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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승전국도 반성하는데…

[취재파일] 승전국도 반성하는데…
근래 들어 가장 감명 깊었던 영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최근 영화는 아니지만 주저하지 않고 꼽는 것이 "사라의 열쇠"입니다. 한국에서도 작년 8월에 개봉됐는데, 호평에도 불구하고 흥행에는 별로 성공하지 못했죠. "사라의 열쇠"는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프랑스 경찰들이 파리의 유태인들을 색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경찰이 집으로 들이닥치자 10살 소녀 사라는 어린 남동생 미셸을 벽장에 숨깁니다. 동생을 벽장에 놔둔 채 사라는 부모와 함께 수용소로 보내졌지만, 천신만고 끝에 홀로 탈출에 성공하죠. 프랑스 경찰의 눈을 피해 옛날 집으로 가서 벽장을 열어봤을 땐 이미 미셸은 벽장 안에서 숨져 있었습니다. 영화는 그 이후 펼쳐진 사라의 인생 역정을, 한 기자의 심층 취재 형식으로 풀어 나갑니다.

사라가 수용소로 보내지면서도 지니고 있었던 벽장 열쇠 때문에 미국과 한국에서는 "사라의 열쇠"라는 제목이 붙었지만, 프랑스에서 개봉된 영화의 제목은 ‘Elle s’appelait Sarah(그녀 이름은 사라입니다)’였습니다. 프랑스어 문법상으로 볼 때 과거나 현재 시제를 쓰지 않고 ‘반과거’를 사용했는데, ‘반과거’ 시제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상황에 쓰입니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사라의 인생 역정을 취재해 풀어가는 줄리아가, 새로 태어난 자신의 딸 이름을 사라로 지으면서 과거가 현재로 이어진다는 의미를 부여한 것이죠.

이 영화의 핵심 배경이었던 1942년 유태인 색출 작전은 프랑스에서 오랫 동안 논란이 돼 왔습니다. 1940년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한 뒤 괴뢰정부인 비시정부는 “유태인의 지위에 관한 법”을 제정합니다. 유태인이 고위공직자가 되는 것을 금지하고 프랑스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직업을 갖지 못하게 하는 한편, 유태인들을 등록시켜서 경찰이 감시하거나 특별 캠프에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법을 근거로 1942년 파리의 프랑스 경찰들은 대대적인 유태인 색출 작전에 나서서 모두 13,152명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그 중에 8,160명을 파리 시내에 있던 벨디브(Vel d’Hiv)라는 경륜장에 임시로 수용하는데, 영화 "사라의 열쇠"는 이 과정에서 프랑스 경찰의 폭압적인 체포 작전과 벨디브 수용소의 처참한 환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줬죠.

독일군이 패퇴한 뒤, 프랑스는 대외적으로 승전국으로서의 지위를 누리며 내부적으로는 독일 점령 당시의 부역행위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했지만, 유태인 강제 송환에 대해서는 한 동안 침묵을 지켰습니다. 1983년까지 공식 문서와 교과서 어디에도 유태인 강제송환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것이죠. 1981년 사회당의 미테랑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됐고, 이런 사실에 대한 연구가 시작돼 교과서에도 실리게 됐지만, 정작 미테랑 대통령은 재임 14년 동안 벨디브 사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1995년 시라크 대통령이 집권한 뒤에서야 프랑스 정부의 잘못이라고 처음 공식 인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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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올해 벨디브 사건 70주년을 맞아, 두 번째 사회당 대통령인 올랑드가 파리 에펠탑 부근에 있는 벨디브 위령탑에 조문하고 “프랑스 안에서 프랑스가 저지른 범죄 행위”라고 본격적인 사과를 하게 됩니다. 이에 맞춰 파리 시청에서는 벨디브 사건 당시 사라와 함께 수용됐던 4,115명의 어린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그들은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라는 사진전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7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기는 했지만, 프랑스는 이렇게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 철저하게 반성하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승전국이고 또 2차 대전의 피해 당사자이긴 하지만, 자신들 때문에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있다는 명백한 사실 앞에서는 머리를 숙인 것입니다. 우리는 올해 또 한 번의 광복절을 지냈습니다. 일왕에 대한 사과 요구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 사과라는 것이 요구를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요구한다고 사과할 리도 없겠지만, 요구해서 하는 사과에는 진정성이 담겨 있기 어려울 테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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