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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여성감독 전성시대 2

"동시대에 요구되는 리더십이 영화 현장에서도"

[취재파일] 여성감독 전성시대 2
대학생 때, 아주 잠깐이었지만 영화를 찍는 언니, 오빠들을 따라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연출 전공자들은 졸업 시즌이 다가오면 '졸작(졸업작품)'을 하나씩 내놓아야 하는데, 아무리 아마추어라고 해도 영화 찍는 일이 워낙 여러 사람이 모여 하는 대규모 작업이다 보니 적어도 10명 가까이 필요했습니다. 저 같은 타학교 비전공자의 손이라도 빌리려 했던 게 그 때문이었고요.

제가 하는 일이라곤

1. 감독이랑 대화해 가며 일명 '졸라맨' 캐릭터로 초단순화된 콘티 그리기
- 시나리오를 처음으로 시각화 하는 작업이라고 보면 됩니다. 컷 안에 등장인물의 동선과 공간의 구도를 대강 그려내는 일인데요, 저는 미술 실력이 안되어 송구하게도 일명 '졸라맨'이라고 하죠, 극세사 팔과 다리를 가진 얼굴만 있는 캐릭터로 그릴 수 밖에... 상업영화계 잘 나가는 감독들은 거의 '프로 만화가' 수준의 콘티작업가를 통해 자신이 머릿 속으로 그리는 바를 정확히 옮겨내기도 하더라고요.

2. 스크립터 옆에 붙어서 기록하기
-구체적으로 제가 했던 일은 바로 '어제 촬영할 때 배우가 뭐 입고, 들고 있었나 기억하기'였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연속된 씬을 며칠간 나눠서 촬영할 때가 있는데요, 배우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옷을 입고 찍는 장면을 하루 안에 끝내면 좋은데 그게 다음 날에도 찍어야 할 경우, 아주 사소한 것, 이를 테면 어제는 배우가 가방을 왼쪽 어깨에 메고 있었는데 그게 오른쪽으로 옮겨갔다든지, 어제는 배경에 있는 가게 셔터가 올라가 있었는데 오늘은 반쯤 내려와 있다든지, 하면 나중에 찍고 편집할 때 확 '튀거든요'. 그런 사소한 것들을 기억하려면 누군가 메모하고 있어야 하는데, 제가 하는 일이 바로 그랬습니다.

3. 장소 섭외하기
- 콘티를 제가 그리다 보니 아무래도 시나리오 상 등장하는 공간에 대한 이해가 높다는 이유로 장소 섭외는 제 담당,,, 말이 그렇지 그냥 막일이기 때문에 막내일 제가 했던 것 같습니다. 

장소 섭외하기는 '빌러 다니기'였습니다. 지나가다 아무 길이나 찍을 수 있는 게 아니고 배경으로 나오는 상점이나 관공서에 우리가 어떤 촬영을 하려고 하는데, 이게 여러분들 영업에 전혀 해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테니 잠시 양해 좀 해 주십사, 하고 90도 배꼽 인사하는 일이었거든요. 장소 전체를 빌려야 할 때는 더 어려웠죠. 요즘은 얼마에 되는지 모르겠는데 7~8년 전만 해도 까페 3시간 빌리는 데 20만원씩 달라고 했거든요.(손님 하나도 없는 시간대였는데도!!!) 정해진 예산 안에서 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배고픈 대학생...) 더더욱 스트레스였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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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고 배고프고 휴학도 안한 상태에서 밖으로 돌아다니느라 학점은 뚝뚝 떨어지고... 여러모로 힘들었던 기억이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제가 확실히 보고 관찰하고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리더십'의 중요성입니다. 10명 남짓한 또래 대학생들이 하나의 목표(영화를 찍다)를 수행하기 위해 지지고 볶고 하는 과정에서 이 모든 작업이 나중에 되돌아 봤을 때 '그래도 즐거운 일'이 될 것인가, '다시는 상종하기 싫은 인간말종들과 함께한 불행한 기억'이 될 것인가는 바로 '감독'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감독은 현장에서 모든 부속품들이 조합됐을 때 어떤 형태의 결과물이 될 것인가를 아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단정적으로 말하면, 그 영화에 있어서만큼은 '신'적' 존재인 겁니다. 부속품에 해당하는 촬영, 조명, 오디오, 의상 스태프들, 그리고 연기하는 배우 각자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의견을 내놓을 때, 그 최선이 '정말 최선인 지'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소통과 설득의 작업이 있어야 하는지.... 제가 좀 더 세련되고 체계적일 것이라 예상되는 상업영화 현장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어찌 됐든 전쟁통 같은 영화현장의 수장으로 막강한 권력과 책임감을 동시에 부여받은 '감독'이라는 사람들에겐.... 정말 엄청난 정치력과 정신력과 체력과 사회성과 리더십 등등이 필요합니다. 

