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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진정한 '이야기꾼' 이안 감독

[취재파일] 진정한 '이야기꾼' 이안 감독
지난 해 말, 기자 이전에 영화팬으로서 설레는 경험을 했습니다. 세계적인 명감독의 내한 인터뷰를 진행했던 건데요. 혼자 간직해야지 하며 꼭꼭 숨겨두었다가, 역시나 즐거운 추억은 공유해야 제맛! 꺼내보려 합니다. 먼저, 대만의 이안 감독입니다.

이야기의 신神! 이안 감독

대화를 하다가 이안 감독이 화제로 등장한 적 있으신가요? 그때마다 이안이라는 이름을 듣는 사람들 대부분 감탄사를 내뱉었던 것 같습니다. 여운 있는 한숨과 함께 나도 모르게 나오는 감탄사 ‘아!’. 그만큼 국내 팬들에게 이안 감독은 떠올리면 가슴 짠한 명작들을 (이미 여러 차례) 선사한 고마운 사람이죠.

이안 감독이 내한한 건 지난 11월. 현재 상영 중인 그의 신작, ‘라이프 오브 파이’가 세상에 공개되기 이전이었습니다. 한국에 온 이안 감독은 간단히 매체 인터뷰를 하고 기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라이프 오브 파이’의 대표적인 몇 장면들을 프리젠테이션하는 형식으로 선보였었는데요, 그날 맛보기를 본 저로선, 누구보다 개봉을 손꼽아 기다렸던 것 같네요. 그러고 보니 참, 이안 감독이 누구냐고요? 일단 지금까지 연출했던 대표작들을 읊어볼까요? ^^

음식남녀(1994)
센스 앤 센서빌리티(1995)
와호장룡(2000)
헐크(2003)
브로크백 마운틴(2005)
색,계(2007)


걔 중에 ‘헐크’가 좀 의외죠. ^^ ‘와호장룡’과 ‘브로크백 마운틴’, ‘색계’ 같은 영화들은 대표적인 장면과 대사들이 여전히 회자되고 있죠.
(와호장룡- 쏴아쏴아 대나무밭에 대롱대롱 매달린 주윤발과 장쯔이,
브로크백마운틴- 캐나다 우거진 숲속 제이크 질렌할을 뒤에서 백허그 하던 히스 레저,
색계-치파오를 곱게 입은 탕웨이와 머리에 기름 끼얹은 양조위의 베드신... )

어떤 감독들은 이름만 들어도 장르와 이야기가 하나의 이미지로 집약돼 떠오르는데요, 이안 감독은 뭐랄까... 중구난방이죠, 전작을 관통하는 하나의 이미지가 없지 않나요? 본인이 천착해 집중하고 있는 사상이나 소재조차 짐작할 수 없네요. 청조 시대 중국 무사들의 이야기(와호장룡)에서 녹색 괴물 헐크(헐크)로, 캐나다의 외딴 숲 게이 커플의 안타까운 사랑(브로크백 마운틴)에서 1930년대 전후 홍콩, 친일파 관리를 유혹하는 스파이 여성 (색계).

이안 감독은 누구보다 ‘이야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감독입니다. 본인 스스로 열정적으로 이야기의 매력을 탐닉하고,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풀어내는 재주까지 갖췄으니 천상 영화감독을 해야 할 팔자인 것 같습니다. 미장센이나 스타일에 관심 있는 감독들이 ‘볼거리’와 ‘판타지’를 선사한다면, 이안 감독의 영화에선 이야기 자체가 볼거리이지 않았나 싶네요. 어쩌면 상당히 FM스러운 감독이고요, 그래서 사실 영화의 본질에서 벗어나 본 적 없는 사람이죠.

신작 ‘라이프 오브 파이’의 줄거리를 듣고 또 한번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경영하는 평범한 가정의 아들, 어렸을 때부터 여러 신을 접하고 믿는데 주저하지 않았던(그야말로 멀티 섬김 ^^) 엉뚱한 주인공 ‘파이’가 호랑이와 망망대해 태평양에서 하게 된 226일 간의 표류기. 이안 감독이 어떤 측면에서 이 이야기에 사로잡혀 영화화를 결심했는지(‘라이프 오브 파이’는 베스트소설이 원작입니다) 그날 진행한 인터뷰를 잠깐 읽어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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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방한인데 소감이 어떤신지요?
: 어제 늦게 도착했어요. 사실 개인적으로 방문한 것 까지 더하면 2번 이상 온 것 같은데요. 한국은 감독 입장에선 언제나 중요한 시장이고요, 동시에 좋은 친구이기도 합니다. 이번엔 3D로 만들어진 큰 영화로 찾게 되어 특히나 더 기분이 좋네요, 영화가 잘 되면 좋겠어요.

