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여관 닥터 김점동

출고 : 2017.04.13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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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여관 닥터 김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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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gratulations, Park” 1900년 6월, 미국 볼티모어 여자 의과대학 졸업식에 조선인 여성이 한 명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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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름은 김점동, 미국 이름은 남편 성을 따라 박에스더였습니다.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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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한국에서 선교사들이 세운 이화학당의 4번째 입학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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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화학당 부설 병원인 ‘보구여관’에서 통역 일을 했습니다. 보구여관은 서양인 선교사 스크랜튼이 설립했고 당시 유일한 여성 전문 병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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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 여성들은 아무리 아파도 남성 의사에게 환부를 쉽게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서양인 여의사가 수술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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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의사가 되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의학을 공부할 곳조차 없었습니다. 또, 당시 사회는 전문직 여성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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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그저 결혼을 하고 남편을 위해 집안일을 해야 했습니다. 의사가 되려던 그녀 앞에 ‘결혼’이라는 큰 벽이 막아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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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음식과 바느질을 하는 여자보다 하느님을 섬기며 일을 하는 여자가 좋습니다.” 그때 박유산이라는 남자가 그녀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녀의 의학 공부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던 선교사들이 두 사람을 이어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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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의학 공부를 위해 남편과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당시 16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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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생활은 너무나 혹독했습니다. 폐렴으로 딸을 잃었습니다. 막노동을 하며 그녀의 공부를 지원한 남편마저도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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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공부를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지금 포기한다면 다른 기회는 오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을 위해서, 딸을 위해서라도 꼭 의사가 되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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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녀는 한국인 최초로 여의사가 됐습니다. 곧장 한국으로 돌아와 보구여관에서 이젠 통역이 아닌 ‘의사’로서 환자들을 돌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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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 당나귀 썰매를 타고 환자를 찾아다닐 정도로 최선을 다해 진료했습니다. 한 해 평균 3천2백 명의 환자를 돌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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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이 재주를 피운다.” 여성의 사회 진출을 좋게 보지 않았던 당시에도 사람들은 그녀의 실력과 성실한 모습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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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위해 살던 그녀는 정작 자신의 몸은 돌보지 못했습니다. 남편과 같은 병, 폐결핵으로 32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오늘(13일)은 한국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 씨가 세상을 떠난 날입니다. 기획 최재영, 우탁우 인턴 / 그래픽 조상인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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