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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한 주

어느 '맨 땅 기자'의 취재 일기

[취재파일]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한 주
기자가 만드는 뉴스는 PD의 제작물에 비해 호흡이 짧습니다. 대신 짧은 시간에 정보를 압축해 보여주죠. 그러다보니 시청자 입장에선 취재를 별로 많이 안 한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솔직히 저도 방송사에 입사하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한 군데 가서 휙 둘러 찍고 인터뷰 2명 정도 하고, 기사 1분 30초는 그냥 30분이면 쓸 테고 그러겠구나. 어렵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 일을 하고 보니 생각보다 많은 것이 다르더군요.

요즘 제가 속한 기획취재팀은 보통 3분 이내의 심층 리포트를 책임집니다. 1인당 일주일에 1개의 리포트를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일주일에 리포트 한 개가 뭐가 어려워?' 라고 여기시는 분 많으실 텐데요. 제 이야기 들어보시면 생각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합니다. 모든 리포트는 어떤 아이템을 선정하느냐가 당연히 제작의 첫 출발이겠죠. 그런데 취재과정이 내가 정한대로만 진행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내 맘대로 안 되는 것이 문제인데 오늘은 이 아이템 선정에 관한 이야기를 적습니다.

1월의 마지막과 2월의 첫째 주가 물려있던 그 한 주, 제겐 기자 생활에서 몇 안 되는 좌절의 한 주였습니다.  1월 28일 금요일, 그 다음 주 아이템으로 저는 '규제 없는 선거현수막, 피해는 누구책임?' 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예비후보들이 대거 등록하던 시기인데, 후보들이 자신을 알리기 위해 내다거는 현수막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전에는 크기와 수에 제한이 있었지만 요즘은 그 규제가 사라졌습니다. 예비후보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 외벽이면 크기와 수에 제한없이 마음대로 현수막을 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더 잘보이게 하려는 욕심에 현수막의 크기가 엄청나게 커졌죠. 거리를 다니다보면 여러분도 이런 현상을 쉽게 볼 수 있을 겁니다.

현수막의 크기가 커진 만큼 가리는 것도 많겠죠? 안산의 한 오피스텔에선 이곳에 선거 사무실을 둔 예비후보가 주민들의 허락도 받지 않고 대형 현수막으로 건물 4면을 도배하다시피 하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제보자가 보내준 사진을 보니 대형 현수막 때문에 집안전체에 햇빛이 차단돼 어두컴컴하고 창문도 열 수 없게 돼 버렸더군요. 시의성도 있고 고발성도 강한 적절한 아이템이라 생각하고 다음 주 월요일부터 촬영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촬영을 시작하기로 한 다음 주 월요일, 제보자에게서 문자 한 통이 왔습니다. 문제의 후보가 그날 이른 아침에 건물을 둘러싸고 있던 현수막을 다 치웠다는 겁니다. 그때 제 뇌리에 '아차' 하는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그 전 금요일 선거관리위원회에 전화를 걸어 예비후보 현수막에 관해 이런 저런 내용을 문의했는데, 혹시 이것 때문에 공문이 발송됐나?하는 생각이 든 겁니다. 어쨌든 현수막은 사라져 버렸으니 눈물을 머금고 다른 곳을 찾아야 했지요. 마포에도 가보고 평촌에도 가보고 예비후보 사무실이 모여 있는 지역을 여러 군데 돌아봤습니다. 하지만 안산처럼 오피스텔에 대형현수막을 걸어놓은 곳은 없더군요. 대부분 일반 사무실 빌딩이었고 입주 사무실에 허락도 다 받았더군요. 결국 그 아이템은 취재 이틀 만에 폐기처분해야 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뭐 새로운 거 또 찾으면 되지'라고 믿었습니다. 예전에 하려고 했다가 그만둔 아이템을 되짚어 봤더니 송파구 문정동에 있는 '가든파이브'가 눈에 띄더군요. 백화점이 있는 곳과 청계천 상인들에게 분양된 곳의 차이가 극과 극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상인들이 입주한 가든파이브의 리빙관과 테크노관은 손님이 없어 유령건물처럼 되어버렸다는 것이죠. 부푼 꿈을 안고 들어온 6천여 명의 청계 상인 가운데 대부분이 가든파이브를 떠났다는 이야기도 들렸죠. 상인을 한 분 섭외해서 스토리를 풀어 가면 되겠구나 싶더군요. 그런데 이것도 막상 취재를 해보니 'NEWS'가 아닌 이른바 '구문'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새로운 사실을 더해야 하는데 그것을 찾지 못하겠더군요. 그렇게 하루 이틀 날이 가고 목요일이 됐습니다.

