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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스피커스 코너'는 아니지만…"좋은 행사"

-서울시 '시민발언대' 청중으로서의 소감

[취재파일] '스피커스 코너'는 아니지만…"좋은 행사"

스피커스 코너(Speakers' Corner)라고 들어보셨나요? 런던 도심 공원인 하이드파크 동북쪽 구석에 있는 명소인데요. 매주 일요일 아침, 그곳에서는 누구든 자신만의 단상을 갖다놓고 올라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아, 단, 여왕과 왕실에 대한 비난은 할 수 없고요. 여왕만이 스피커스 코너를 폐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영국 왕실의 절정기라고 할 수 있는 빅토리아 여왕 시절인 1872년에 스피커스 코너가 생겼으니, 그런 규제가 생겼을 법 합니다. 아무튼 런던 체류 시절의 레닌도 즐겨 찾아 정치적 목소리를 냈다는 이 스피커스 코너는 영국 언론 자유의 상징 같은 곳입니다.

서울시가 한국판 스피커스 코너를 만들어 보겠다고 나섰습니다. 지난 수요일(11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처음으로 '시민발언대'를 실시한 것입니다. 서울시 홈페이지에 사전 신청해 참여할 수 있는데, 하루 16명으로 접수가 마감됩니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한 사람당 10분씩 시간을 주고 5분씩 교체 시간을 두려면, 16명 이상은 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발언할 내용도 미리 간략하게 시에 접수합니다.

서울시는 일단 1분기에 이 시민발언대를 시범운영하겠다는 계획인데, 18일까지 신청이 마감됐을 정도로 인깁니다.

실시 첫날이었던 11일, 마지막에 불참한 신청자 1명을 제외하고 모두 15명의 서울시민이 시가 마련한 연단에 올랐습니다.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 중 하나였다는 차가운 날씨 탓에 -저 같은 기자들 외에는- 주목하는 행인도 별로 없었지만, 참여한 발언자들의 열기만은 대단했습니다. 들어주는 사람이 있는 광장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내고 싶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새삼 느꼈습니다.

연령도 직업도 주장도 제각각이었던 발언자들의 육성은 11일 밤 8뉴스에서 짧게나마 전해드렸는데요, 발언하신 시민들과 발언 내용의 면면을 좀 살펴보자면, 서울시의 영원한 '넘버원 쟁점'일 듯한 재개발/재건축/뉴타운 등, 주택 문제와 땅 문제를 주제로 들고 나오신 분이 4분으로, 역시 가장 많았습니다.

꼼꼼히 준비해 온 발언 내용으로나 호소력으로나 강한 인상을 남긴 건 3세 유아를 자녀로 두셨다는 38살 황혜란 님이었습니다. 황혜란 님은 본인의 큰딸을 보냈던 민간형 어린이집이 서울형 어린이집으로 바뀐 후, 2-3살 혼합반을 둘 수 없다는 서울형 어린이집의 규정 때문에 본인의 아들을 포함한 몇몇 아이들이 추첨을 통해 어린이집을 나가야 하는 상황이 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학 때 교육을 공부하셨다는 황혜란 님은 프리젠테이션 보드까지 몇 장 준비해 오셨는데요. 유아의 발달 단계 때문에 2-3세 혼합반은 적절치 않다는 서울시의 보육 정책 근거가 불합리하다고 일목요연하게 지적하시는 한편, 예쁜 아이들의 사진을 가득 붙인 프리젠테이션 보드를 보여주면서 "(시정 관계자 여러분 중 누가) 이 아이들더러 어린이집에서 나가라고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실 때는 목이 메었습니다. 서울시는 '시민 발언대'의 동영상 자료 중 정책에 참고할 만한 것들은 해당 부서로 넘겨 검토하게 할 방침이라고 하는데, 그 말대로라면, 황혜란 님의 동영상은 검토 1순위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만삭 임신부로 발언대에 올라 시선을 모은 김임선 님은 산모도우미 정책이 지나치게 저소득층에 국한돼 실효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하시기도 했습니다. 젊은 어머니들의 관심은 역시 무엇보다 출산과 육아 과정에서 체감하게 되는 육아정책, 복지 문제에 집중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구청 공무원의 불친절에 마음을 크게 상한 어르신, 독도가 한국땅이라는 증거자료로 고지도 등을 가지고 나오신 어르신, 경기한파 속 모두 힘들지만 장년층들 다같이 힘내자고 말하고 싶어 나왔다면서 "나도 빚이 있지만 빚을 즐겁게 갚기 위해 부채 상환 기간 동안 무도장도 가고 컴퓨터도 배우기로 했다"는 분 등- 시민들의 삶은 참 다양하고 발언의 내용도 무궁무진했습니다. 요즘 청년들이 힘든 건 다 '나약해서'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 나왔다는 한 어르신은 "할 말이 너무 많아 다음주도 예약해 놨다"며 본인의 발언 시간을 광고하시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재미있게 들었고, 기사를 쓰느라 녹화된 발언 내용을 다시 들어볼 때는 혼자 이어폰을 꽂고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때도 있었습니다.

