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 등장하는 판결 사례 및 분석은 공익변호사 그룹 '공감'의 염형국 변호사가 쓴 "성폭법 제8조 '항거불능'에 대한 판결 비평"을 참조했습니다. 귀한 시간 내서 인터뷰에 응해 주시고 좋은 자료를 제공해주신 염 변호사님께 감사드립니다.
50대 남자가 정신지체장애를 가진 만 14살 여자 아이를 4년 동안 상습적으로 성폭행했습니다. 가해자 동거녀의 딸인 피해 아동은 초등학교 3~4학년 수준의 지능이 있고 학습 능력이 떨어지지만,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등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이라면 가해자인 이 남자에게 어떤 형벌을 선고하시겠습니까? 징역 20년? 징역 7년? 신상공개와 전자 발찌? 화학적 거세?
2심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2005년 4월 20일 부산고등법원에서 내려진 판결입니다. 동거녀의 딸이자, 정신지체를 가진 14살 여자 아이를 상습 성폭행한 이 남자는 그날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결과는 반복됩니다. 영화 '도가니'에 등장하는 가장 끔찍한 사건, 광주 인화학교 행정실장 김모씨가 14살난 청각장애 여자 아이를 화장실로 끌고 가 성추행 한 실제 사건에 대해 법원은 2년 가까이 재판을 진행한 광주지방법원은 2008년 무죄를 선고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반복될 수 있을까요?
성폭행 가해자 무죄의 근거: 성폭력 특례법 6조
이 사건들이 성폭력 특례법 6조, 이른바 '항거불능' 조항(개정 이전에는 구 성폭력법 8조)에 근거해 기소됐기 때문입니다. 법조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체 또는 정신적인 장애로 항거불능인 상태를 이용해 간음하거나 추행한 사람은 형법 제297조(강간) 또는 제298조(강제추행)에서 정한 형으로 처벌한다."
법원이 무죄를 내린 이유는 피해자들이 '항거불능' 상태가 아니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앞서 부산고법의 사례에선 피해자가 "글을 읽고 쓸 줄 알고…… 사회적 성숙도에서 다른 학생들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저항이 불가능한 상태가 아니라고 판단했고, '도가니' 사건의 경우에는 피해자가 "수화로 싫다고 밝히고 몸을 비틀어 거부 의사를 표현했다"는 점을 감안해 항거불능 상태가 아니라고 규정했습니다.
즉, 법원은 기초적인 의사소통 능력이 있거나, 성폭행 과정에서 거부 의사를 표시했을 경우, '항거불능' 상태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조항에 근거해 처벌할 수 없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애당초 이런 법률을 왜 만든 것일까요?
입법취지는 좋았던 법률
이 조항의 입법 취지는 장애인의 인권을 특별히 보호하고 가해자를 엄중히 처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기존 법조항으로는 처벌할 수 없거나, 처벌이 너무 약하게 이뤄지는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성폭행이나 성추행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처벌 조항은 형법 297조(강간)과 형법 302조(심신미약자 간음)입니다. 13세 이상 만 19세 미만의 미성년자에 대해서는 청소년성보호법 7조(아동 청소년에 대한 강간 강제추행 등)가 적용됩니다.
이 두 가지 조항만 가지고는 장애인 성폭력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먼저 이 조항들은 모두 '친고죄'입니다. (2010년 법률 개정으로 청소년보호법 7조를 '친고죄'로 규정하는 조항은 폐지됨) 피해자 측이 적절한 기간 내에 가해자를 고소하지 않거나, 가해자 측과 합의할 경우 처벌할 수 없는 범죄입니다. 범죄 인지 능력, 수사 기관의 조사에 임하는 능력 등이 비장애인에 비해 뒤처지는 장애인들의 특성을 감안하면 장애인 성폭행은 고소 없이도 처벌 할 수 있는 조항으로 다스리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장애인 성폭행의 경우 형법에 규정된 강간 및 강제추행의 구성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형법에서 규정하는 강간죄는 강요나 폭행을 동반해야 합니다. 강요나 폭행 등이 없는 강간이나 추행은 일종의 '화간'으로 보고 처벌하지 않습니다. 불행히도 장애인 성폭행의 경우 정신적인 장애 등을 이용해 강요나 폭행 없이도 성폭행이 이뤄지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이를 처벌하기 위한 조항이 필요했습니다. (강요나 폭행이 아닌 위계나 위력을 사용한 강간죄를 처벌하는 형법 302조도 있지만 마찬가지로 친고죄이고, 처벌이 미약합니다.)
이런 이유로 장애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특별히 보호하기 위해 탄생한 법률이 성폭력특례법 6조, 장애로 인한 항거불능을 이용한 강간 및 추행 조항입니다. 친고죄가 아니고, 강요나 폭행 없이도 엄한 처벌이 가능한 특별 조항을 만든 것이죠. 입법 취지는 참 좋았습니다.
좋은 법을 나쁜 법으로: 대법원의 협소한 해석
좋은 뜻으로 마련된 이 조항은 2003년 대법원 판결 이후 장애인을 울리는 '악법'이 됩니다. 대법원이 2003년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피해자를 강간한 남성에 대한 판결에서 '항거불능' 상태를 극히 협소하게 해석한 것이 문제가 됐습니다.