<라이프 오브 파이>는 어떤 영화인지 설명해주실까요?
: 베스트셀러 "파이이야기"를 원작으로 하는데, 굉장히 독특한 소재예요. ‘파이’라고 하는 인도소년의 이야기인데, 가족과 캐나다로 이주하던 중 배가 표류하게 되고 호랑이 한 마리와 바다 위 한가운데에서 살아남게 되죠. 영화는 파이가 겪게되는 위대한 생존의 여정이면서, 훌륭한 어드벤처 스토리입니다.

전작들도 모두 영화로 표현하기 어려운 소재들이었지만, 파이는 더하면 더했지 쉬웠을 것 같지 않네요. 바다 위 호랑이와 표류기라. 결과물에 만족하시나요?
: 만족한다, 못한다,라고 표현할 수도 없을 것 같아요.  3천명의 사람들이 함께 근 4년간 힘든 노력 끝에 드디어 이 영화를 세상에 내놓았다는 게... 매우 자랑스럽고 떨립니다. 정말 최선을 다했고 혁신적인 결과물을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당연히, 어려움이 정말 많았습니다. 호랑이, 바다, 소년을 표현하려 새로운 3D 장르에 도전한 것 자체가 어려웠고, 책을 원작으로 하다 보니... 책에선 좀 더 몽환적이고요 환상적으로 설명되거든요. 믿음, 신에 대한 이야기를 표현해 내는데 정말 힘들었습니다. 원작 속 ‘환상’을 표현하기 위해 정말 모든 상상력을 총 동원했고요, 돈도 많이 들어갔고, 예상치 못한 문제에도 계속 봉착했던 것 같네요.

현재 할리우드에 진출한 대표적 아시아 감독인데요, 활동하는데 어려움은 없으신가요?
: 지금은 많이 적응되어서 그런 것들은 없어요. 전 23살 때까지 대만에서 살았고, 드라마나 영화공부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서양의 2가지 문화를 모두 접할 수 있었는데요, 그게 저에겐 큰 도움이 됐어요. 가장 어려운 점이라고 한다면 완벽한 서구화 사회에서 '신뢰'와 '자신감'을 얻는 것이에요. '영화적 언어'는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자라면서 많은 할리우드 영화를 보니까. 요즘엔 동양 문화권에서도 서구의 문화를 접하면서 자라나기 때문에 사고방식이랄지, 정신적인 부분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해요. 사실 '문화적' 장벽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높지 않아요. 최근 많은 한국감독들이 할리우드에 진출하고 있는데요, ‘한국인'이기 때문에 영화는 '영어'로 되어있더라도 가지고 있는 감성 같은 것은 다분히 '한국적'일 거예요. 그게 그 감독들의 장점이기도 할 거고요.

전작들에서 '사람들 간의 관계'에 대한 미묘한 디테일을 잘 잡아내셨는데, 이번 작품은 사람이 아니라 동물, 호랑이와의 이야기란 말이죠.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으셨던 건가요?
: 전 더 깊은 것들을 다루고 싶었어요. 전작들은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드라마였죠, 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파이와 호랑이의 관계는 사람 사이의 관계와 다르기 때문에...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피드백이 나온다고 할 수 있고요, 그래서  그걸 소재로 더욱 더 깊은 관계 전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자기 자신을 마주하게 하는 경험들, 육체적 한계에 부딪혔을 때 다가오는 감정들, 신을 갈구할 때의 어떤 것들... 상당히 추상적인데 그런 것들을 영상들로 표현해 내고 싶었고, 보여드리고 싶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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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서, 광활한 범위의 ‘관계’ 전반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는 이안 감독.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면 이안 감독의 열망이 무엇인지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3D 비주얼 효과는 말할 것도 없고요, 무엇보다 종교와 철학을 아우르는 솜씨는 정말 대단한 ‘이야기꾼’이라는 사실을 한 번 더 실감하게 하죠.

인터뷰하던 날 사실 제 가방 속엔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인 이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 DVD가 담겨 있었습니다. 혹여 잠깐 짬이라도 나면 팬이라고 고백하며 대학생 때 사두었던 DVD를 보여드릴까 했는데, 그날 상황이 상황인지라 인사를 못 나누고 돌아왔네요.  인터뷰 내내 이웃집 아저씨 같은 포근한 인상에 저음으로 차분히 답변하던 모습은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수수한 옷차림과 정갈한 말솜씨, 몸짓도요.

이번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본 사람이라면, 아무리 인색한 평론가나 영화팬이라고 할 지라도, 이안 감독을 명장의 반열에 올리는 데 반대할 것 같진 않네요. ^^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알아보고 효과적으로 스크린에 구현해내기 위해 노력하는 이안 감독. 벌써부터 다음 작품이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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