음... 이 '시민 발언대'가 한국판 '스피커스 코너'가 되겠느냐고 물으신다면, 그냥 서로 다른 두 개의 발언대라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서울시가 마련한 시민 발언대는 그냥 '서울시청에 호소합니다'라고 불러야 할, 일종의 광장 민원소입니다. 뭘 그리 까다롭게 구분하냐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저는 두 발언대의 방향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런던의 '스피커스 코너'는 그냥 장소입니다. 좌표입니다. 여기서만은 무슨 소리를 해도 잡아가지 않겠다, -여왕님 얘기 아니라면- 수상 욕도 해도 좋다, 고 허가해 준 공간일 뿐입니다. 아주 몰상식하고 불법적이며 어이없는 소리도 누구든 와서 지껄일 수 있는 '자발성'의 공간입니다. 사과상자를 가져오든 의자를 가져오든 자기 연단은 자기가 준비합니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비방과 욕설, 정당에 대한 지지나 비판 등을 할 수 없는 '시민발언대', 10분이 지나면 마이크가 꺼지고 "부적절한" 발언이 나와도 마이크가 꺼지는 시민발언대에서 결국 시민들이 하게 되는 얘기는 "시장님, 이러저러하게 해주세요" 라는 민원 뿐입니다.  그런 광장의 민원실이 나쁘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저는 '시민발언대'와는 별개로, 문득 진짜 '한국판 스피커스 코너'가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한 발언자는 팔순 어르신이었습니다. 본인을 "김대중/노무현/김정일 위원장의 유훈을 물려받은 대한민국 통일 대통령"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정장을 점잖게 차려입고 오시긴 했는데, 이 분은 일반적인 자리에서라면 적절치 않게 느껴질 말씀들을 하시긴 했습니다. 오해가 있을까봐 말씀드리는데, 그 분의 정치적 견해가 적절했다 적절치 않았다고 제가 판단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욕설 등을 하셨다고 해두죠. 발언 중단을 요청하는 시청직원들에게 삿대질을 조금 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스피커스 코너는 사람을 가리고, 적절/부적절을 가리는 곳이 아닙니다. 누가 나서서 발언을 제지할 수 있는 곳도 아니고요. 부적절한 말이든 뭐든, 듣는 사람이 있든 없든, 그야말로 제한없는 웅변들이 울려퍼지는 '스피커스 코너'가 한 군데쯤은 우리에게 있어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아주 극단적인 정치적 견해, 날카로운 정치적 비판과 그냥 나랏님 욕설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곳 말입니다.

아,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건, 런던 스피커스 코너에선 전통적으로, 발언자가 찬성과 환호의 반응보다 야유와 비판의 반응을 더 많이 받는다는 점입니다. 네, 발언자는 어떤 '부적절한' 얘기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냉담하고 날카로우며, 또는 자기 얘기보다 더 '부적절한' 반응도 감수해야 합니다. 발언을 제지하는 사람도 없으나, 그렇다고 발언자가 일하러 나온 공무원을 밀칠 권리도 없는 곳, 아니 애초에 그런 공무원의 대접과 안내를 받으며 연단에 오르지 않는 곳이야말로 '스피커스 코너'일 겁니다.

그렇다고 광장의 민원실인 시민발언대가 나쁘다는 얘기도 결코 아닙니다. '원순 씨에게 바란다'는 온라인 신문고도 있고, 연일 화제가 되는 트위터도 있는데 이런 건 너무 '새 시청의 대외 행사용'인것 같다는 일부 목소리에 대해선 "저는 노인이라 컴퓨터도 잘 못 쓰고요"라고 말씀하셨던 한 발언자의 말씀을 답으로 갈음하겠습니다. (그런데 신청은 시청 홈페이지에서 하네요!)

'시'에서 제대로 된 연단과 '빽판', 마이크와 난로까지 준비해 주는 시민발언대는 당연히 '시청 이벤트'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발언을 마치고 연단에서 내려온 뒤 "아무리 당국을 찾아가 보고, 불합리하게 느껴지는 정책에 대해 설명을 요구해도 답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번 발언 이후, 왜 내가 원하는 정책이 안 되는 것인지 속시원하게 설명이라도 듣는다면 감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신 황혜란 님의 말씀, 이 말씀이 아마도 '시민발언대는 좋은 이벤트'라고 느낀 제 최종적 감상의 근거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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