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적북적] 세상 모든 엄마들의 역사…'내 어머니 이야기'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작성 2019.05.12 07:23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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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189 : 세상 모든 엄마들의 역사…'내 어머니 이야기'

"일본군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억지 결혼을 하고, 전쟁으로 부모와 생이별한 고통스러운 역사 속에 살았지만... 결혼한 지 닷새 만에 해방이 되어 남편이 군대에 끌려나가지 않게 됐다는 이유로, 해방된 게 너무도 싫었다는 엄마의 얘기도 '역사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객관적인 역사와 엄마가 체험한 역사는 달랐지만, 주관적 체험이 지닌 신선함이 있었다."

며칠 전 어버이날이었죠. 저도 오랜만에 부모님 모시고 점심을 함께 먹었습니다. 연중에 한두 번이라도 부모님을 더 떠올리게 되는 어버이날, 특히 엄마 생각을 좀 했습니다. 50여 년 전 엄마도 꽃다운 처녀였고 청춘이었으며 지금 제 나이보다 어릴 때 이미 아침부터 밤까지 자녀 2명을 건사하기 위해 생활전선에서 분투했다는 걸 돌아보면 새삼 경이롭고 애틋합니다. 우리네 엄마들은 다들 저마다의 서사, 역사를 갖고 있죠.

오늘 읽는 책은, 격동의 한국사 100년을 온몸으로 겪어낸 한 엄마의 생애사를 담은 책입니다. '북적북적' 사상 처음으로 도전하는 만화책, 김은성 작가의 <내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작가의 어머니인 1927년생 이 복동녀씨입니다. 함경남도 북청 출신인데, 흥남 철수 때 남으로 피난 오면서 가족과 헤어져 이산가족, 실향민이 됐고 충청남도 논산에 정착해 살다가 서울로 와 살고 있습니다. 먼저 사망한 장남을 포함해 6남매를 슬하에 뒀는데 김 작가는 그중 막내딸로 논산에서 태어났습니다. 북한에서 20여 년 살고 넘어와 남한에서 60여 년 살고 있지만 복동녀씨는 아직 진한 함경도 사투리로 말하고 그때 어렵고 힘들지만 엄마, 아빠, 오라비, 언니와 정답게 살았던 추억이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선연합니다.

1권은 복동녀씨의 엄마, 작가에겐 외할머니죠, 이초샘씨가 처음 시집오는 1908년부터 시작합니다. 그렇게 시작해 4권까지 오면 2013년. 무려 100년 넘는 기간의 개인사이자 가족사, 생애사가 펼쳐집니다.

"아들 하나에 딸 넷, 시아버지, 시누이들, 남편, 여인네까지 열 식구가 되었다. 여인네는 열 식구 뒷바라지에 죽은 조상들까지 수발하며 살았다... 몇 달을 젖으로 연명하던 시아버지는 어느 날 잠시 눈을 뜨고는, '내가 착한 널 못살게 군 것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라' 그 말씀을 마지막으로 돌아가셨다. 젖을 빨던 시아버지는 나의 외증조부였고, 그 시아버지의 며느리는 나의 외할머니였고, 젖을 나눠 먹은 여섯째 아이는 내 엄마였다."

책의 첫머리에는 복동녀씨 집안 가계도가 실려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있고 복동녀씨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오고 6녀 1남 7남매가 열거돼 있습니다. 함경도 사투리... 는 처음엔 언어의 장벽이 높다 여겼습니다. 시이(언니), 노래이 아바이(노랑이 할아버지), 어피덩(빨리), 임이(어미)... 그래서 장 넘기기가 처음엔 수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입으로 중얼거려 보면 '아, 이런 뜻이겠네' 싶고 실제로 대개 짐작했던 대로의 뜻입니다. 만화 그림체도 독특합니다. 마치 판화로 찍어낸 듯한 느낌이랄까요. 인물의 이목구비도 엉성한 듯 때로는 막 그린 듯 투박하게 보이는데 그게 또 묘하게 잘 어울리고 정감갑니다.

이 만화는 일종의 액자식 구성을 띠고 있습니다. 작가와 엄마 복동녀씨가 현재 시점에서 대화를 하다 과거로 넘나드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2000년대 중후반과 2010년대 초반, 그리고 1900년대를 오가는데 신기할 정도로 세밀하게 복동녀씨, 어머니는 기억하고 구술해냅니다. 60년 전 떠나온 고향 풍경까지도요.