마지막 카드는 '햄버거 난민'이었습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콜라나 햄버거 하나 시켜놓고 밤을 새는 사람들이 요즘 적지 않다는 겁니다. 솔직히 반신반의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모습을 화면에 담기 위해선 순전히 몰래카메라에 의지해야 하는데 그에 대한 고민도 적지 않아서 되도록 다루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정이 사정인 만큼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사실 햄버거 난민은 2009년 일본에서도 화제가 됐던 내용이죠. 당시 일본에선 경제난때문에 PC방에서 밤을 보낼 돈도 없어 24시간 패스트푸드점에서 노숙 아닌 노숙을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가 관심을 끌었죠.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햄버거 난민이 생겼다는 내용이 뉴스에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2월초 강추위가 시작되면서 노숙자들까지 패스트푸드점으로 들어와 밤을 보낸다는 이야기가 들리더군요. 사실상 소문만 듣고 시작한 아이템이지만 일단 눈으로 확인하기로 했습니다. 

기획취재팀의 VJ 2명과 함께 서울과 수원 등지의 24시간 패스트푸드점을 뒤지기로 했습니다. 출발은 새벽 1시, 취재는 동숭동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처음 찾아간 곳은 'M 햄버거 체인점', 이곳은 지방지 기사에도 나왔던 곳인데 막상 가보니 아무도 없더군요. 졸린 눈을 비비며 커피 한 잔 시켜놓고 30분을 기다리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점장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가게에는 그런 사람이 아예 오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혹시나해서 근처의 'L 햄버거 체인점'에도 가봤지만 역시 이곳에도 '난민'은 하나도 없고 점원들만 가게를 청소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종로에서 이태원으로 서울역과 영등포역까지, 문이 열린 패스트푸드점마다 일일이 확인하면서 새벽 4시까지 15곳의 패스트푸드점을 들렀습니다. 하지만 난민의 'ㄴ'자도 보이지 않더군요. '결국 소문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점원들 말로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그런 경우가 있긴 하지만 노숙자는 없다고 합니다. 그런 분들이 들어와도 3시간이 지나면 점원들이 나가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하고 그것 때문에 시비가 붙는 일도 없다고 합니다. 결국 아무런 소득없이 새벽 4시가 됐습니다. 이번 주에는 어떻게 해야하나 하는 걱정때문에 꼬박 밤을 샜는데도 졸음조차 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같이 있던 VJ가 친구에게 전화를 하더니 수원역에 있는 패스트푸드점에 햄버거 난민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영등포에서 당장 수원으로 달려갔습니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하지만 수원역에 도착하고서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영하 15도의 강추위 때문인지 일반 손님조차 한 명도 없더군요. 더구나 수원역의 패스트푸드점은 대청소중이었습니다. 허탈한 속을 해장국으로 달래고 지친 몸을 취재차에 싣고 회사로 돌아왔습니다. 머리속이 먹먹해지더군요. 생각이 아예 멈춰버렸는지 새로운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고……. 정말 딱 1시간만 숙직실에서 눈을 붙이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이템을 찾아봤지만 정지한 뇌는 재가동을 안 하더군요. 그날 저녁 부장에게 제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말은 "죄송합니다"였습니다. 그야말로 몸은 몸대로 녹초가 되고 손에 쥔 건 아무 것도 없는 지옥 같은 한 주였습니다.

제가 이렇게 별 일도 아닌 내용을 꾸역꾸역 적은 이유는, 시청자가 보시기엔 1분 30초 길어야 3분 정도 분량으로 매일 매일 나가는 '별 것 아닌' 뉴스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하는지를 이해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요즘은 TV뉴스를 보기도 전에 이미 인터넷과 SNS를 통해 뉴스를 다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TV뉴스는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혹은 언론은 어떻게 해석하나 보려고 시청한다는 거죠. 더구나 짧은 TV뉴스만으로는 궁금증도 다 해결되지 않고 뭔가 부족해 보이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하지만 뉴스를 만드는 현장의 기자들은 최선의 뉴스를 보여드리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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