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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영화 속 '건축' 이야기

-영화 '건축학개론'과 '말하는 건축가'

[취재파일] 영화 속 '건축' 이야기
1. 첫사랑이 준 패배감, "너도 이제 압서방이구나!"
- 영화 '건축학개론' 속 주거 공간의 의미


곁에 있기만 해도 가슴이 콩닥콩닥, 현기증 날 정도로 좋은 그녀(수지).
예쁘고, 청순하고, 셔츠를 입었는데도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감출 수 없는 완벽한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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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녀가 가난한 집안 출신에 고지식한 건축학도인 주인공(이제훈)을 마음에 둘 리 없습니다. 같은 동네 산다는 이유로 우연을 가장해 친해지긴 했으나, 그 이상의 진척은 어렵습니다. 친구, 그 이상은 욕심일까요? 게다가 그녀는 이미 주인공과는 모든 면에서 비교 대상인 건축학과 최고 킹카 선배에게 마음을 빼앗긴 상태. 어쩐지... 음대생인 그녀가 건축학개론 강의를 들을 때부터 알아봤죠.

어느 날, 킹카 선배의 차를 함께 얻어 타게 된 주인공과 그녀. 조수석에 앉아 운전 중인 킹카 선배의 훈훈한 옆모습을 훔쳐 보며 내심 설레하는 그녀를 지켜보고 있자니 가슴이 찢어지게 아파, 주인공은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마는데요, 그런 주인공의 타는 속마음과는 아랑곳 없이 킹카 선배와 그녀는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선배, 선배네 오피스텔 좀 소개해 주세요."
"어? 너 정릉 사는 거 아니었어?"
"아빠가... 강남으로 이사하라고 해서."
"그래? 너도 그럼 이제 압서방이구나!"
"압서방...이요?"
"그래, 압서방. 압서방은 압구정, 서초, 방배 사는 사람의 줄임말이야."
"아, 네... 압서방.(웃음)"

말도 안되는 조어(造語)라고 웃어넘기기엔, 사실 이 '압서방'이 주는 무게는 가볍지 않죠. '어디에 사는가?'가 '얼마만큼 가진 사람인가?'를 말해 주는 우리 사회에서 주인공이 정면으로 맞닥뜨린 이 상황은 그야말로 '현실'입니다. 킹카 선배가 언급한 부유한 동네, 상류층 사회를 동경하는 그녀는, 누가 보더라도 없어 뵈는 가난한 주인공의 뜨거운 순정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여우짓(?)을 반복하고, 그녀의 밀당에 제 풀에 지쳐버린 주인공은 결국 마음에도 없는 험한 말로 그녀를 밀어냅니다. "그만, 꺼져줄래?"

그녀가 진입하고 싶어하는 세계, 킹카 선배는 갖고 있지만 주인공은 가질 수 없었던 그것, 압.서.방.
이십대 초반의 주인공은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던 거죠. 우리 사는 이 사회는 주인공이 앞으로 지을 집의 만듦새보다 그 집이 어느 곳에 위치할 것인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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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초반,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건축학도인 주인공에게 그녀가 '나중에 내가 살 집을 지어줘'라고 말하는데요, 거실은 이렇게 생기면 좋겠다는 둥, 방은 몇 개, 개도 키워야 하니 마당도 있어야 한다며 정성스레 그려가며 설명하는 그 집은 사실 주인공을 향한 완곡한 의미의 '거절'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녀는 처음부터 주인공이 강남 어느 곳에도 개를 풀어 놓을 만큼의 마당과 가족 구성원 수만큼의 방을 갖춘 집을 살 능력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거든요. 그러니 '이런 집을 지어줘'라는 말은, '이런 집에서 함께 살 사람은 따로 있어'라는 뜻이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주인공은 당장 그녀와 같이 살게 된 양 들떠서 어쩔 줄 모르니,,, 이런 희망 고문이 어디 있나요. 아, 답답한 주인공, 아, 얄밉도록 세속적인 욕망에 충실한...

첫사랑 그녀!
당장 간과 쓸개라도 내어줄 것처럼 진심인 주인공을 몰라보고 압서방인지 뒷서방인지 허무맹랑한 것을 좇는 그녀!

