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닝 브리핑

'참을 수 없는 입의 가벼움'…끝없는 자해 외교 [이브닝 브리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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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서 《전국책(戰國策)》의 〈중산책(中山策)〉에 나오는 고사입니다.

춘추시대 중산국 군주가 중신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메뉴는 당시 귀한 음식인 양고기 스프였습니다. 공교롭게도 대부 사마자기(司馬子期) 차례 바로 앞에서 바닥이 났습니다. 스프로 이른바 '왕따'를 당했다고 여긴 사마자기는 모욕감에 다른 나라로 망명했고 중산국의 기밀을 넘겼습니다. 그 나라는 이를 이용해 중산국으로 쳐들어왔습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한 중산국 군주는 비참하게 도주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창을 든 용사 2명이 목숨을 걸고 자신을 호위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왕이 연유를 물었습니다. 이들은 과거 그들의 아버지가 굶어 죽어갈 때 왕이 베풀어준 '한 그릇의 식은 밥' 덕분에 목숨을 건졌고, 아버지가 임종 때 은혜를 갚도록 유언을 남겼다고 답합니다. 중산국 군주는 이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한 그릇의 양고기 스프로 나라를 잃었고, 한 그릇의 찬밥으로 두 용사를 얻었구나." 매우 사소한 일이 나라를 위기에 빠트리기도, 목숨을 건져줄 인재를 얻기도 하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교훈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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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멜로니 대담 모습으로 문제가 된 사진 (AFP 연합뉴스)

트럼프 미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미국과 이탈리아 외교 관계를 최악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발단은 트럼프 대통령과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가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는 사진입니다. G7 정상회의가 열리던 프랑스 에비앙레뱅의 호텔에서 촬영됐습니다. 미소를 띤 채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양국의 관계 개선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한때 유럽 내 대표적 親트럼프 인사였던 멜라니 총리는 최근 트럼프와 가시 돋친 말을 주고받으며 사이가 차갑게 얼어붙었습니다. 트럼프가 가톨릭 교황 레오 14세를 향해 "범죄에 나약하고 외교 정책에 형편없다"고 직격하자 멜로니 총리는 "납득할 수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이탈리아는 이란 전쟁에서 미군에 대한 지원을 거부하며 양국 관계는 악화일로였습니다. 하지만 G7 회의에서 양 정상이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모습이 수차례 포착됐습니다. 그리고 문제의 훈훈한 모습의 사진도 공개됐습니다.

그런데 G7 회의 뒤 트럼프는 이탈리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달을 냈습니다. 멜로니 총리가 자신과 "사진 한 장 찍으려고 애걸(Begged)했다", "불쌍해서 찍어줬다"는 식의 발언을 했습니다. 멜로니는 즉각 반격했습니다. "나도, 이탈리아도 절대 구걸하지 않는다. 날조된 이야기"라며 발끈했습니다. 일껏 봉합했던 양국의 감정싸움이 다시 극에 달했습니다. 이탈리아 안토니오 타야니 외무장관은 "멜로니 총리를 향한 심각하고 모멸적인 트럼프 대통령의 언사는 이탈리아 전체를 능멸한 것"이라면서 예정됐던 미국 방문 일정을 공식 취소했습니다. 이탈리아 야당도 "이탈리아는 이렇게 공개적으로 모욕당할 이유가 없다", "멜로니가 무언가 구걸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라면서 변호에 나섰습니다. 한 이탈리아 우파 매체의 1면 머리기사 제목은 이러했습니다 "트럼프는 개자식"