"큰길을 가운데 두고 옥점네 쪽은 서쪽 마을이라 하고, 외갓집 쪽은 동쪽 마을이라 했다. 서쪽 마을의 끝집은 엄마를 중신한 거산 큰어머니 집이고, 동쪽 마을의 끝에는 서당이 있었다.... 개울에서 더 서쪽으로 가면 개울이 하나 더 나오는데, 이 개울의 어딘가에 뜨듯한 물이 나오는 샘이 있어, 여기서 하는 빨래는 여간 쉬운 게 아니었다."

"옛날이는 애들도 노지를 않아! 두 언니는 엄마 대신 음식도 만들고, 우리는 빨래도 하러 가고 물 질으러 가고 애기도 보고, 우리 또래 남자아들 있는 집들은 갸들이 지게 지고... 그때는 할머이, 할아버지는 할 만했지! 노인네들은 담배만 뻐끔거리며 놀고, 먹을 음식을 해도 제일 좋은 디로 갖다드리고."


1945년, 19살인 복동녀씨가 얼결에 결혼하고 얼떨결에 해방을 맞이하게 되는 조금은 황당한 듯하지만 사실은 더 보편적이었을 것 같은 이야기를 거쳐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중공군의 참전으로 남한으로 피난 가는 대목으로 이어집니다. '봉이나무 아래에서는'이라는 제목의 장에서는 고향 마을을 떠나면서 봉이나무 아래서 배웅하는 엄마를 마지막으로 본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는 구술도 있습니다.

"해방이 됐슴! 해방이 됐슴!... 신랑이 군인이나 가서 죽었으면 했는데, 가심이 철렁하더라구... 나는 해방이고 뭐이구 좋은 줄도 몰랐어."
"해방돼서 온 나라가 들썩한 줄 알았더니 엄마 같은 사람도 있었네."
"엄마! 엄마 아버지도 같이 나가기요. 집은 도화선이 언니너 살라구 하구. 엄마, 언니랑 내가 여기로 올 테이 피란 가는 줄 알아요." 그 말하면서 보이까 엄마 입술이 파래.
"엄마, 엄마! 입술이 왜 파래?"
"일없다이, 일없다이. 그양 놔두면 된다이."
그러구 오는데 엄마가 봉이나무 아래서 우리를 배웅했어. 그기 마지막이야. 거기 서서 손을 흔들던 기 안 잊어져.


남한에 온 뒤 거제수용소 생활을 거쳐 충남 논산에 정착하고 거기서 김은성 작가가 태어납니다. 이후 70년대 서울로... 가족사는 이어지고 막내딸 은성 작가의 이야기와 맞물려서 현재로 이어집니다. <내 어머니 이야기>는 이복동녀씨가 온몸으로 겪어낸 한국 근현대사의 장면들, 특히 우리가 해방 이후 70년 넘게 거의 가보지도 못하는 북한의 풍경들을 포함해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2013년까지 8년 연재를 하고 2014년 네 권으로 출간됐던 이 책은 이후 절판됐다가 지난해 말 김영하 작가의 추천이 화제가 되면서 올해 초 복간이 이뤄졌습니다. 저도 덕분에 읽었습니다.

작가는 왜 이 만화를 그리게 됐을까요. 나이 마흔에 처음 만화를 시작했다는 김은성 작가는 문득 엄마의 과거가 궁금해 물어봤는데 술술 풀려나오는 엄마의 이야기에 이걸 그려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4권 말미 작가의 말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엄마의 팔십팔 년 인생을 그리는 데 내 인생 팔 년이 걸리다 보니 어떨 땐 좀 손해 보는 느낌도 있었는데, 곰곰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앞으로도 내 인생을 잘 정리할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여러 번 읽으면서 지난주 뵈었던 엄마 생각을 저도 많이 했습니다. 엄마 말씀을 잔소리로 귀찮아하고 말로는 애틋하다 죄송하다 하면서 엄마와 정답게 이야기 나눠본 게 언제인지 아득하네요. 내 어머니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할 텐데요.

(* 출판사 애니북스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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