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목요일과 다를 바 없던 지난 3월 28일 저녁. 카지노업체에서 도박장을 운영하는 이 모 씨는 서울 삼성동 자신의 집에 들어서자 어수선하게 어질러진 집안 풍경에 놀랐습니다. 도둑이 든 겁니다. 그를 아연실색하게 한 건 도둑들의 대담한 범행 수법이었습니다. 방에 둔 무게 120kg짜리 금고가 통째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 씨의 금고는 겉면이 철제였는데, 내벽은 시멘트로 돼 있었습니다. 가로 60cm에 세로 50cm, 높이 80cm로 가스오븐레인지만 한 대형 금고입니다. 그는 여기에 현금 1억 3천만 원과 수표 1억 5천8백만 원, 5천만 원짜리 명품시계를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피해자는 치안이 비교적 잘 돼 있는 강남구 삼성동 고급 아파트에 살았습니다. 집에 쉽게 들어오는 건 물론, 들어온다고 해도 금고를 이렇게 손쉽게 훔쳐 가리란 건 상상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경찰이 즉시 수사에 나섰지만, 도둑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습니다. 한 달 뒤 결국 덜미가 잡힌 이들은 4인조 중년의 도둑들이었습니다.
"20억이 있다 비밀번호도 안다" '설계자' 자처
범행은 40대의 전직 대리운전기사가 하나의 소문을 듣는 데서 시작됐습니다. 주범 45살 배 모 씨는 사회에서 알게 된 36살 이 모 씨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씨가 한때 회사 운전기사로 일한 적이 있는데, 그가 태우고 다닌 사업가가 자기 집 금고에 20억 넘는 돈을 보관하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이 씨는 자주 사업가의 집을 드나들었기에,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습니다. 범행이 있기 8개월 전 이야기입니다.
그 후로 배 씨는 여덟 달 넘도록 범행을 준비합니다. 준비 과정에 그가 끌어들인 사람이 2명. 자신의 후배 40살 정 모 씨와 43살인 배 씨의 내연녀 신 모 씨가 등장합니다. 배 씨와 정 씨는 금고를 훔친 혐의, 운전기사 이 씨와 내연녀는 범행을 도운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배 씨 등 2명은 주범으로 구속, 나머지는 불구속 입건돼 검찰에 사건이 송치됐습니다.
꼭꼭 숨으려던 설계자, 성형까지 했지만…
모든 사건의 중심엔 배 씨가 있습니다. 하지만, 범행 현장을 포착한 CCTV 화면에 그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건 당일, 오후 4시 35분쯤 피의자 가운데 정 모 씨가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수레를 끌고 나타납니다. 혼자 손수레를 끌고 엘리베이터를 탑니다. 수레엔 커다란 종이 상자가 놓여 있습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손쉽게 건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는 피해자의 집에도 같은 방법으로 침입했습니다. 15분쯤 뒤, 수레엔 상자 대신 금고가 실려 있었습니다. 범행을 계획한 배 씨 대신 정 씨가 실제 절도 행각을 실행한 겁니다.
범행이 끝날 때까지 배 씨는 CCTV에 단 한 번도 찍히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정 씨가 120kg짜리 금고를 승합차에 혼자 실을 수 없어 전화로 도움을 요청할 때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경찰은 전했습니다. 대신 그는 나름대로 기발한 생각을 했습니다. 낮시간 일없이 대기 중인 대리운전기사를 불러 정 씨를 돕도록 한 겁니다. 경찰에 쫓길 때를 대비해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 했던 겁니다.
이런 극단적인 조심성은 도피과정에서도 두드러졌습니다. 훔친 돈으로 대포폰을 샀고, 오피스텔을 빌려 은신처로 삼았습니다. 배 씨는 거기에 1천5백만 원을 투자(?)해 성형수술까지 받았습니다. 눈꺼풀을 올리고 귓불 크기를 키웠으며, 턱을 깎는 수술까지 했습니다. 경찰은 검거 당시 그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팀워크는 오간 데 없고… 의만 상한 '도둑들'
새로운 얼굴을 하고 경찰을 따돌렸지만, 도피 생활 내내 그의 얼굴은 어두웠을 걸로 보입니다. 범행 직후 서울의 한 카센터에서 금고에 구멍을 내 돈뭉치와 금품을 꺼내 보니, 20억이 아닌 3억 3천만 원어치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경찰은 "이들이 20억을 털면 평생 호의호식할 거라 믿고, 길고 꼼꼼했던 준비 과정을 참았는데, 막상 금고를 통째 훔치고도 나온 돈이 적어 씁쓸해 했다"고 전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검거되기 전 4인조의 팀워크는 이미 깨진 뒤였습니다. 배 씨가 실제 금고를 갖고 나와 차까지 옮긴 정씨에겐 약속한 3천만여 원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달을 버틴 이들의 도주 행각도 어이없는 실수로 끝났습니다. 이들은 금고를 나르기 위해 스타렉스 렌터카 2대를 빌렸습니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처음 금고를 실은 차를 다른 차로 뒤쫓다 중간에 금고를 바꿔치고 달아났습니다. 이 렌터카엔 미리 준비한 위조 번호판을 달고 있었죠. 하지만, 번호판은 제대로 붙어 있지 않았습니다. 주차장을 빠져나가기 전 1대의 뒷번호판이 떨어지면서 원래 렌터카 번호판이 CCTV에 고스란히 찍힌 겁니다.
경찰은 앞뒤 번호판이 다르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고, 노출된 진짜 번호판을 토대로 이들을 검거했습니다. 8개월간 위조 번호판을 만들고도, 제대로 붙이지 못해 붙잡힌 꼴이지요. 치밀했지만 어수룩했고, 대범하면서도 소심한 '도둑들'은 구치소에서, 집에서 재판에 부쳐질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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