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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10년지기' 신재민-이국철, 각자 '집으로'

-"당신이 원하는 게 뭐야"

[취재파일] '10년지기' 신재민-이국철, 각자 '집으로'

이국철 SLS그룹 회장이 한 주간지를 통해 이른바 '측근비리'를 무차별 폭로하기 시작한 지 딱 한달째 되던 지난 20일 새벽 2시 반, 법원은 이 회장과 그의 '10년지기'라는 신재민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에 대한 구속영장을 동시에 기각했습니다.

영장실질심사가 전날 오후 2시 반부터 시작됐으니,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검찰청에서 대기하며 영장 발부 여부에 두 사람은 크게 마음을 졸였겠지요. 영장 기각 후 시차를 두고 검찰청사를 빠져 나오는 두 사람의 심경은 이렇습니다.

-이국철 SLS그룹 회장 "대한민국 법원의 현명한 판단에 감사드립니다."

-신재민 전 문화부 차관 "죄송하다는 말씀밖에 더 드릴 말이 없네요."

현장에서 두 사람을 만난 기자의 주관적인 느낌으로는, 이 회장은 자신이 구속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신 전 차관보다는 좀 더 강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검찰의 사법처리가 임박하면서 이 회장의 폭로 수위도 더 높아져갔기 때문입니다.

지난 한달간 이 회장의 폭로는 연일 언론에 비중 높게 보도됐습니다. 그의 폭로 내용은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인사들에 대한 것이었고, 임기가 1년 정도 남은 대통령의 정권말 '레임덕'의 신호탄이 아닌가하는 시각이 컸으니까요.

이국철 회장의 폭로 내용을 크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신재민 전 차관에게 지난 10년간 10억원대 금품 제공

▲박영준 전 국무차장 일본 출장중 향응제공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 임재현 청와대 정책홍보비서관 명절 상품권 5천만원 제공

▲검사장급 검찰 간부 4명에게 SLS그룹 검찰 수사 구명로비 1억원 제공

▲권재진 법무장관이 청와대 민정수석 시절 SLS그룹 기획수사 지시

이 중에서 이번 검찰 수사 대상은 신재민 전 차관 관련건에 집중됐는데요. 검찰은 신 전 차관이 문화부 차관 재직 시절이던 지난 2008년과 2009년 사이 SLS 싱가폴지사 법인카드로 1억원 상당을 쓴 혐의로 뇌물죄, 이 회장에게는 뇌물공여 혐의로 각각 구속영장을 청구했습니다.

SBS 취재진이 확인한 검찰의 구속영장에 따르면, 신 전 차관은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 시절인 지난 2007년 이 후보 지원 조직인 안국포럼과 이 당선자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등에서 핵심 역할을 했으며 이후 2008년과 2009년 문화부 제2차관과 제1차관을 거치면서 정부 차관회의 대변인도 겸하는 등 주요 국정현안에 개입할 수 있었던 '실세차관'이라고 적시돼 있습니다.

구속영장의 성격상 엄격한 사실관계만을 적시해야 하는데, 검찰은 여기에다 '실세차관'이라는 다소 주관적인 표현을 썼습니다. 형법상에는 명시적으로 규정돼 있지 않지만 대법원 판례로 존재하는 '포괄적 뇌물죄'를 신 전 차관에게 적용했다는 해석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실세차관'이라는 단어때문이죠.

신 전 차관은 '측근 실세'이기 때문에 이 회장이 2009년 회사 워크아웃과 창원지검 수사 등으로 곤궁한 처지에 처했을때 '광범위한 청탁'을 할 수 있는 '10년지기'라는 겁니다. 실제로 구속영장을 보면 "이 회장이 아나운서 조카가 TV 프로그램을 계속 맡을 수 있도록 신 전 차관에게 부탁할 수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은 친한 사이다"라는 말도 나옵니다.

검찰이 포괄적 뇌물죄라는 개념을 가져온 배경에는, 신 전 차관과 이 회장 두 사람 모두 "주고 받은 금품에는 대가성이 없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뇌물죄든 알선수재든 알선수뢰든 공직에 있는 자에게 돈이 오고 간 것에 '대가'가 있어야 처벌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당췌 두 사람 모두 '대가성이 없고 우린 오랜 친구라 우정을 나눈 것'이라고 주장하니 검찰은 오죽 답답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광범위한 청탁을 할 수 있는' 실세 차관에게 돈이 갔다는 정황에 포괄적 뇌물죄라는 개념을 도입했다고 봅니다.

하지만 법원은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죠. 법원은 "범죄 혐의를 의심할 여지는 있지만, 추가 수사를 통해 실체적 진실이 더 규명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법원 내부에서는 "신 전 차관이 '실세차관'이라는 정황만 있을 뿐, 둘 사이에 오간 구체적인 청탁과 청탁에 따른 범죄 사실이 구체적으로 적시되지 않았는데 영장을 발부해 줄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대세였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얘기가 길어졌네요. 정리하면 제가 위에 정리한 이국철 회장의 '대규모 폭로'에 대해 수사가 더 필요하다는 것이 구속영장을 기각한 법원의 입장인 것이고, 카드영수증 등을 통해 확인한 신 전 차관의 해외법인카드 사용 부분은 판단하지 않으면서 수사결과 대부분 허위이거나 실체가 없거나 증거가 없는 '이국철의 진술'에 대해 추가 수사하라는 법원의 판단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게 검찰의 분위기입니다.

검찰은 "영장을 재청구하겠다"고 밝혔지만, 그 시기가 언제쯤일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예상보다 빨리, 전격적으로 영장을 청구했기 때문에 그만큼 혐의 입증에 검찰이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많은 기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자신감이 컸던 만큼, 영장 기각에 따른 충격 회복 시간도 꽤 걸리지 않겠나 싶습니다.



 

여기서 잠깐, 이 사건을 한달 넘게 취재하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게 가장 궁금했습니다. 이국철 회장은 자신이 뇌물공여자로서 형사처벌 가능성이 있는데도 '10년지기' 신재민 전 차관을 '배신'하고 왜 돈을 줬다고 폭로했을까. 또 이름 들으면 누구나 다 알만한 대통령의 실세 측근들 이름을 왜 폭로하고 또 폭로했을까. 십여 차례 이 회장을 직접 만나서도 물어봤습니다. "당신이 이 폭로를 통해서 얻고 싶은게, 원하는게 뭐냐."

이 회장은 "대한민국에 다시는 권력을 이용해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은 이 회장이 "대가성 없는 돈"이었다고 줄곧 주장한 만큼, 자신의 처벌은 피하면서 동시에 워크아웃 과정에서 공중분해돼버린 자신의 SLS그룹에 대한 '한'을 풀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합니다. 철도고등학교 출신으로 자산 2조4천억원짜리 그룹의 오너가 되기까지, 이 회장 본인의 '자수성가 인생'이 하루 아침에 날아가버렸으니 말입니다.

이 회장은 영장실질심사 전 "내가 구속되면 정관계 인사들과 검찰 인사들에 대한 비리가 총 망라된 비망록 5권을 두 달에 한 권씩 공개하겠다"고 추가 폭로 의사를 밝힌 바 있는데요. 비록 영장은 기각돼서 이 회장을 일단 구속을 피했지만, 앞으로 검찰의 추가 수사와 영장 재청구 과정에서 이 비망록이 과연 '판도라의 상자'가 될지 소리만 요란한 빈깡통일지 여전히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5년에 한 번씩 정권 말마다 '측근 비리' '권력형 비리'가 나왔던 나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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