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발표된 투자 규모 1,558조 원. 기존에 추진되던 사업까지 더하면 4,755조 원. 청와대 정책실장이 예고한 대로 매우 '낯선 숫자'가 제시됐고, 대통령이 대기업 총수에게 90도 폴더 인사를 하는 '낯선 풍경'도 등장했습니다.
대통령이 삼성과 SK 회장을 양 옆에 두고 발표한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 프로젝트'. AI 시대에 주도적으로 대응해 '초격차'를 만들어 내자는 산업 발전 계획이자, 수도권 일극 체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국가 균형 발전 계획이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 성격에서 모두 논란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우선, 기업들은 원치 않는데 정부가 팔 비틀어 투자 계획을 내놓게 한 것 아니냐는 논란이 있습니다. 어제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를 시작한 게 1985년인데 2025년까지 40년간 반도체로 얻은 총 수익이 295조 원인데 올 한 해 (예상) 수익이 350조 원이다." 세상이 바뀌었는데 그걸 모르고 하는 소리라는 반박입니다. 두 기업이 국내가 아닌 국외에 더 좋은 입지를 찾아 공장을 지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국내 투자 계획 자체를 문제 삼기는 어렵습니다. 결국 어제오늘 논란은 호남권에 더 많이 투자된다는 것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국민의힘, 호남권에 '제2 반도체 클러스터' 투자에 반발새로 공개된 투자 규모를 권역별로 보면 호남권 896조 원, 충청권 392조 원, 영남권 270조 원입니다. 투자 규모도 규모지만, 반도체 생산의 전(前)공정으로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는 팹(fab) 4기가 호남권에 구축된다는 계획에 논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호남권이 수도권에 이은 제2의 반도체 생산 기지가 되는 셈이고, 부가가치나 고용 창출 효과도 후(後)공정이나 피지컬 AI 산업에 비해 더 클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렇다 보니, 어제 야당인 국민의힘이 보인 반응이 "핵심은 결국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이고, 나머지 사업들은 호남 몰아주기를 희석하려는 들러리"라는 깎아내리기였습니다. 어제는 충청과 대구·경북, 오늘은 부산·울산·경남 지역의 국민의힘 의원들이 대거 나서 강하게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핵심은 '왜 호남인지?'에 대한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기자회견 내용 중 관련 부분을 보겠습니다.
"원전 시스템과 원전 제조 생태계를 갖춘 부산·울산·경남보다 안정적인 전력과 첨단 제조 역량을 함께 지닌 지역이 어디에 있습니까? 부·울·경이 무슨 이유로 반도체 핵심 생산 거점 검토에서 배제됐습니까? (중략) 왜 호남인지, 어떤 기준으로 판단했는지, 부울경을 비롯한 다른 지역과 어떻게 비교했는지 국민 앞에 밝히십시오." (국민의힘 부산·울산·경남 지역 국회의원 기자회견, 오늘 국회)
정부를 향해 입지 평가표와 전력 공급 및 용수 확보 계획을 공개하라고 한 국민의힘 의원들은 이런 말을 더했습니다.
"부울경을 전력 생산 기지로만 쓰고 미래산업 투자에서 배제하는 것은 균형 발전이 아니라 '균형 차별·지역 차별'일 뿐입니다." (국민의힘 부산·울산·경남 지역 국회의원 기자회견, 오늘 국회)국민의힘 부산·울산·경남 의원들, "지역 차별" 주장
회견을 시작할 때는 이런 전제를 깔았습니다. "저희는 호남의 발전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정 지역의 성장을 막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느 지역이든 성장할 필요와 권리가 있습니다. 당연히 헌법과 법률에 따른 국가 균형 발전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어제 발표된 대로 사업이 추진된다면, 지역 차별이 될 뿐이라는 주장을 폈습니다.
'지역 차별'과 이에 따라 발생한 '지역 갈등', '지역 감정'은 지금 젊은 세대에게는 낯설 수도 있지만, 1970년대부터 한국 사회를 멍들게 한 고질병이었습니다. 망국병으로 불린 지역 감정은 1970년대 박정희 정부의 영남 중심 발전 전략에서 기인했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1973년 중화학공업 발전 계획을 통해 경제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지만, 여수 지역의 석유화학 단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영남 지역에 투자와 지원이 집중됐습니다. 경제 권력뿐 아니라 정치 권력과 행정 권력 모두,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 때까지 영남에 줄곧 집중돼 왔습니다. 영남 정권 전성시대였습니다. 그 뒤 김대중 정부부터 이재명 정부까지 민주당이 대통령 4명을 배출하면서 호남에 기득권이 생긴 것도 현실입니다. 그러던 중 대한민국 제2의 반도체 클러스터가 호남권에 들어선다는 계획이 발표되자, 이번에는 역으로 영남에서 '지역 차별'을 얘기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이런 주장에 대해 이재명 대통령은 오늘 오전 국무회의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가 어디서 자료를 보니까 영남 지역의 인구가 1,300만, 호남 지역의 인구가 500만 정도 이렇게 된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호남 지역 인구가 훨씬 더 많았다고 해요. 그런데 어쨌든 다 지나간 과거의 일이긴 하지만 현실의 결과에 남아 있기도 한 아픈 과거인데, 영호남 차별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그걸 어거지로 교정할 수는 없었는데, 마침 새로운 환경이 그 불균형을 조금이나마 완화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됐습니다." (이재명 대통령, 오늘 국무회의 발언)이 대통령, "지역 차별 운운...누적된 투자량 비교하면 조족지혈에 불과"
이 대통령은 어제 행사에서는, 호남이 반도체 클러스터 부지로 선정된 것을 경제적 적합성 중심으로 설명했습니다. 오랜 기간 개발에 소외돼 왔는데 그게 오히려 기회의 요인이 된 측면이 있어서, 반도체 클러스터 건설에 필수적인 전력, 용수, 토지 등의 측면에서 호남이 적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국무회의에서도 비슷한 취지로 설명했는데, 이런 말을 더했습니다.
