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판 명품 가방을 특별히 헐값에 판답니다. 판매자는 돈 많고 젊은 여성 사업가이자 10만 넘는 팔로워를 지닌 인플루언서라네요. 횡재했다는 구매 후기가 곳곳에 보이고, 정신 차려보니까 그만 입금을 해버렸습니다. 그런데, 몇 년을 기다려도 물건이 안 옵니다. '오겠지 오겠지' 속앓이만 하던 차에 가방 대신 찾아온 소식, 이 판매자 알고보니 남자였습니다. 상품 꼭 보내주겠다고 약속하다가 돌연 연락이 끊겼는데, 감옥에 가 있다고 합니다. 물건 못 받은 사람,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송금한 걸 다 합해보니 무려 20억 원에 달합니다. 기막힌 이야기, 지금 시작합니다.
1. "3억 짜리를 2천만 원에..콘서트 예매처럼 몰렸죠"
50대 여성 A 씨가 박 모 씨와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한 건 지난 2023년, 한 중고거래 플랫폼에서 명품 가방을 저렴하게 판다는 글을 보고 판매자인 박 씨에게 말을 건 겁니다. 정가보다 수십배 싸게 내놓는 한정판 명품에, 매번 구매 경쟁에 불이 붙었다고 합니다.
[A 씨/명품 사기 피해자 : 3억 짜리거든요. 근데 그거를 2천만 원에 준다고. 너무 싸니까 (사이트에) 들어갔는데. 여기 계신 분들 중에 몇 분만 드린다, 올라오자마자 막 사람들이 엄청 몰리고 끝나더라고요. 콘서트 (예매마냥) 막 되게 유명한 것처럼.]
터무니없는 헐값을 보면서 사기 의심부터 들었다는 A 씨, 하지만 얼마 못 가서 이런 의구심은 사라졌습니다. 돈 많고 젊으며 감각 있는 여성 사업가이자 영향력 있는 인플루언서라는 박 씨 면모에 빠져든 겁니다.
[A 씨/ 명품 사기 피해자 : 자기 되게 유명하다고. 검색을 해보니까 뭐 14만 팔로워 막 이러더라고요. 차도 뭐 15대 막 이렇게 있고. (박 씨가 보내준 사진을 보고) '예쁘시네요' 이랬거든요. '하도 스토커가 많아서 사진 내렸어요'라고…]
처음 구매를 시도했다가 단념했는데, 오히려 이 경험이 신뢰를 키웠고,
[A 씨/ 명품 사기 피해자 : (배송까지) 좀 걸린다는 거예요. 그럼 저 환불해 달라고 그랬더니 (바로) 환불해 주시더라고요. 왜 이렇게 싸게 파시냐고 그랬더니 자기가 재단 법인이 있는데 그거를 비용 처리한다고 그러더라고요. 자기는 별로 손해가 없다, 아 이분 사기 아닌가 보다 이랬죠.]
더 싸게 명품을 넘겨주겠다는 말에 19차례에 걸쳐 보낸 돈만 어느새 6천6백만 원, 이중 2천8백만 원만 되돌려 받았습니다,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2. 환불 요청에 화 내고 '가스라이팅'
약속한 날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택배가 오질 않습니다. 박 씨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틈날 때마다 배송 일정을 물었지만 기다리라는 답뿐이었고, 환불 요구도 점점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유능한 사업가 면모를 과시한 박 씨의 소셜미디어 등을 보면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A 씨/ 명품 사기 피해자 : 환불해 달라 했더니 못 해준다고. 재촉했더니 막 화를 내는 거예요. 다들 기다리는데 왜 본인만 그렇게 유별나게 그러냐. 가스라이팅 되게 심하게 했어요. 갑과 을이 바뀌더라고요. (오히려 제가) 아 죄송하다고.]
온라인에 올라온 후기들만 바라보면서 매일 '희망고문'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A 씨/ 명품 사기 피해자 : 사진도 되게 많이 올리고요. '너무 감사하다 이렇게 싸게 준 거', '가만히 있다가 (받았다), 기다렸다' 그거 보고 막 이제 아 내 건 언제 오지 내 건 언제 오지. 최면에 걸린 것처럼.]
