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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개봉작 ② 난니 모레티-유럽 거장감독의 귀환

독설가가 선보인 따뜻한 코미디

[취재파일] 개봉작 ② 난니 모레티-유럽 거장감독의 귀환
올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지난 2월, 베네딕토 16세가 갑작스럽게 자진 사임을 발표한 거죠. 천주교 신자를 비롯한 전 세계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령의 내 기력으로는 더는 교황직을 제대로 수행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확신이 들었다' 는 교황의 고백이 너무나 솔직했거든요.

교황이란, 천주교 바깥의 사람들에게도 메시지를 전하고 의미를 가져야 하는 사람이거늘, 그 중요한 역할을 해내기에 본인 스스로 '기력이 달린다'고 인정한 겁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맞닥뜨리게 되는 노화에 대해 이토록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판단을 내리다니요. 그런 그의 결정이 세상 사람들에겐 너무나 뜻밖이고 용기있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베네딕토가 아무리 기력이 떨어졌다 한들 눈 딱 감고 생애 마지막까지 교황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텐데요, 그가 다른 사람이라면 하지 않았을 독특한 선택을 한 유일한 교황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이번주 개봉작, 두번째 영화는 난니 모레티 감독의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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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자진사임 직후, 국내 미개봉작인 난니 모레티 감독의 영화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가 갑자기 이슈가 됐습니다. 이 영화에서도 교황으로 선출됐지만 끝끝내 고사하는 독특한 추기경 한 명이 나옵니다. 베네딕토 16세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영화 속 주인공은 '소명'이 아니라 '소망'을 선택해 교황직으로부터 도망한 겁니다. 베네딕토 16세가 대의를 위해 자리에서 물러났다면, 영화 속 교황은 정말 '죽도록 하기 싫어서' 달아난다는 다소 코믹한 설정입니다.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이 영화의 원제이기도 한 "하베무스 파팜"(새 교황이 탄생했다는 뜻)이 울려퍼지던 날, 새로 선출된 교황은 고통스럽게 절규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칩니다. 새 교황이 모습을 보여야 할 대성당 발코니에는 커튼만 펄럭이고, 교황의 강복을 기다리던 대광장의 신자들은 큰 혼란에 빠집니다... 주인공은 처음부터 교황의 자리를 극구 거부합니다. 자신은 전 세계 신도들과 사제들을 이끌 능력이 없다며 평범한 인간이 되기를 희망하죠. 하지만 교황청의 부탁에 부담감을 느낀 추기경은 몰래 도주하기에 이른 겁니다. 한 때 연극배우의 꿈을 가졌던 그는 도주 과정에서 극단 사람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지만, 결국 교황 연설 대에 서 청중들에게 진심어린 고백을 던지게 되죠.

그런데 사실 이 교황, 평소에도 좀 징조가 보이던, (세간의 기준으로 보자면) 트러블 메이커가 될 소지가 다분히 있있던 사람이죠. 예민하고 걸핏하면 짜증을 내고, 우울증을 앓고 있거든요. 심리치료사에게 주기적으로 상담도 받고 있었고요. 영화는 종교적 차원을 넘어 극도의 중압감에 시달리는 한 인간의 진솔한 고민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직업을 묻는 여성 심리치료사에게 추기경, 대신 "배우"라고 답하는 교황의 모습에서 연민까지 느껴집니다.

실제 이 영화에 대한 교황청 측의 입장은 '불편하다'였습니다. 국민의 90%가 가톨릭 신도인 이탈리아에서 영화는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죠. 세계 12억명에 달하는 가톨릭신자들의 수장이며 로마 북서부 ‘신성’ 도시국가 바티칸의 주권자인 교황을 대상으로 이런 영화를 만들다니... 신성모독으로 여겨졌을 법 하죠.

그런데 전 다른 의미에서 이번 영화가 예상 밖이었거든요. 난니 모레티 감독의 작품이라고 하기엔 추기경들이 너무나 '따뜻하고 인간적으로' 그려졌다는 점에서 놀랐습니다. 영화 속 추기경들은 모두 귀여운 어르신들입니다. 교황 선출을 위해 모인 엄숙한 콘클라베에서 다른 추기경이 적는 이름을 그대로 커닝하거나 누군가의 이름을 썼다가 지우질 않나, "주여 저는 아니라고 해주소서" "주여 제발 제가 뽑히지 않게 해주십시오"라며 남몰래 기도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킥킥댔습니다. 추기경들이 도넛과 카푸치노의 유혹에 흔들리는 장면, 교황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무료하게 보내던 추기경단이 배구 경기를 하는 장면도 소소한 웃음을 줍니다. 그들도 그저 우리와 같은 인간일 뿐,이라는 데에서 묘한 쾌감 같은 게 느껴집니다.

모레티 감독이 이런 사람이 아니거든요. 얼마 전 감독의 전기를 읽었는데요, 거기서 카테고리를 다음과 같이 나눴더군요. '남성'과 '가족', '코미디와 아이러니', '정치'. 난니 모레티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맞습니다. 특히 '코미디'와 '가족', '정치' 이 세 단어를 빼놓을 수 없겠네요.

모레티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감독 겸 배우입니다.(연기하는 감독이기도 한 모레티는 이번 영화에서도 우울증에 걸린 교황을 치료하는 정신분석 학자로 출연합니다.) 주로 정치풍자 코미디를 만들어왔지만, ‘아들의 방’ 같은 영화는 잔잔한 감동을 주는 슬픈 영화였죠. 여튼, 난니 모레티라고 하면 이탈리아의 가족문제, 코미디 같은 사회상, 정치 얘기를 들려주는 대표적 좌파로 사회참여적 성격을 띠는 사람입니다.

대기업에게 넘어간 영화산업에 대항하는 의미로 소위 '1인 제작 시스템'을 고수했던 그는 최근까지도 시나리오·촬영·편집은 물론이거니와 주인공 인물을 직접 연기하고, 상영까지 자신의 영화관에서 하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오죽하면 그의 첫 작품 제목도 '나는 자급자족한다'였을까요. 늘상 패러디, 아이러니로 비꼬는 웃음을 만들어왔던 그가 어떤 대상에 대해 이렇게 따뜻한 시선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영화는 참 특이하고 신선합니다. 어쩌면, 교황을 철없는 한 명의 인간으로 그린 것 자체가 큰 모험이고 거기서 유발되는 웃음이 크기 때문에 그 이상의 코미디를 시도하지 않아도 된 거겠지요.

제작 시기가 2011년인 관계로, 졸지에 베네딕토 16세의 사임을 '예언'이라도 한 것처럼 된 영화,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 난니 모레티의 따뜻한 코미디라는 점에서 추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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