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기억과 나…이진주 & 원성원, 두 여자의 기억

주말 오전, 한 대형마트에 갔다가 울고 있는 남자아이를 마주쳤습니다. 복잡한 마트에서 부모님을 놓쳤는지 “엄마~ 아빠~”를 부르며 목 놓아 울더군요. 눈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고, 얼굴은 온통 눈물, 콧물 범벅이었습니다. 일단 아이에게 “여기에 있어야만 한다”하고 매장 직원에게 데려가 미아 찾기 방송을 부탁했습니다. 아이에게는 “이 아저씨가 엄마를 찾아줄 거”라고, “울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고 달래고 나오는데, 문득 제가 5살 때 생각이 났습니다.

이모네가 있던 종로에서 동네 꼬마들과 함께 놀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가도 가도 다 똑같은 한옥 집에 둘러싸여 당황한 나머지 울면서 계속 걸어가는데, 한 식당에서 할머니가 달려 나왔습니다. “길을 잃었냐”고, “여기서 더 가면 진짜 엄마를 못 찾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면서 저를 식당 안으로 데려갔습니다. 할머니는 저를 식당 의자에 앉히고는 물과 음식을 주며 눈물을 닦아줬습니다. 잠시 뒤, 울면서 아이를 찾는 엄마가 식당 앞을 지나갔고, 할머니는 엄마를 불러 저의 손을 넘겨줬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일인데도, 그 때 기억은 식당 간판 색깔까지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다섯 살배기 꼬마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저에게는 이런 충격적인 경험과 기억이 ‘길 잃은 아이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습관(?)’으로 발현이 되고 있는데요, 예술가들에게는 이런 ‘사건’과 ‘기억’이 다 작품 소재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31살 젊은 여성작가 이진주 씨의 ‘불완전한 기억의 섬’이라는 작품입니다. 둥둥 떠있는 섬 위에 서로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사물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작가 자신의 기억을 작품 위에 늘어놓은 것입니다. 기억은 단순히 ‘기억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당시의 상황과 감정이 결합되어 ‘기억하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합니다.

그래서 꿈과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꿈을 꾸고 나면, 하나하나가 다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시놉시스 같은 전반적인 꿈의 스토리, 그리고 마치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긴 듯 조각난 일부분만이 떠오르는 것과 비슷하죠. 그래서인지 이 작가의 작품은 꿈을 보는 듯한 느낌도 줍니다.

하지만, 약간은 칙칙하고 우울한 느낌이죠. 작품의 소재가 되는 이 작가의 기억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이 작가는 4살 때 납치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너무 무섭고 끔찍한 기억이라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미대 재학시절 ‘홍대 괴담사건’을 겪는 주변 친구와 동료들을 보며, 그 아팠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잊고 싶지만 잊히지 않는 기억들이 얽히면서 작가의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조각난 기억들이 캔버스 위에 펼쳐져 있다 보니, 그림의 어느 쪽을 들여다보느냐에 따라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위 작품만 하더라도, 그냥 지나치기 쉬운 왼쪽 아래편에는 섬에 간신히 매달린 비닐봉지가 있고, 오른쪽 위에는 왜 저기 있을까 싶은 알록달록한 풍선이 붙어 있습니다. 누구나 한번쯤 꿈 속에서 봤을 법한 장면들인데, 사라지지 않은 기억이 한 작품 위에 뒤엉켜 있는 것이지요.

* 이진주 개인전(~9월 11일, 서울 사간동 16번지)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Evanescing, In-evanescing)>



또 다른 여성작가 원성원 씨의 <1978년 일곱 살>이라는 11개 연작 가운데 <일곱살-오줌싸개의 빨래>라는 작품입니다. 원 작가는 사진을 찍어 포토샵 작업을 통해 하나의 작품으로 구성하고 있습니다.

작품 제목에서도 알 수 있지만, 7살 작가 자신의 기억을 표현하고 있는데요, 7살 어느 날 잠에서 깼는데 엄마가 없어 당황하고 놀랐던 기억을 담고 있습니다. 혹시 내가 이불에 오줌을 싸서 엄마가 집을 나가버린 게 아닐까, 이불을 빨아놓으면 엄마가 돌아오지 않을까, 7살다운 상상을 사진 콜라주로 만들어 냈습니다.

* 안타깝게도 원성원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전시는 지난 주말 끝났습니다. 조만간 또, 원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겠죠. ^^;;

이진주 작가의 작품과 비슷한 듯 하면서도 다른 모습인데요, 이 작가의 작품이 흐릿하면서 우울한 모습을 표현했다면, 원 작가의 작품은 선명하면서도 밝은 이미지입니다. 하지만, 두 작가 모두 뇌리에 박혀 잊을 수 없는 아픈 기억을 작품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과거의 기억이 모여 나의 역사를 만들고 현재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또, 현재 나의 경험과 기억은 쌓여서 미래의 나를 만들겠죠. 두 작가의 작품을 보며,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그것 또한 나의 일부라고, 다시 한 번 나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