그런 현장에 '여성 감독'이 늘어나고 있는 겁니다. 이전엔 정말 드물었거든요, 그런데 2000년대 들어서 임순례 감독, 변영주, 박찬옥 같은 감독들이 데뷔를 하고 안정적으로 두번째, 세번째 작품을 내놓는 일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난해는 특히 더했죠. 변영주 감독의 '화차', 방은진 감독의 '용의자 X'는 상업적으로 각각 2~30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했고요, 정재은 감독의 다큐 '말하는 건축가'와 두 여성 감독, 김일란·홍지유 감독의 '두개의 문'도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죠. 여성 감독들의 잇딴 활약, 어떻게 된 일일까요?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황미요조 프로그래머를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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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미요조/서울국제여성영화제(IWFFIS) 프로그래머 인터뷰

Q. 여성 감독의 진출이 상당히 최근 들어 확, 눈에 띌 정도인 것 같아요.


"일단은 감독들이 연출을 하게 되는 계기가 다양해 진 것. 예전에는 누구한테 사사받고 연출부에서 일한 지 얼마나 오래되었고 이런 도제 시스템 안에서 스승 격인 감독이 데뷔를 시켜주는 식이었다면. 이제는 유학이라든지, 영화 학교에서 전공했다든지 영화제 수상, 좋은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다든지 이렇게 감독으로 유입되는 과정이 다양해졌거든요."

"상당히 급진적이에요. 한국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쪽으로 시선을 넓혀 보면, 이전엔 여성의 진입을 막는 큰 장벽이 존재하는 시스템이 있었거든요. 굳건한 남성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에 진입 자체가 어려웠는데 일본도 최근 스튜디오 체제나 도제 체제가 많이 무너지고, 대만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말씀하신대로 여성 감독의 수가 최근 몇년간 굉장히 늘었어요. 평가도 굉장히 좋고. 대만같은 경우는 전체 편수가 적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기는 하지만 반 이상이 여성 감독, 지난 해 같은 경우에는.

"관객들의 취향이 달라졌다는 점도 여성 감독이 늘어난 원인이죠. 시장이 세분화되면서 미세한 감정과 관계를 잘 포착할 수 있는 감독, 시나리오가 요구되는 일이 많아졌거든요. 이삼십대 여성 관객들은 언제나 한국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관객이었지만 요즘엔 더욱 특화되어 이들을 겨냥하는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고."

Q. 여성 감독들의 활약상이 반갑기도 하고요. 이들이 현장에서 어떤 연출 스타일을 보일까 궁금하기도 하고요.

"일반적으로 여성은 이렇다, 여성 감독은 이렇다,라고 말하는 건 위험할 수가 있어요. 남성 여성을 구분짓기 이전에 감독마다, 영화마다, 각각의 리더십이라든지 연출 방식, 특성이 달라요. 하지만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는 건 예전에 비해서 현장에서 요구하는 리더십이나 연출 스타일은 확실히 변했다는 거예요."

"물론 카리스마라든지 진두지휘하는 게 여전히 중요하지만, 협상하는 능력, 소통하는 능력, 수평적 관계를 잘 유지하는 능력, 이런 것들이 전반적으로 현장에서 요구되면서 아무래도 여성 감독들이 좀더 무난하게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는 것 같고요. 사실은 그런 능력들도 훈련받아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 면에서 여성 감독들이 동시대에 요구되는 리더십과 맞는 측면이 많았던 거 같습니다."

" 지금 여성 감독의 활동에 대해 얘기할 때 중요한 건 단지 숫자가 늘어났다 보다는 여성 감독들이 꾸준히 작업하게 됐다는 것. 한때는 여성 감독 같은 경우 데뷔를 하고 두번째 작품을 내지 못한 게 정설처럼 여겨졌던 때도 있거든요. 그런 연륜, 경험들이 쌓여서 이제 여성 감독들의 활약이 독립영화나 여성영화 안에서 뿐만 아니라 대중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상업영화에까지 이르게 된 거라고 봅니다."

Q. 우리가 여성 감독들이 연출한 영화에 기대하는 바는 어떤 것들일까요?

"여성 캐릭터의 묘사가 훨씬 세심하고 정확해지는 측면이 있겠죠. 여성 감독이라고 해서 여자들의 이야기만 한다거나 그것에 더 특화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누구나 자신을 표현하는 데 있어 개인의 성별이라든지, 젠더 이런 것들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이를 테면 느와르 같은 지극히 남성적인 장르에서라도 여성 감독이 연출하면 분명 여성적인 특성이 반영될 테죠. 그게 궁극적으로는 우리 영화 전체의 다양성에 큰 기여를 할 거라고 보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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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가장 마지막 금녀의 공간이 될 것이라는 자조 섞인 이야기가 흘러나왔던 상업영화 현장에서 여성 감독들이 늘어났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임순례 감독의 왕팬인데요, 앞으로도 여성 감독들의 활약이 이어지길 팬심을 실어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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