"이걸 가지고 지역 차별 운운하는 경우도 있긴 한 것 같은데, 지금 이 사안 자체만 보면 호남 지역에 투자가 조금 많은 게 사실이긴 하죠. 그러나 역사적으로 누적된 투자량을 비교한다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에 불과하다라는 점을 모두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게 모두 대한민국의 전체적인 발전, 또 대한민국의 미래가 걸린 국토 균형 발전을 위한 매우 다행스러운 결과라고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재명 대통령, 오늘 국무회의 발언)
어제 발표된 내용만 보자면 투자가 호남에 더 이뤄지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동안 극히 차별적이었던 영호남의 투자량을 비교해 보면, 호남권 896조 원은 조족지혈(鳥足之血) 즉, '새 발의 피'라는 것입니다. 호남이 영남 중심의 발전 전략에 희생돼 온 게 한국 경제 발전 전략의 역사였던 만큼, 이제 이를 바로잡는 것이지 영남에 대한 지역 차별이라 볼 수 없다는 반론인 셈입니다. 이 대통령이 자신의 역사 인식과 상황 인식을 그대로 드러낸 발언이라고 봅니다. 영남의 국민의힘 정치인들로서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생각할 것이고, 지역 차별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란은 더 커질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조족지혈이라는 표현까지 쓴 만큼, 1970년대 이후 영호남 투자량을 비교하는 숫자까지 제시되면서 토론도 가열될 수 있습니다. 바라기로는, 토론을 치열하게 하되 정치인들이 망국병인 지역 감정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망언과 망동은 결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건 여나 야나 마찬가지입니다. 국가 균형 발전의 관점에서 어제 발표된 계획이 현실성이 있고 바람직한지에 대해 토론이 냉정하게 진행되길 기대합니다.
대통령이 오늘 오후에는 광주에서 호남권 국민 보고회를 했습니다. 어제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의 후속으로 기획된 자리인데 이런 말을 했습니다.
"소외와 배제, 슬픔과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만회하고 동서가 또는 수도권과 지방이 균형 성장하는 첫 출발이 될 것 같습니다. 이게 오늘 정책 발표를 하면서 제가 느끼는 소회입니다. (중략) 저는 민주당 소속 정치인으로 대통령이 됐고, 대통령으로서는 대한민국 모두를 위한 정책을 기획하고 집행하는, 또 지휘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저는 전체를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가진 기본적 가치나 이상, 열망을 포기하진 않습니다. 두 가지가 잘 조화돼야 하겠죠." (이재명 대통령 서남권 첨단산업 발전 비전 국민보고회 발언, 오늘 광주광역시)이 대통령 "민주당 정치인으로 대통령, 대한민국 모두를 위한 위치"...충청·영남 설득 중요
앞으로 충청권과 영남권 보고회도 이어질 예정입니다. 호남과 달리 충청과 영남 주민들은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오늘 얘기한 대로,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지만 대한민국 모두를 위한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충청과 영남의 민심을 잘 헤아리는 세심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충청과 영남에서 대통령이 어떤 말로 지역민들에게 이번 계획을 설명하고 설득할지 지켜봐야겠습니다.
호남이 전력과 용수 등의 측면에서 적합한 반도체 클러스터 부지인지를 두고 논란이 한창입니다. 없던 사업을 대규모로 벌이는 것인 만큼, 어느 지역이라도 전력과 용수 면에서 부족함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관건은 중앙과 지역 정부, 해당 기업이 힘을 모았을 때 닥친 문제들을 해결하고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느냐일 것입니다. 삼성은 현재 평택과 용인에서 8기의 팹을 건설 중이고, SK는 용인에서 4기를 짓고 있습니다. 중앙정부의 적극적 지원을 받아 완공을 각각 7년, 12년 앞당긴다는 계획을 밝혔습니다. 기업들로서는 이재명 정부의 요청에 응했을 때 당장 손에 쥘 수 있는 경제적 이득일 것입니다. 그 대가로 나온 것이 1,500조 원 규모의 추가 투자 계획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업이 그런 것처럼 장밋빛 일색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의 투자 계획은 반도체 사업이 전에 없던 '빅 사이클'에 들어섰고, 삼성과 SK가 매해 수백조 원의 영업이익을 거둘 것이라는 전망과 기대에 근거하고 있지만 누가 100%라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불확실성을 이겨내고 천문학적 투자를 성공시켜 미래 안정적 먹거리를 창출하는 도정에서, 당장은 지역 차별 논란이 심각한 지역 갈등으로 비화하는 일이 없도록 정치권의 냉정한 대응이 필수적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