트럼프 미 대통령의 모욕적인 발언이 외교 문제로 비화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트럼프는 백악관 공식 행사 등에서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동거인(아내)에게 학대받는 남편"이라며, 프랑스 억양을 우스꽝스럽게 성대모사해 조롱했습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이란 전쟁에 프랑스가 즉각적인 군함 파견 등 군사 지원을 거부하자 이에 대한 불만을 사적인 모욕으로 표출했습니다. 프랑스 정계는 좌우를 막론하고 "우방국 정상과 그 가족에 대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모욕"이라며 일제히 격분했습니다. 미국과 프랑스의 관계는 아직까지도 전례 없이 냉랭한 상황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영국의 스타머 총리, 독일 메르츠 총리 등 다른 주요 유럽 정상들에게도 NATO 방위비 분담금과 무역 관세 등을 놓고 "미국의 피를 빨아먹는다"는 식의 거친 언사를 이어가며 끊임없이 갈등을 유발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궁금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입이 방정맞아서 나오는 대로 뱉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무엇인가 전략적인 속내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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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외교 전문가에게 물어봤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모욕적 발언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런 '우방 기들이기'를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협상 전술로 생각하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미국이라는 현존 유일의 초강대국이자 패권국 수장으로서 미국의 입장과 이해를 강요하는 확실한 방법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설사 상대국이 자국 내 시선과 국민감정 때문에 겉으로는 반발하고 협조하지 않는 모양새를 취하더라도 결국 미국에 따라올 수밖에 없다고 자신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 세계를 상대로 일방적으로 고율의 관세를 부과했을 때 EU를 포함한 여러 나라가 처음에는 강하게 반발했지만 결국 미국에 거액의 투자를 약속하며 굽히고 들어왔던 사실을 근거로 삼는다고 해석합니다. 트럼프의 갑질 발언에 아직까지 세계가 연대해 대항하는 움직임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국제정치학적으로 이미 미국은 막대한 비용을 치르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① 동맹 행동력의 실질적 상실..'사보타주'에 나선 우방국

미국이 강력한 패권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위기 상황에서 대신 피를 흘리거나 경제적 비용을 분담해 줄 '동맹 동원 능력' 덕분입니다. 하지만 우방 정상에 대한 공개적 모욕은 동맹국들의 이런 협조 의지를 꺾어 놓습니다. 프랑스가 군함 파견을 거절하고 스페인이 자국 내 기지 협조 요청을 거부한 것처럼, 향후 미국이 간절하게 우방의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필요로 할 때 동맹국들이 "미국 우선주의대로 알아서 하라"며 발을 빼게 하는 명분을 제공하는 꼴입니다.

② 동맹국 정상이 협조할 수 없는 '국내 정치적 환경' 조성

민주주의 국가의 정상들은 자국 여론과 표심에 민감합니다. 트럼프에게 모욕을 당한 마크롱이나 멜로니가 미국의 정책에 순순히 따를 경우, 자국 국민들에게 "미국 대통령의 애완견 노릇을 한다", "국격을 내팽개쳤다"는 치명적인 비판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트럼프의 거친 입은 우방국 정상들로 하여금 국내 정치를 위해서라도 미국에 더욱 강경하고 대립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③ 경쟁국인 중국·러시아 등에는 반사이익 제공

멜로니 총리가 트럼프를 향해 지적했듯, 트럼프 대통령은 오히려 서방에 적대적인 중국, 러시아 등의 정상들에게는 적어도 말로는 유화적입니다. 반면 우방국 정상들에게는 가혹한 모욕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서방 진열의 결속은 약화되고 심지어 와해되는 모습까지 보입니다. 중국과 러시아가 유럽 국가들을 포섭하거나 미국의 외교적 고립을 추진하기 딱 좋은 전략적 틈새를 열어주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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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오럴 리스크'는 당장은 미국 보수층의 카타르시스를 자극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미국을 위해 대신 지갑을 열고 군대를 보내줄 진짜 우방들을 모두 등 돌리게 만드는 '외교적 자해 행위'에 가깝습니다. '천냥 빚을 갚을 수 있는 말'을 할 줄은 모른다 하더라도 적어도 '천냥 빚을 사는 말'을 참을 수는 있지 않을까요? 중산국의 군주도 양고기 스프 한 그릇, 식은 밥 한 그릇이 그렇게 거대한 결과로 돌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한없이 가벼운 말도 미국이 세계 패권의 기반을 스스로 허무는 막대한 역사적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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