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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의 사소하게] 돌아온 남대문, 반갑다!

[이주형의 사소하게] 돌아온 남대문, 반갑다!
                                                                      
북경에 근 1년 살았던 때 가장 기억에 남고 좋았던 일이라면 나홀로 북경 산책,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북경성(城) 산책이었다. 8시쯤 아침을 먹고 나면 배낭에 바나나 한 두 개와 생수, 지도와 북경 관련 책자 한 권을 챙겨서 집을 나섰다. 처음에는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가 차츰 북경 지리에 익숙해지자 버스를 타고 사람 구경, 도시 구경을 하면서 다녔다.

공해 때문에 늘 뿌연 북경이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눈부시도록 맑은 날은 시간이 아까워서 수업도 빼먹고 기숙사 앞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시내로 내달린 적도 있다.

내가 '북경'산책이 아니라 '북경성'산책이라 부른 이유는 800년 도읍으로서 북경의 북경다움은 현대의 '베이징'이 아니라 북경'도성'(都城[뚜청],City Walls) 혹은 북경도성의 흔적에서 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고도 북경은 자금성을 중심으로 좌우가 완벽하게 대칭으로 맞아떨어지는 계획도시다. 그리고 이 계획도시를 성벽이 둘러싸고 있(었)다.  현대 중국의 상징과도 같은 천안문은  바로 자금성이 있는 구역, 즉 황성(皇城)의 정문이다.(우리로 치자면 광화문)

그런데 나는 언제나 마오(毛)의 사진이 떡허니 걸려있는 천안문보다 전문(前門[치엔먼])이 마음에 들었다. 천안문 광장을 뒤로 하고 당당히 버티고 서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있는, 꿀리지 않는 옛 것의 기개 그 자체였다. 그러면서도 친근하게 느껴졌다.

실제로 전문 앞은 옛부터 시장이 형성돼 있었고, 각종 책과 문구로 가득해 조선의 사신들도 북경에 오면 꼭 들렸다는 류리창 거리도 근처에 있어 나도 이곳에 자주 들르곤 했다. 북경 지리에 익숙해지기 전에도 어떻게든 일단 전문까지만 오면 지하철을 갈아타고 집에 무사히 갈 수 있었기 때문에 북경 시내 어디를 답사가든 전문행 버스만 타면 안심이었다. 상당히 느린 북경의 버스를 타고 잘못 탄 건 아닌지 마음 졸이다가도 저멀리서 우뚝 솟은 전문이 눈에 들어오면 마치 집에라도 도착한 것 마냥 마음이 놓였다.

본디 정양문(正陽門[쩡양먼])으로 명명됐던 전문은 북경성의 남대문이다. 이 문은 오로지 황제가 드나들 때만 열렸다. 1950년대부터 20년에 걸쳐 북경 내성의 9개 문이 차례로 철거될 때도 전문은 살아남았다. 주은래도 나서 전문만큼은 철거해서는 안된다고 특별 지시를 내렸다.

비록 전문보다 규모는 작지만 우리의 국보 1호, 숭례문이 돌아왔다. 북경도성의 남대문인 전문보다 조금 앞서 세워진 한양도성의 남대문으로 북경의 전문이 9개 문 가운데 정문의 위용을 갖춰듯 남대문 역시 8개 문(4대문과 4소문) 중 정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남대문_500
                                                                                   
특히 돌아온 숭례문에서 눈여겨 볼 것은 문루 양 옆으로 서울성곽이 부분적으로나마(또는 상징적으로나마)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숭례문이 그저 단일한 건축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산과 평지를 따라 8.6km 가량 이어진 한양도성의 남대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북경의 경우, 지하철 건설(교통과 안보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과 도시화 속에서 9개 성문과 성곽이 차례로 헐리고 전문과 덕성문, 그리고 성곽의 극히 일부만 복구된 반면, 한양도성은 4개 대문 중 3개(숭례문,흥인지문,숙정문), 4소문 중 3개(창의문,혜화문,광희문)와 성곽의 꽤 많은 부분이 우리 곁에 남아있다.(물론 원형과는 위치와 모양 등에서 차이가 있다)

이는 평지에 압도적인 스케일로 세워진 인위적인 북경성과는 차별화된 한양도성만의 건축 철학에 힘입은 바 크다. 한양도성은 내사산(백악산,낙산,남산,인왕산)을 끼고 돌며 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주변에서 가장 높은 언덕을 따라 축조됐다. (창덕궁이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건축이듯이) 굴곡진 현대사 속에서도 산 중의 성곽은 상당 부분 살아남았고, 성곽 중간중간의 문들도 북경의 그것처럼 압도적인 규모가 아니었기에 오히려 도시화의 큰 훼방으로 여겨지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남대문과 희로애락을 함께 해온 민중의 목소리가 이 역사적이고 심리적인 랜드마크를 오늘까지 살려냈으리라. 경복궁이 만신창이가 되고 광화문마저 훼절될 때도 숭례문은 전차길에 날개를 꺾이면서도 조선인의 자존심으로 그 자리를 지켰왔다. 달랑 문루 하나만 남아서도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어내고 이제 세계문화유산에 도전하는 한양도성의 정문으로 자리를 지켰다. 어처구니없는 화재로 완전히 새옷으로 갈아입다시피 했지만 남대문이 있기에 서울은 서울답다. 새옹지마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화재는 오히려 남대문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일깨워줬다.

다시 돌아온 남대문! 숭례문! 장하고 고맙다.

(P.S) 북경성의 전문이 정식명칭이라할 수 있는 정양문으로 불리지 않고 공식적인 버스 노선도나 지하철역 이름에서조차 전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듯이 남대문이라는 이름도 (일부 잘못 알려졌듯이) 일제가 숭례문을 낮춰 부른 이름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남대문은 숭례문과 엇비슷한 비율로 언급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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