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선, 그리고 지정제 건축선
건축선 말고도 '지정제 건축선'이란 개념이 별개로 존재합니다. 지정제 건축선은 오늘날의 건축선과 같은 쓰임새이긴 하지만, 독립적으로 존재합니다. 역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정제 건축선의 시작은 일제 강점기 때입니다.
▶ 일제강점기 '지정제 건축선'이 아직도… (9월 14일, SBS8뉴스)
90년 전 일제 잔재, 법적 효력은 여전
지정제 건축선은 약 9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법적 효력이 남아 있습니다. 건축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국 전쟁 등 격변기를 거쳐 지난 1962년에 제정됐습니다. 당시 건축법 부칙에는 일제 강점기 만들어진 지정제 건축선을 현행법과 저촉되지 않는 한 승계한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지정제 건축선은 토지별 토지이용계획 등 정보를 제공하는 '토지이음' 사이트에서도 조회할 수 있습니다.
왜 이곳에 지정제 건축선이? 근거는?
지정제 건축선은 서울의 구도심인 용산구, 서대문구 등 일대에 주로 남아있습니다. 국토교통부가 이 지정제 건축선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 알아봤습니다. 국민의힘 김학용 의원실의 윤오영 보좌관으로부터 도움을 받았습니다. 국토부는 지정제 건축선 현황을 따로 파악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김학용 의원실의 질의 이후 현황을 취합하고 있다고만 답했는데, 사실상 체계적으로 관리해 오고 있지 않았던 셈입니다. '토지이음' 사이트를 통해서 그때마다 확인해봐야 합니다.
▶ '토지이음' 사이트 (바로가기)
지정제 건축선 폐지,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라?
물론 지정제 건축선을 폐지할 수 있습니다. 지자체 건축심의위원회의 허락을 받으면 됩니다. 문제는 건축심의원회 허락을 받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과거 전례를 살펴보면, 심의위원회는 없애고자 하는 지정제 건축선 주변 소유주들의 허락을 받아오라고 지시합니다. 서울 서대문구에서는 실제로 주변 당사자 동의를 받은 뒤 폐지한 사례가 있습니다. A 씨 역시 용산구청으로부터 해당 지정제 건축선 이해관계자들로부터 동의를 받아오라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A 씨 같은 경우 해당 지정제 건축선과 맞닿거나 관통하는 필지 소유주는 10명으로 추정됐습니다. 이들 10명으로부터 허락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들 10명의 개인 연락처를 수소문하고, 찾아다니는 것도 온전히 A 씨의 몫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해당 지정제 건축선은 용산구청과 국토부가 소유한 땅도 관통합니다. A 씨는 이해관계자 허락을 받으라고 지시한 용산구청에게도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결국 A 씨는 일일이 동의를 받는 게 쉽지 않다 보니 건축을 잠정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A 씨 측은 일제 강점기 시절 만들어진 지정제 건축선의 수명이 다 했다면 국가가 나서서 없애야지, 왜 개인에게 수고를 전가하느냐는 입장입니다.
지자체도 나름 입장이 있습니다. 지정제 건축선이 여전히 법적 효력이 남아 있고, 건축법상 벌칙조항까지 있기 때문입니다. 지자체가 개인이 건축법을 위반해 건물을 짓게 관망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용산구청도 A 씨가 동의만 받아온다면, 해당 구역 지정제 건축선 폐지에 협조하겠다고 합니다. 지정제 건축선을 찬성하는 기관은 없는 셈입니다. 90년 전 조선총독부가 만든 지정제 건축선이 오늘날 누구를 위해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정제 건축선, 전면 폐지하려면?
법 개정을 해야 한다면 지정제 건축선의 기반이 되는 건축법을 고쳐야 합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국회 국토교통위원인 김학용 의원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방안이 고려되고 있는데, 건축법상 지정제 건축선을 승계한다는 부칙을 손보는 방안 등이 고려되고 있습니다. 지정제 건축선을 취재하면서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법이라는 소리는 무수히 들었지만, 필요하다고 하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명분도 실익도 없는 지정제 건축선, 그대로 남겨둔 채 100년을 넘기는 게 합리적인지 사회적 논의가 시작돼야 할 걸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