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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자살용품(Suicide Kit)'파는 괴짜 할머니!

[취재파일] '자살용품(Suicide Kit)'파는 괴짜 할머니!

잇따른 유명인들의 자살로 요즘 우리 사회 분위기가 참 뒤숭숭합니다. 고인들과 유족들에게 누가 될까 두려워 구체적인 사례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만 자살은 유명인들에게만 국한되거나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베르테르 신드롬을 우려하는 건 한국이 이미 심각한 '자살 사회'에 들어서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에서 일 겁니다.

2009년 한국의 자살사망률은 10만 명당 28.4명으로,  2위 헝가리(19.6명)보다 절반 가량 높고, OECD 평균(11.4명)에는 3배나 되는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살은 이미 10대에서 30대까지 사망 원인의 1위이며,  40대와 50대 사망 원인 중에도  2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65세 이상 노년층의 자살도 급격하게 늘어 2008년 기준으로 노인자살률은 10만 명당 77명으로 일본의 29명에 비해 2배가 넘습니다.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도 '패자부활전 부재'로 상징되는 살 떨리고 피 말리는 경쟁과 사회안전망의 미비, 가치교육의 부재 등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까요? 이런 가운데 미국발 외신에 눈에 띄는 기사가 떴습니다.

      



자살 용품(Suicide Kit, 혹은 Exit Kit)를 파는 할머니 얘기입니다. 미국에서도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꼽히는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 사는 '샬럿'이란 이름의 할머니는 올해 아흔 한 살로 나이를 읽기 어려울 정도로 정정합니다. 전직 과학 교사인 샬럿은 벌써 3년째 전화나 우편을 통해 주문해오는 사람들에게 한 세트에 60달러를 받고 자살 용품을 팔고 있습니다.

샬럿은 아예 GLDD그룹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가게까지 열었는데 GLDD의 뜻을 풀자면, "Glorious Life and Dignified Death", 즉 "즐겁고 영예로운 삶, 그리고 품위있는 죽음"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녀가 팔고 있는 자살 용품이라는 게 참 간단합니다. 목부터 머리를 덮는 비닐 후드와 헬륨 같은 불활성 질식 가스가 담긴 탱크를 연결하는 튜브로 이뤄진 장치입니다. 메뉴얼 대로 사용하면 되고 가스 주입은 의뢰인 본인의 몫입니다.

샬럿은 지난 1977년 남편을 암으로 잃은 뒤로 줄곧 불치의 말기 환자들의 편안한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고심 끝에 자신이 직접 삶의 마지막 단계에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살 용품을 개발해 판매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녀는 주문을 받으면 성실히 물건을 배송할 뿐 의뢰인들에게 어떤 질문도 하지 않습니다. 의뢰인들이 물건을 실제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도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들의 품위있는 죽음을 기원할 뿐입니다.

샬럿을 저승사자라고 부르며 "지옥에나 가"라고 욕을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소생 가능성도 상황에서 의지할 가족도 없이 홀로 죽음을 맞아야 하는 외로운 이들에게 자신은 저승사자가 아니라 오히려 하늘이 보낸 천사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그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도 필요한 순간이 오면 자기가 만든 제품 가운데 1개를 사용할 계획이라고 말해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였다면 자살 방조 등의 혐의로 벌써 처벌을 받았겠지만, 샬럿은 최근까지 이 사업을 아무런 제재없이 해 올 수 있었습니다. 샬럿이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주는 워싱턴주와 함께 미국에서 안락사가 허용되고 있는 예외적인 곳이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자살용품을 구매했던 29살의 젊은이가 이 용품을 이용해 헬륨 가스를 마시고 자살했고, 이 남자의 거주지인 오리건주 의회가 자살용품을 오리건 주민들에게 판매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법규를 만들겠다고 나섰습니다.

급기야 며칠 전에는 FBI 소속 수사 요원들이 이른 아침 집에 들이닥쳐 무려 10시간 동안 집안 구석구석을 뒤진 뒤 20여개의 자살용품을 증거품이라며 수거해 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샬럿은 FBI 특수요원들이 무고한 자신에게 피해를 입었다며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녀는 압수 수색 영장도 제대로 제시받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FBI 캘리포니아 지부는 검찰의 명령을 받고 움직였으며 자신들은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범죄자를 잡을 뿐이라고 맞서고 있습니다.

현재 FBI는 미 전역에 걸쳐 자살의 권리와 안락사를 지지하는 네트워크에 소속된 회원 3천여 명에 대해서도 조사를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이번 일이 미국내 해묵은 '안락사 합법화' 논쟁을 재점화시킬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2009년과 2010년 이른바 '김 할머니 CASE'를 통해 존엄사, 안락사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법적인 판단을 넘어 가치 판단 역시 쉽지 않은 문제인 만큼 논란이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섬뜩하기도 하고 또한 괴상망측하기도 한 이 기사를 읽는 동안, "인간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을 권리가 있을까?", 더 나아가 "품위있는 죽음을 위해 타인이 도움을 준다면 법률적, 도덕적으로 정당할 수 있을까?" 같은 난해한 질문들이 제 머리 속을 혼란스럽게 하더군요.

          



다행히도 금새 'Exit'이 나타났습니다.  몇 년 전 서점 한 구석에 잠시 나타났다가 금새 사라졌던 '자살가게' 라는 기이한 제목의 책이 떠올랐습니다. 장 퇼레라는 프랑스 작가가 쓴 책인데  인간의 자살 욕구를 상품화해서 가문 대대로 자살용품을 팔아 온 상점을 무대로 한 장편소설입니다. 물론 다양한 자살 도구와 방법들이 소개되기는 하지만, 제목에서 추측하듯 세기말적이고 엽기적인 내용이라기 보다는 유쾌하고 번뜩이는 상상력이 돋보이는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컬트영화 같은 작품입니다.

자살 테마파크를 꿈꾸는 이 가족은  칼과 총의 전문가인 미시마 튀바슈, 독극물 전문가인 아내 뤼크레스, 그리고 그 사이에 한시라도 붕대를 감지 않으면 머리가 터질 거라고 굳게 믿는 식욕부진증 환자인 맏아들 뱅상(반 고흐)과 죽음의 키스를 파는 딸 마릴린이 있습니다. 모두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에게서 그 이름을 따왔습니다.

뒤늦게 막내가 태어나는데 이름은 알랑, '앨런 튜링'이라는 영국의 천재 수학자에게서 따왔습니다. 튜링은 컴퓨터의 시초로 불리며 청산가리를 주사로 주입한 사과를 베어물고 자살했습니다. 바로 아이패드와 아이폰의 신화를 써내려가고 있는 애플사 로고의 기원이죠. 섹스를 통해 감염되어 자살하고 싶은 사람에게 파는 물건인 콘돔 때문에 세상에 나온 아이였습니다. 부모들이 구멍이 나 있는 줄 모르고 콘돔을 시험했다가  원치않는 사고(?)를 친 셈이죠.

아무튼 이 녀석은 태어날 때부터  세상의 밝은 면만 보고 매사에 낙천적인 성격이라 자살 가족을 크게 낙심시키지만, 차츰 행복 바이러스를 전염시키며 결국엔 자살 가게를 행복 가게로 탈바꿈 시킨다는 줄거리입니다.

       



일상에 대한 무한한 감사와 타인에 대한 애정을 통해 주어진 삶을 기꺼이 받아들일 용기를 갖는다면 세상에서 도망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안타까운 일들은 줄어 들겠죠!

저 멀리 캘리포니아에 계시는 샬럿 할머니도 시간 내서 이 책 한 번 읽어보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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