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이순신'이 있었다…'무의공 이순신(李純信)'에 대하여

출고 : 2017.06.25 22:02 | 수정 : 2017.07.17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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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이순신'이 있었다…'무의공 이순신(李純信)'에 대하여

그 바다엔 두명의 이순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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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순신이 산 왜놈들을 격파했다!” <선조실록> 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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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전쟁의 끝을 알린 노량해전 승전보고.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은 적의 총탄에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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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쓰러진 이순신에 이어 끝까지 조선 수군을 지휘했던 또 다른 이순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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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 : 이순신(李舜臣) 부하 : 이순신(李純信) 바로 이순신 장군 휘하에 동명이인의 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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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시작되기 3달 전, 조선 수군이 주둔했던 전라좌수영에서 두 이순신은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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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부대에 있던 두 이순신은 이름의 혼동을 피하고자 부하 이순신을 ‘방답첨사 이순신’, 줄여서 이 첨사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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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 해전 적선 50여 척, 합포 해전 적선 5척 : 고성 해전 적선 13척, 사천 해전 적선 12척 격파 이 첨사는 눈부신 활약을 보여줬고 이순신 장군은 이름이 같은 그를 신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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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과 방립첨사는 임진왜란 내내 함께 활 쏘고 술 마시고, 밥 먹고, 이야기하다, 함께 승경놀이도 했다.’ <난중일기> 두 이순신은 전투가 없는 평소에도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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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이 갖은 모함으로 관직과 군사를 잃었을 때도 이 첨사는 그의 곁을 지켰다. ‘충무공이 백의종군하게 되자, 제일 먼저 술을 들고 찾아와 밤새 위로하였다.’ < 난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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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끝내고 삼도수군통제사로 돌아오자 그들은 의지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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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598년, 그들은 노량 앞바다로 출전했다. 두 이순신이 함께했던 마지막 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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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싸움이 한창이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 <난중일기>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전사했다. 하지만 이 첨사는 장군의 뜻을 이어 맹렬한 공격을 쉬지 않았다. 그리고 끝내 조선이 승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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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이 첨사는 ‘무의공’이라 불리며 충무공의 후임 통제사로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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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축함, 충무공 이순신함’ ‘잠수함, 무의공 이순신함’ 40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 해군은 두 명의 이순신을 기리며 바다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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