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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166 : '일촉즉발 사회'의 생존 매뉴얼 - '당신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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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조평판'의 다른 말은 '바른말'이다. 바른말은 의외로 폭력적이다. 나는 욕설에 찔려 넘어진 사람보다 바른말에 찔려 쓰러진 사람을 과장해서 한 만 배쯤은 더 많이 봤다. 사실이다."

당신의 소중한 마음을 무시하고 있지 않으신가요? 마음을 무시하고, 견디는 것이 잘 사는 길, 살아남는 길이라고 되뇌이며 애써 고통을 삼키면서 외면하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오늘 읽는 책 '당신이 옳다'는 지난 15년 동안 심리적인 외상들이 아우성친 현장들에 참여해 온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가 건네는 이야기입니다. 정 박사는 세월호 참사 피해자,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여러 종류의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심리 치유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도와왔고, 무수한 트라우마가 무수한 사람들을 덮치는 것과 그들의 인생이 '진정한 공감'을 만나며 변화하는 모습을 봐 왔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내면서 '심리적 CPR'이란 용어를 제시합니다. 마음에 하는 심폐소생술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태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그리고 그런 치유가 필요하다는 사실과 자기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인식하는 게 얼마나 긴요한 일인지 힘주어 전달합니다.

연말연시에 '올해의 한국 사회를 한 마디로 응축한 사자성어' 같은 걸 뽑곤 하죠. 저는 '일촉즉발'이 한번쯤 채택될 만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조금만 자극해도 바로 폭발해 버릴 수 있을 것처럼, 다들 늘 조금씩 신경이 곤두서 있는 사회. 이같은 한국 사회에 적확한 '심리적 CPR'은 사실, 정말로 긴급한 조치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 무시하다 큰코 다친다'는 생각을 새삼 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생존 매뉴얼'이라는 것을, 읽어가다 보면 조금씩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세월호 특별법 서명을 받던 곳에서 일군의 노인들이 서명대 집기를 부수고 유가족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일이 있었다. 그 고통스러운 소동이 끝난 후 행패를 부리던 노인 중 한 명과 얘기를 나누게 됐다. 나는 그 소란에 대해서 묻지 않고 "고향이 어디세요?" 물었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오래전 세상을 떠난 아내와 살았던 시절로 갔다가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아들과 며느리 이야기로 옮겨왔다. 거리에 버려진 부서진 장롱 같은 그의 삶을 듣다가 눈물이 차오르기도 했다.

한참 만에 노인이 불쑥 말했다. "내가 아까 그 아이 엄마(세월호 유가족)들한테 욕한 건 좀 부끄럽지." "그런 마음이셨군요. 그러셨군요." 나는 그렇게만 말했다. 사과를 받고자 시작한 얘기가 아니었지만 노인은 사과를 했다. 사과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진 않았지만 노인의 마음속에 미안함이 조금씩 고이고 있다는 걸 대화 중에도 느낄 수 있었다. 소동에 관한 얘기 그 자체만으로는 소동에 관한 진짜 얘기를 할 수 없다. 싸우려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방금 저 자신이 벌였던 소란과 소동을 성찰하기 위해서 노인에게는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다. 다른 이야기란 바로 '나' 이야기, 자기 존재에 대한 이야기다. 자기 존재가 집중받고 주목받은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을 확보한다. 그 안정감 속에서야 비로소 사람은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하다. 노인이 보였던 뜻밖의 합리성도 사실은 자기 존재가 주목받은 후에 생긴 내면의 안정감에서 나온 것이다."


저는 사실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좀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읽는 것 자체로, 계속 자신을 스스로에게 들키는 그 '오랜만의' 기분이 꽤 낯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낯선 기분 자체가 제게 힘을 줬습니다. 편안하지 않으나 충만해지는 기분이 참 기묘하고, 좋았습니다.

정혜신 박사는 이 책에서 '진정한 공감'만이 마음의 상처들을 치유할 수 있으며, 그 치유로 우리가 참된 삶과 관계와 평형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간곡히 전달합니다. 그 '진정한 공감'의 여러 가지 면모에 대해서 참으로 귀기울여 들어볼 만한 귀한 얘기들을 함께 전달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한 가지 팁이 공감을 가장한 '충조평판'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충조평판'은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의 줄임말입니다.

"그런 생각은 잊어. 너한테 좋을 게 하나도 없어" - 충조
"그럴수록 네가 더 열심히 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지." - 충조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어봐." - 충조
"그건 너를 너무 사랑해서 한 말일 거야." - 평판
"네가 너무 예민해서 그런 거 아니니?" - 평판
"남자는 다 거기서 거기야. 별다른 사람 있는 줄 아니." - 충조평판


속된 말로, 찔렸습니다.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충조평판'으로 점철된 대화를 구사해 왔다는 걸 새삼 느꼈거든요. 소위 말하는 '해결책을 찾는 대화법'이 사실은 '당신이 그 정도의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감당하기 어려우니 빨리 답을 내고 도망가고 싶다'는 마음에서 기인한 행동이라는 걸 인정하고 나니, 그 사실이 불편했으나 뭔가 에너지가 차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실은, 그렇게 도망간다고 덜 괴로워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나 자신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충조평판'을 당하면서 그걸 그냥 부인하고 버텨온 시간들이 많았다는 것, 인정하기 싫었던 그런 순간들이 또 책장마다 떠오르니까 그것 또한 참 불편하고 책장 너머로 정 박사에게 들키는 것 같고… 그런데 이 책이 그런 내 마음을 알아주고 있는 것 같아서 또 기묘한 힘이 차오르더라고요.