그녀가 준 패배감에 아파하던 주인공은 한 뼘 더 자란 어른이 되고, 15년 뒤, 그들은 어색하지만 기다려왔던 재회를 하게 됩니다.여기까지가, 올해 상반기 극장가 최고 화제작 '건축학개론'의 이야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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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눔의, 소통의 건축 문화  "쓸 사람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무엇이 필요하시죠?"
-영화 '말하는 건축가' 속 진정한 건축의 의미


故 정기용(1945~2011) 선생에 대한 평은 분분합니다. 조금은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흔히 말하는 '괴팍한' 성질의 건축가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부정 못하는 사실이 있죠. 바로 정기용 선생이야말로 우리 사회에 나눔의 건축 문화를 전파한 위대한 건축가라는 사실입니다.

한국 건축계의 아웃사이더이자 이단아인 정기용 선생은 평생 건축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려 했습니다. 60대 중반의 나이에도 엄청난 지적 호기심과 천진무구함으로 유명했죠. 건축을 천직으로 삼아 살아왔지만, 정작 자신의 집은 명륜동에 있는 월셋방이었습니다. 그가 참여한 건축 작업인 '무주 공공프로젝트'와 '기적의 도서관'은 한국 현대 건축의 모범답안으로 알려져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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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용 선생의 일생을 다룬 다큐 영화 '말하는 건축가'가 입소문을 얻으며 조용히 장기상영 중인데요, 영화 속에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무주의 한 시골 마을회관을 리모델링하게 된 정 선생은 부지런히 (대부분 노인인) 마을 주민들을 만납니다. 그리곤 묻죠.

"어르신, 마을회관을 새로 지을 건데요, 어떻게 지으면 좋을 것 같으세요? 무엇이 필요하세요?"

심드렁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처음엔 들은 척도 하지 않으시더니 하나 둘씩 필요한 것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 중엔 '목욕탕'을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오는 목욕탕.
읍내에 나가지 않아도 땀 흘리는 여름날 아무 때나 드나들며 씻을 수 있는 그런 목욕탕.

그래서 정말, 마을회관 2층에 공중목욕탕이 들어섭니다. 단돈 천 원에 이용할 수 있으니 주민 분들은 신이 나셨죠. 정기용 선생은 지난해 오랜 지병으로 작고하셨지만, 정 선생이 남긴 무주의 마을회관엔 오늘도 문턱이 닳아져라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습니다. 의미없이 버려질 뻔 했던 마을회관이 정말 마을 주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재탄생한 겁니다. 거기엔 정기용 선생이 평생에 걸쳐 강조했던 가치인 '소통과 배려'가 녹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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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이 찍어낸 듯 지어낸 아파트와 상가 건물엔 소통의 흔적이 없습니다. 그곳에 어떤 사람이 살게 될 건지, 그 사람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고려한 흔적도 없습니다. 사람이 있고, 건물이 들어서는 게 아니라 건물이 지어지고, 그곳에 사람이 찾아오는 격이죠. 아주 당연한 말인 것 같지만 빠르게 성장하고 변화하는 서울 도심 속 건축문화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영화 속 정기용 선생의 생전 목소리가 가슴을 울리네요.

"쓸 사람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무엇이 필요하시죠?"
"해 줄 겁니까?"
"네, 그럼요. 해드려야죠."

이 다큐의 제목이 왜 '말하는 건축가'인지 이제 눈치 채셨겠죠?
건축가가 사람들에게 많은 말을 건네고 듣는 것, 그게 정 선생이 원했던 바람직한 건축 문화였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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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인지, 올해 극장가 상반기 화제작 '건축학개론'과 또 하나의 화제 다큐 '말하는 건축가' 모두 건축을 소재로, 혹은 주제로 다루는 영화였습니다. 건축의 기역, 니은도 모르는 문외한이지만 두 영화를 통해 '바람직한 건축'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다른 듯 같은 두 영화를 묶어서 부담 없이 썼습니다. 이 시점에서 갑자기 청소한 지 오래된 어지럽혀진 제 자취방이 떠오르는 건 왜 일까요. 오늘은 퇴근하면 꼭 깨끗이 방 청소도 하고 제가 사는 건물의 외벽 한 번 애정을 가지고 쓰다듬어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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