보고서이고요. 이번에 발견한 독일 문서에서 명성황후가 아직 살아있다고 하는 문서는 러시아 외교부장관이 독일대사에게 한 말이기 때문에 상당히 신빙성도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한수진/사회자:

그러면 이번에 발견된 외교 문서를 가지고 가정을 한다면 어떻게 당시 상황을 가정할 수 있을까요.

▶ 정상수 교수 / 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가정이 아니라 저는 이 외교 문서를 거의 확실히 믿고 있기 때문에요. 명성 황후가 시해당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저는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 한수진/사회자:

그런데 고종이 직접 명성황후의 국장을 발표하지 않았습니까.

▶ 정상수 교수 / 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국장 발표도 상당히 늦었고요. 그것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지 51일이 지나서야 국장발표를 했는데요. 국장 발표에 대해서 외국 공관들 사이에서는 굉장히 많은 의견들이 있었거든요. 국장을 발표하게 되니까 조기 계양을 해야 하느냐. 마느냐. 이런 것을 가지고요.

▷ 한수진/사회자:

그런데 조기를 개양하지 않았나요.

▶ 정상수 교수 / 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러시아 공사관에서는 조기를 개양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 한수진/사회자:

이것은 어떤 의미가 있다고 봐야 할까요.

▶ 정상수 교수 / 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그것은 만약 명성황후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고 하면요. 명성황후가 살아있는데 조기를 개양할 수 없다. 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 한수진/사회자:

또 궁금한게 말이죠. 만약 명성황후가 당시 피신했다면 그 후의 행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 정상수 교수 / 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그게 지금부터 해야 할 과제이지만 말이죠. 사실 명성황후는 1895년 을미사변 이전에도 명성황후를 만나본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얼굴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고 사진이 찍혀있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일단 시해당한 것으로 나타났을 때는, 그 다음에는 더욱더 만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요. 그렇기 때문에 행적을 추적하는 것이 더욱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수진/사회자:

그 후에 일단 시해를 당했다고 정설로 굳어진 이후에는 어떻게 보면 그 후의 행적 같은 경우는 역사 연구과제가 될 수 없었겠네요. 그 동안 관련된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없다고 봐야 합니까.

▶ 정상수 교수 / 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명성황후가 시해 당했다고 있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요. 고정 관념 속에서 주입 되어 있었기 때문에요. 을미사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연구해보자. 재검토해보자. 이런 반응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 한수진/사회자:

관련 자료들을 두루두루 재검증하고 재조사할 필요가 있겠네요.

▶ 정상수 교수 / 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네. 그러니까 우리나라 문서라든지 주변의 일본, 중국의 문서뿐만 아니라 그 당시 서울에 많이 와 있었던 유럽인들의 보고서라든지. 유럽인들은 보고서를 작성할 때도 비교적 객관적으로, 한국에 대한 이해관계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요. 객관적으로 보고서를 작성한 경우가 많이 나타납니다. 유럽 문서들을 잘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한수진/사회자:

추가로 자료가 더 나올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고 보세요?

▶ 정상수 교수 / 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이 두 문서는 다 비밀문서에서 나온 것이고요. 일단 러시아 문서를 봐야 하겠는데요. 시도는 해보겠지만 추가로 나온다는 확신은 아직 없습니다.

▷ 한수진/사회자: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역사 책 내용. 그 동안 정설로 알려진 명성황후의 최후는 일본 에조 보고서만 가지고 작성된 것인가요.

▶ 정상수 교수 / 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에조 보고서와 러시아의 사바틴 보고서요. 러시아 인으로서 명성황후의 시신을 불태워지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사바틴은 명성황후의 얼굴을 알고 있었지만 가까이서 본 것이 아니라 숲에 숨어서 멀리서 보았기 때문에 불태워지고 있는 시신이 명성황후인지 아닌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이라고 봐야겠죠.

▷ 한수진/사회자:

역시 여러 가지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는 것이 낫겠다. 라는 말씀이시네요. 어쨌든 당시 명성황후 생사 여부가 외교가에서는 엄청난 관심사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네요.

▶ 정상수 교수 / 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네. 우리나라에서의 관심사뿐만 아니라, 러시아 외교부장관과 독일 대사가 이야기할 정도이면요. 세계사 적인 관심사가 될 정도라고 봐야하겠죠.

▷ 한수진/사회자:

왜 그렇게 큰 관심이었을까요.

▶ 정상수 교수 / 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일단 그 당시는 군주제의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들이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왕후가 시해 당했다고 하는 것은 아주 큰 사건이죠.

▷ 한수진/사회자: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더 많이 이루어졌으면 좋겠고요. 교수님께서도 추가 자료를 가지고 인터뷰를 다시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정상수 교수 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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