이 책에는 어떤 상황, 어떤 껍데기에서 시작하든 결국 존재에 접근하여 본질을 찾아내는 공감의 과정이 차근차근 담겨 있습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직접 읽으며 그 과정에 동참해 보시면 제가 그랬던 것처럼, 묘한 그 에너지를 얻어가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역사에 관심 많은 40대 변호사가 있다. 개인적인 모임에서는 물론이고 SNS에서도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러다 격렬한 논쟁으로 번지기도 한다. 지인들이 모인 가벼운 자리에서 그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뜨거운 감자를 꺼냈다. 모임에서 몇 차례 했던 얘기를 또 꺼내니 사람들이 난감해했다. 와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는 사람과 밥을 먹다 와인에 대한 장광설을 들어본 적이 있는 이의 얼굴들이다. 듣다가 내가 물었다.

나 : 나는 역사에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역사에 각별한 관심이 있는 당신은 궁금해요 역사의 어떤 점이 그렇게 끌리나요?

그 : 자기 뿌리를 알아야 하지 않나요. 역사라는 건 지금의 나와 다 연결되어 있잖아요. 역사는 내 조상, 나의 생활에도 다 직결돼 있거든요. 우리 할아버지만 해도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신 분이고 우리 아버지는 군인으로 한국 전쟁도 겪고 월남전에도 참전한 분이고…

나 : 아버지가 군인이셨군요. 몰랐네.

그 : 내가 어릴 때 월남에 가셔서 아버지 얼굴을 본 기억이 거의 없이 살았어요. 엄마는 천상 소녀 같은 분이시라 어려도 내가 늘 보살펴야 했고, 형이 셋이나 있지만 다 대도시에 나가 학교를 다닌다고 중학교부터 집을 떠났고요. 나 혼자 엄마를 모시고 살았어요. 치매로 돌아가신 아버지도 끝까지 나 혼자 모셨어요.

나 : (그거 처음에 말한 '뿌리'라는 게 그에겐 의미가 있겠구나 싶어서) 흠. 뿌리가 없는 사람처럼 혼자서?

그 : 네, 기댈 곳이 아무 데도 없었어요. 이론에라도 기대려고 대학 때는 마르크시즘에도 심취했었는데 거기도 아니더라고요.

나 : 흠. 그랬구나. 뿌리를 내린다는 건 어떤 느낌이에요?

그 : 기댈 수 있고, 쉴 수 있고, 편안할 것도 같고. (눈물이 핑)

나 : (먹먹하게 들으며) 그렇구나… 그랬구나.

그 : (침묵하다 천천히 눈물을 닦으며) 내가 왜 자꾸 역사에 빠지는지 처음으로 생각하게 됐어요. 역사는 중요한 거니까 당연히 관심을 갖고 살아야지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네요. 기댈 만한 튼튼한 기둥 같은 필요했나 봐요. 내가 너무 외롭게 산 것 같아요. 그런데 앞으론 논쟁 같은 거 하지 않아야겠어요.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요. (웃음)

옆에서 그의 말을 듣던 이들도 함께 웃었다. 그날 그의 속마음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지루한 그의 역사 예기를 또 들어야 했을 테고 다른 이들에게 그는 아는 척을 많이 하는 꼰대남이 됐을 것이다. 우리도 다행이었지만 그 모임에서 그는 결과적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다. 나는 그게 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론 역사 얘기하는 걸 조심해야겠다는 그의 LTE급 현실 감각도 인상적이었다."


공감은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으로 확대되고, 그 발견이 그 과정을 함께 한 사람들에게도 신선한 기회를 줍니다. 그리고 그 기회들이 우리의 공동체를 진정으로 변화시킵니다. 그 변화가 참으로, 참으로 긴요한 때가 아닌가… 그같은 변화 없이 우리 사회가 더이상 나아갈 수 없는 어떤 모퉁이에 와 있지 않나… 이 생존매뉴얼을 정말이지 다함께 읽어야 하지 않을까 절실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 마음을 무시하지 말아요. 나 자신의 마음도 타인의 마음도 모두 진정한 주목을 필요로 합니다. 당신의 감정은 무조건 옳습니다. 당신이 옳습니다. 괜찮습니다.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꼭, 당신이 옳다, 는 이 책의 손길이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냥 "당신이 옳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말하는 마음도 뭔가 가벼워져요. 있는 줄도 몰랐던 무게가 덜어지는 느낌입니다. "당신이 옳다"라고 한 번 소리내서 발음해 보세요. 어떠신가요.

*출판사 '해냄'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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