"위 법률규정에서의 항거불능의 상태라 함은 심리적 또는 물리적으로 반항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경우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므로(대법원 2000. 5. 26. 선고 98도3257 판결 참조), 위 법률 제8조의 구성요건에 해당하기 위해서는 피해자가 신체장애 또는 정신상의 장애로 인하여 성적인 자기방어를 할 수 없는 항거불능의 상태에 있었어야 하고, 이러한 요건은 형법 제302조에서 미성년자 또는 심신미약자에 대하여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간음 또는 추행을 한 자의 처벌에 관하여 따로 규정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더욱 엄격하게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대법원 2003도 5322 판결 中)
대법원은 이 사건의 경우 피해자가 가벼운 집안 살림이나 식료품 구입 등을 할 수 있고, 강간 과정에서 저항했던 점 등이 인정된다며 '항거불능'의 상태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조항에서 규정하고 있는 항거불능 상태를 구성하려면 의사표현 능력 자체가 없거나, 강간 과정에서 전혀 저항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거불능'의 기준이 너무 까다로워져 사실상 이 조항으로 장애인을 성폭행한 가해자를 처벌하기가 어려워진 것입니다.
2003년 대법원 판결 이후 우리가 살펴봤던 어이없는 판결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기존 법률로는 처벌이 안 되고, 어쩔 수 없이 적용한 '장애인의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한 간음' 조항으로는 무죄가 나오는 부조리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영화 '도가니'의 소재가 된 광주 인화학교 사건입니다.
검찰은 이 사건에 대해 두 가지 조항에 근거해 가해자인 행정실장 김씨를 기소합니다. 하나는 청소년성보호법의 강제추행이고, 다른 하나는 장애로 인한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한 강제추행이었습니다.
검찰의 첫 번째 주장은 법원이 기각했습니다. '친고죄' 규정 때문이었습니다. 법률이 규정한 고소기간 2년이 이미 지났다고 법원은 판단했습니다.
남은 것은 '항거불능' 조항 하나입니다. 광주지법은 대법원 판결에 근거해 '항거불능' 상태를 협소하게 해석하는 입장을 선택했습니다. "수화로 싫다고 밝히고…몸을 비틀어 거부 의사를 표현"한 피해자는 '항거불능' 상태에 있지 않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에는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법원도 국회도 방관하는 '악법'
대법원은 "법조항이 문리적으로 협소한 해석을 낳을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하급심에서는 좀 더 넓게 해석하는 시도도 있다"고 해명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쓰는 말로 풀이하면, 법 조항이 '항거불능' 상태를 협소하게 해석할 수 밖에 없도록 쓰여져 있다는 뜻입니다.
장애인이 아닌 경우를 포괄하는 형법 299조에서도 '항거불능'이란 개념이 쓰이는데, 장애인 항거불능 조항에 앞서 마련된 이 조항의 '항거불능'에 대해서 이미 의사표현 능력이 없거나 전혀 저항할 수 없는 상태 등으로 협소하게 해석돼 왔기 때문에, 장애인의 경우에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역시 보통 사람들 말로 풀이하면, 다른 법률에 쓰인 '항거불능' 개념을 오랜 기간 협소하게 해석해왔기 때문에, 장애인의 경우에도 협소하게 해석할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법원은 법률 개정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변호사들은 "대법원이 충분히 폭넓게 해석할 수 있는 조항"이라며 법원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공익 변호사 그룹 공감의 염형국 변호사는 법원의 해석 때문에 현실적으로 는 처벌상의 공백이 발생하며(도가니 사건이 대표적 사례) 장애인의 항거불능 상태를 비장애인의 경우와 똑같이 해석하는 것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저항능력 차이를 고려하면 '평등의 원칙'에도 위배된다고 지적합니다.
법률 전문가가 아니라 법적으로 어떤 해석이 올바른지는 저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기존 해석이 상식과 동떨어진 판결을 양산하고 있다면 새로운 해석을 검토해 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법률이 그렇게 쓰여 있어서 그렇게 해석할 수 밖에 없고, 정 문제라면 법률을 개정해야 한다'는 법원의 태도는 무척 안타깝습니다.
법률 개정 추진 작업도 지지부진합니다. '항거불능' 조항의 문제점을 고치기 위해 2005년 박세환 의원 등 25인과 2010년 최영희 의원 등이 개정안을 제출했지만 영화 '도가니' 개봉 이전까지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묻혀 있었습니다. 돈도 표도 되지 않는 사회적 약자, 장애인들에 대한 법안은 역시 국회의원들이 신속히 처리할만한 사안은 아니었나 봅니다. 그나마 영화 '도가니' 개봉 이후 잠깐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매일 굵직한 이슈가 쏟아지는 정치권에서 이 법안을 오래 기억 해줄지 모르겠습니다.
'권선징악'보다 더 필요한 것
'도가니'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습니다. 재판에 참여한 검사, 판사, 변호가가 누구인지 찾아보는 기사가 쏟아졌고. 여론에 밀린 경찰은 인화학교에 대해 '별건수사' 방식(사안과 직접 관련 없는 사건들까지 수사하는 방식)을 동원해 사실상 재수사에 착수했습니다. 인화학교 재단 법인을 취소하는 조치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전국민적인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도 정작 이해할 수 없는 결과를 낳은 구조적 원인들에 대한 관심은 조금 소홀한 듯 싶습니다. 잘못한 사람들 찾아내는 일,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재판에 참여한 판사, 검사의 개인 신상을 터는 열정의 절반만 법과 제도를 바꾸는데 투자해도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악당을 처단하면 영화는 끝납니다. 하지만 우리 삶은 그보다 더 길게 계속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권선징악보다도, 법과 제도의 개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