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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모녀는 왜 중국집 철가방을 들었을까?

[취재파일] 모녀는 왜 중국집 철가방을 들었을까?
기억이 맞다면 제가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2000년대 초반에 대학 수시전형이 등장했습니다. 반에서 공부 좀 한다는 친구들은 되든 안 되든 선생님의 강압(?)에 못 이겨 수시전형에 지원했는데, 한 반에 서너 명 정도는 수능시험을 안 보고 수시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 당시 수시전형은 절차가 간단했습니다. 고등학교 내신성적표와 입학원서를 내고 서류심사를 통과하면 면접과 논술을 거쳐 최종 합격자를 발표했습니다. 평소 논술에 관심을 갖고 이것만 미리 연습해두면 수시전형을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뺏기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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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사이 수시전형은 참 다앙해졌습니다. 수시로 선발하는 인원도 전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많아졌지요. 더 많은 학생들에게 다양한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좋은 변화입니다. 내신 성적이 부족해도 다른 부분에 장점이 있으면 그 점을 특화해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에 도전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그런데 다양하고 세분화된 만큼 준비할 게 많아졌습니다. 수시전형 가운데 하나인 입학사정관제를 예로 들면 학교에 따라서 최대 15종류의 서류를 요구한다고 합니다. 자기소개서와 추천서, 영어점수에 입상 실적을 입증할 각종 증빙서류까지. 한 번 지원할 때마다 서류가 수십 장, 많으면 백 장도 넘는다고 합니다. 과장한 농담이 아니라 현실이 그렇습니다.

학교마다 전형마다 요구하는 서류와 형식이 다 다르니 수험생 입장에선 얼마나 헷갈릴까요? 수시모집 철이 되면 대학교 한 곳만 지원하는 것도 아니고 이곳저곳 몇 군데 서류를 넣게 되는데, 어쩌다 실수로 서류를 바꿔내는 일도 벌어집니다.

서류를 바꿔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면 얼마나 억울할까요? 얼마 전 대학 입시 서류를 바꿔치기 했다가 경찰에 붙잡힌 모녀 사건 알고 계시죠? 그 모녀가 그렇습니다. 조건에 맞지 않는 서류를 잘못 냈다가 한 달이 지난 뒤에 알아채고 억울한 마음에 몰래 서류를 바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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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를 바꾸기 위해 모녀는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중국집 배달원으로 분장하기. 엄마는 철가방을 들고 딸은 마스크를 하고 중국음식 배달온 것처럼 학교 입학처 사무실에 들어가서 서류를 바꿨다고 합니다. 참 대담하고 간 큰 모녀죠.

모녀는 서류를 바꾸는 데는 성공했지만,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들고 나온 서류를 도로 가져다 놓으려다 딱 걸렸습니다. 일부러 바닥에 동전을 떨어뜨리고 줍는 척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해 더 의심을 샀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려 그런 거겠죠. 알고 보니 딸은 이 학교에 이미 다니고 있는데 전공을 바꾸고 싶어서 휴학을 하고 새로 원서를 낸 거라고 합니다. 5년 전에 암에 걸려 고등학교를 자퇴했던 가슴 아픈 사연도 있는데,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어렵게 들어온 학교를 영영 떠나야할 처지가 됐습니다.

모녀가 왜 모르겠습니까. 자신들의 선택이 무모하다는 것을요. 그런데 무모하다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했던 건 왜일까요? 도대체 무엇이 평범한 모녀를 범죄자로 만든 걸까요? 딸은 의대에 진학하고 싶어서 입시 서류를 냈다고 합니다. 의대 진학. 그것이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에게는 '목숨'을 걸고 무모한 도전을 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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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눈물을 쏟으며 반성하고 있지만 모녀가 저지른 일은 분명한 범죄 행위입니다. 절도와 주거침입에 업무방해까지. 모녀는 죄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런데 모녀를 비난하면서 동시에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내 자식이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아직도 대학 입시를 지상 최대 과제로 여기는 우리 사회에서 내릴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습니다. 포기하거나 안 되는 줄 알면서 무모한 도전을 하거나.

철가방을 든 모녀. 세상에 뭐 이런 일이 다 있나 싶지만 제2, 제3의 모녀 사건은 언제든 또다시 발생할 수 있습니다. 대학 입시에 목 매는 우리의 교육 현장이 변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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