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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경제인 '로빈슨 크루소'의 거짓말!

[취재파일] 경제인 '로빈슨 크루소'의 거짓말!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 가운데 하나가 아마 어린 시절 누구나 읽어 봤음직한 '로빈슨 크루소'일 겁니다. 영국 작가 다니얼 디포가 1719년에 탈고 한 이책의 원제는 [요크의 선원 로빈슨 크루소의 생애와 이상하고 놀라운 모험 The Life and Strange Surprising Adventures of Robinson Crusoe of York]이라는 다소 긴 제목이었습니다. 작가가 60세 가까운 나이에 처음 쓴 이 소설은 발표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됐고 3백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스테디셀러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개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영국 요크 태생인 크루소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모험 항해에 나서지만 바다에서 배는 난파되고 구사일생, 홀로 무인도에 표착하게 됩니다. 크루소는 철없던 자신에 대한 하늘의 징벌로 받아들이고 창의와 연구, 그리고 근면과 노력으로 착실한 무인도 생활을 꾸려나갑니다.

우선 배에서 식량 ·의류 ·무기, 그리고 개 ·고양이를 옮겨와 오두막집을 짓고 보금자리를 마련합니다. 염소를 길러 고기와 양젖을 얻고 곡식을 재배하는 한편 배를 만들어 탈출을 꾀하지만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무인도에 상륙한 식인종의 포로 '프라이데이'를 구출하여 충실한 하인으로 삼고, 마침내 무인도에 기착한 영국의 반란선을 진압하여 선장을 구출해 28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다는 스토리입니다.

워낙 흥미로운 모험 소설인지라 지금까지도 사랑을 받고 있는데, 톰 행크스 주연의 헐리우드 영화 '케스트 어웨이'나 김윤진씨가 호연을 펼쳤던 TV 드라마 '로스트'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로비슨 크루소의 본 고장(?)인 영국에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가 등장해 유명세를 탔습니다. 주인공은 올해 63살의 이혼남 데이비드 버기스씨인데요. 이 괴짜 아저씨는 영국 북부 엑스무어 국립공원 외진 해안가 오두막집에서 26년간 혼자 생활했다고 주장해왔습니다.

버기스씨는 톰 행크스의 실제 인물인 것처럼 포장되면서 국제적으로 유명세를 탔는데요.  카메라 앞에서 그는 폐목과 덩쿨 등 온갖 잡동사니로 만든 오두막에서 매트리스 대신 마른 낙엽을 깔고 모닥불로 식사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의 오두막이 부지 소유주인 엑스무어 국립공원 측의 요구로 퇴거 위기에 몰렸을 때에는 네티즌들이 퇴거를 철회하라며 반대운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버기스씨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은밀히 도시에 있는 노모의 집에서 안락한 시간을 보내온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러다가도 언론의 취재 요청이 오면 서둘러 오두막으로 돌아가 다시 '로빈슨 크루소'로 변신하는 생활을 반복해왔습니다.

이 사실을 폭로한 영국의 대중잡지 '더 선'은 버기스가 두 달전 사망한 노모의 집을 상속받기로 했는데, 테라스가 딸린 이 집의 가격은 14만 5천 파운드, 우리 돈으로 2억5천만원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렇게 거짓말이 백일하에 드러났는데도 버기스는 여전히 자신은 무소유 자연인이라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야생에서 먹을 거리를 구하지 못하지만 시내에서 사다 놓은 통조림 음식을 모닥불에 덥혀 먹고 다른 직업도 갖지 않고 오직 누드 모델을 하면서 마련한 생활비로 만 살아오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참으로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버기스가 그동안 언론 인터뷰나 특집 프로그램 에 출연하면서 사례비로 받은 돈도 상당할 것으로 추정되는데 (물론 비공개라고 합니다.), 여기에 물려 받은 유산과 '방송인'과 '누드 모델'이라는 투잡족으로 벌어 온 돈까지 합치면 왠만한 중산층 이상의 자산을 모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신이 주장해 온 자연인은 커녕, 생활인을 넘어 어찌보면 버거스야말로 경제적인 감각이 남다른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전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데요.

재미있는 건 많은 경제학자들이 원작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주인공인 로빈슨 크루소의 '경제적인 삶'에 주목해왔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크루소가 정착했던 무인도는 영국의 보호무역론자들이 옹호해 온 폐쇄 교환 경제의 단순 모델이자 개인의 배타적 소유권의 시작인 'Enclosure'의 원형으로 자주 인용돼 왔으며 생존을 위해 치열한 고심 끝에 항상 최선의 판단을 내리는 크루소는 경제학의 기본 가정인 '합리적인 인간, 합리적인 소비'의 상징이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크루소가 이곳에 정착한 뒤 농작물을 다 소비하지 않고 창고에 축적해 놓은 것은 자본주의 이론에서 말하는 잉여자본 개념을  뜻하며, 배에서 옮겨 온 탄약을 한꺼번에 모아 두지 않고 이곳 저곳에 분산해 두고 만일에 대비한 것은 요즘 말하는 '보험'의 시초로 여겨졌습니다.     

소설이 쓰여졌던 당시 자본주의 팽창 과정에서 신대륙 개척과 노예 무역에 나섰던 유럽의 시대적인 상황까지 고려해 본다면 식인종 '프라이데이'를 교화시켜 하인으로 삼았던 로빈슨 크루소는  자본주의적 인간형을 대표하고 있음이 더욱 분명해지는데요.

물질적 부의 축적을 믿으면서 근면과 절약을 그 행동 규범으로 삼고 합리성이라는 이성의 자로 사물을 잴 줄 아는 '자수성가형 자본가'가 바로 로빈슨 크루소인 셈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의 데이비드 버기스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조금은 누그러지고 여유로워질 수도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만 자본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의 기본 바탕에는 '효율'과 '이윤' 만큼이나 '신뢰'와 '정직'이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한다면 버기스의 거짓말은 죄악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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