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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노벨상 수상자 vs FIFA 올해의 선수

-알고 보면 재미있는 라이베리아 대통령 선거

[취재파일] 노벨상 수상자 vs FIFA 올해의 선수

서부 아프리카의 낯선 나라 라이베리아를 아십니까? 이 나라에서 지금 대통령 선거가 한창입니다. 저 멀리 아프리카의 조그만 나라에서 대선이 있건 말건 관심 없다"하실 분들이 많으실 거라 생각됩니다만, 이게 알고 보면 꽤나 재미있는 선거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지구촌 어디든 24시간 안에 갈 수 있는 글로벌 시대에 살고 있다지만, 우리에게 아프리카는 여전히 생소한 미지의 땅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랍의 봄'으로 연일 뉴스에 등장했던 리비아나 이집트, 튀지니, 알제리 같은 북아프리카 나라들이나 지난해 월드컵을 치른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나이지리아나 카메룬, 토고 같은 축구 강국, 마라톤의 명가 케냐 등 스포츠를 통해 이름을 알린 국가들, 좀 더 말하자면 해적 소굴로 악명 높은 소말리아까지는 그럭저럭 귀에 익숙하지만 '라이베리아?'는 아무래도 생소하실 겁니다.

지구본을 놓고 보자면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아메리카 대륙과 마주하고 있는 아프리카의 서중부 연안국 라이베리아는 1인당 국민소득이 200달러 정도밖에 안 되는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이지만 사실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공화국입니다. 'Republic of Liberia'라는 나라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노예에서 해방돼 미국에서 돌아온 흑인들이 1847년에 세운 제3세계 최초의 공화국이 바로 라이베리아입니다.

하지만 '자유의 나라' 라이베리아의 건국에는 씁쓸한 제국주의의 유산이 숨겨져 있습니다. 미국의 노예 해방과 이를 이끈 링컨 대통령은 마치 세계 인권 신장의 최고 공로자로 간주되고 있습니다만 미국의 노예 해방 선언은 결코 순수한 선의만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남부 농장지대와 북부 공장지대 간의 구조적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노예제도를 폐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남북 전쟁에서 승리한 링컨 대통령에게도 연방국가건설이 급선무였지 노예제도의 유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막상 해방은 시켰지만 백인 주류 사회는 당시 인구 400만 명 가운데 1/5인 80만 명에 이르는 흑인들을 미국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흑인 노예 해방과 관련된 논쟁이 한창이던 1816년 '미국식민협회'라는 조직이 탄생했는데 이 조직의 목적은 곧 해방될 흑인 노예들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미리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기독교 목회자들이 주동이 된 '미국식민협회'는 일찌감치 대서양 건너 서부 아프리카에 장소를 물색해 두고 노예출신 흑인들을 집단으로 되돌려 보낼 준비 공작을 착착 진행시켜 나갔습니다. '미국식민협회'가 멋지게 이름 붙인 그 집단 이주 예정지가 다름 아닌 '라이베리아'였습니다.

아프리카로 되돌아 온 흑인들은 몽땅 미국식민협회가 미리 마련해 둔 장소에서 다시금 미국의 식민지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노예 삶을 사는 장소만 미국에서 아프리카로 이동한 겁니다.

감리교의 목사가 라이베리아 식민통치의 초대 통치자로 임명됐고, 새 식민지의 수도는 '몬로비아'로 결정됐습니다. '몬로비아', 수도의 명칭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먼로 대통령의 이름에서 따 왔습니다. 버지니아 노예 출신이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올랐고 미국 헌법을 그대로 모방해 헌법을 선포했으며 심지어 국기도 성조기를 따라 만들었습니다. 미군이 영구 주둔하면서 라이베리아는 미국의 아프리카 침략의 전초기지로 변모했습니다.

이때, 라이베리아로 되돌아 온 미국 노예출신 흑인들은 십만 명이 넘었는데 이들을 '아메리코-라이베리안, Americo-Liberian'이라고 부릅니다. 이 아메리코-라이베리안들은 토착 원주민들과 비교하면 5%에 지나지 않았지만 미국의 막강한 힘을 등에 업고 손쉽게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개국 초부터 아메리코-라이베리안들과 절대적 다수인 토착 원주민들간에 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후원을 받는 '트루휘그당'이 130년 넘게 일당독재를 했지만 정국은 불안정하기만 했습니다. 미국 노예출신 흑인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불평등한 정치 제도 속에 수많은 인종과 부족간의 갈등까지 겹치면서 '흑흑 갈등'이 극에 달했습니다.

특권층이 된 아메리코-라이베리안들은 토착어가 아닌 영어를 쓰며 주일이면 교회에 나갔고 원주민 흑인들을 야만인 취급했습니다. 또, 자식들은 모두 미국으로 유학 보내 선진국의 문화의 우수성을 배워오게 한 뒤 이를 기반으로 기득권을 세습시켰습니다. 토착민들의 증오와 반발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갈등이 상징적으로 표출된 사건이 1980년 발생한 사무엘 도 상사의 쿠데타입니다. 별도 아니고 상사 계급장을 달고 어떻게 쿠데타가 가능했을까요? 장교가 될 수 없었던 원주민이 올라 갈수 있는 최고의 계급이 바로 상사였습니다. 쿠데타에 성공한 도는 원주민 최초의 대통령이 됐지만 억압 정치를 펼친 끝에 반군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이후 원주민도 할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졌고 희대의 도살자 찰스 테일러 대통령이 등장했습니다. 도살자라는 별명답게 테일러는 내전 기간 동안 민간인 학살과 강간을 일삼았고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거듭한 끝에 결국 나이지리아로 도망쳤고 국제전범재판소에 제소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재판 과정에서 테일러가 슈퍼 모델 나오미 캠벨에게 선물했던 다이아몬드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블러디 다이아몬드 스캔들'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피로 얼룩진 라이베리아 현대사에서 서슬 퍼런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해 온 '철의 여인'이 있습니다. 바로 엘런 존슨 설리프입니다. 아메리코-라이베리안 출신으로 하버드대 박사인 엘리트 여성 설리프는 귀국 후 재무차관을 지내는 등 출세 가도를 달렸지만 도 정권과 테일러 정권에 잇따라 저항하며 투옥과 망명을 거듭했고 14년 간의 내전이 종식되면서 치러진 2005년 대선에서 아프리카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당선됐습니다.

이때 대권을 놓고 결선 투표까지 벌였던 경쟁자가 바로 세계적인 축구스타이자 라이베리아의 축구 영웅인 조지 웨아입니다.


조지 웨아! 축구 팬들이라면 그 이름을 분명히 기억하실 겁니다. 현란한 드리블에 골 결정력까지 갖춘 웨아는 1995년 FIFA 올해의 선수상에 이어 발롱도르상까지 거머쥔 불세출의 스타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아스널과 이탈리아 세리에 A의 AC 밀란, 그리고 프랑스리그 AS 모나코 등 쟁쟁한 유럽 명문팀에서 활약했고 은퇴 뒤에는 라이베리아 국가대표팀 코치 겸 감독을 맡아 형편이 어려운 팀을 위해 자비로 선수들의 유니폼을 제작해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축구는 단순한 스포츠 그 이상의 가치를 뜻합니다. 부와 명예를 동시에 가능하게 해 주는 유일한 탈출구가 바로 축구이기에 축구 스타 조지 웨아는 수많은 라이베리아 원주민들에게 꿈이자 희망이었습니다.

               


민주화와 여권을 위해 투쟁해 온 아메리코-라이베리안과 성공한 원주민 출신 축구 스타간의 대선은 결국 아메리코-라이베리안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미국의 영향력이 여전함을 다시금 보여준 셈입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설리프의 취임식에 이례적으로 부시 대통령 내외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동시에 참석했고, 라이베리아 정부는 연이어 친미 성향의 정책을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6년이 지나, 라이베리아에서는 요즘 차기 대통령을 뽑는 대선이 한창입니다. 재선에 도전하고 있는 설리프 대통령은 지난 주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돼 경사를 맞았습니다. 설리프에 맞선 유력한 도전자는 역시 하버드 대학 출신인 윈스턴 툽먼 후보입니다.

이 툽먼의 런닝메이트로 조지 웨아가 나섰습니다. 툽먼은 대중적 인기가 여전한 조지 웨아를 앞세워 인기 몰이를 하며 수천 명의 군중을 몰고 다녔습니다. 아메리칸-라이베리안 툽먼이 대통령 후보로 나서기는 했지만 사실상 설리프의 대항마는 조지 웨아나 다름이 없습니다. 2005년 선거에 이은 재 대결인 셈입니다.

치열한 대선 판에서 설리프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이 유리하게 작용할지는 가름하기가 어렵습니다. 수상자 발표 직후엔 설리프에게 대형 호재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지만 야권에서 노벨상 수상 시기의 적절성을 놓고 미국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주장하면서 노벨상 수상이 오히려 역풍을 불러 올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됐습니다. 조지 웨아는 설리프가 과거 테일러를 지지했었다며 "노벨평화상이 부패자에게 주는 상이냐"며 이 논란에 불을 지피기도 했습니다.

양 진영 모두 승리를 장담하는 가운데 오늘 저녁 투표가 끝나는 대로 개표에 들어가 최종 결과는 오는 26일 발표될 예정입니다. 노벨상으로 무장한 아메리코-라이베리안의 굳히기 승리로 끝날지, 6년간 와신상담해 온 원주민 출신 축구 스타의 시원한 설욕전이 될지... 여러분 이제 서아프리카의 낯선 나라, 라이베리아의 대선이 좀 재미있어지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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