'사기 범죄 피해를 당한 거구나', A 씨가 현실을 받아들인 건, 내가 산 가방을 2년이 지나도록 구경 한 번 못했단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을 때였습니다. 박 씨에게 돈을 보냈는데 물건은 못 받았단 고소장이 잇따라 접수되면서 경찰 수사가 시작됐습니다.
3. 14만 팔로워 여성 인플루언서, 알고보니 남자?
여기서 뜻밖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14만 팔로워를 지닌 여성 인플루언서' 박 씨가 사실 20대 남성으로 확인됐다는 겁니다. 박 씨는 최근 환불 요구가 몰리면서 배송에 차질이 생겼을 뿐이라고 혐의를 부인한 걸로 전해졌지만, 경찰은 박 씨가 가짜 여성 재력가 행세를 하면서 사기 행각을 이어온 정황을 포착하고 실제 자산 규모 등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 절차에 착수했습니다. 현재까지 경찰이 파악한 피해자는 최소 17명, 피해 액수는 20억 원에 달합니다. 박 씨는 여러 차례 경찰에 출석해서 조사를 받았는데, 이런 와중에도 구매자를 끌어모으다가 최근 또 다른 범죄 혐의 덜미가 잡히면서 결국 구속된 걸로 확인됐습니다. 최고급 오피스텔에 화려한 외제 차량들까지, 성별 속여가며 재벌가 사칭하다가 옥살이를 하고 있는 전청조 사건이 떠오른다는 말이 피해자들 사이에서 나오는 이유입니다.
[A 씨 / 명품 사기 피해자 : 말투도 되게 여성스럽거든요. 다 믿었는데, 다들 지금 멘탈이 많이 나가 있는 상태이고. 전청조 시즌 2로 보시면 돼요. 모든 게 허언증이더라고요.]
4. 오지도 않는 명품, 왜 계속 돈 보냈나?
아무리 명품을 헐값으로 판다고 해도 거액이긴 한데, 사람들은 왜 오지도 않는 명품 가방과 시계를 위해서 계속 돈을 보낸 걸까요. 이게 '손해볼 거 없는 투자'라며 유혹했단 게 피해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몇 억짜리 한정판 가방을 단돈 삼사백만 주고 사서 되팔면 어마어마한 이윤이 남는단 겁니다.
[A 씨/ 명품 사기 피해자 : 이거 사시면 나중에 파시면 이득이다, 투자 목적이라고 생각을 하시라고. 처음에는 하나씩 사다가 계속 이렇게 몇 개씩. 대출받는 분들 되게 많아요. 6억짜리를 1천에 사면 재테크다, 이건 주식보다 더 많은 거라고.]
박 씨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최고급 오피스텔에서 음성 없이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고 화려한 외제차 같은 것들 계속 과시를 하면서 의구심을 갖지 않게끔 유도했다고 피해자 측은 주장합니다.
[최대건/변호사 (A 씨 측 대리인) : (후기 등) 모든 게 다 허위였고요. 의심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의심할 수 없게 완벽한 환경을 설계한 것 같아요. 주부나 명품을 구매하고 싶은 여성을 상대로…]
일부 피해자들은 지난달 박 씨를 상대로 집단 민사소송에도 나섰는데요. 박 씨의 사기 범행 피해자 다수가 일반 주부라고 합니다. 괜히 명품 하나 구해보려다가 당했단 생각에 어디 가서 말도 못 하고 속으로 끙끙 앓기만 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드러나지 않은 피해자가 더 있을 수 있단 뜻입니다.
[A 씨/ 명품 사기 피해자 : 신고를 못하신 분이 많아요. 허영심이잖아요. 자책을 되게 많이 하세요.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이러고 아 정말 죽고 싶다 이런 분들도 되게 많고, 다 주부니까 남편들이 모르니까.]
[이은희/ 인하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 : 너무나 저렴하면 이상하다 이렇게 생각을 해야 되는데, '이렇게 버젓이 있고 하는데 뭐가 문제겠어' (생각하는 거죠.) 비공식적인 방법을 통해서 구매하는 거 이런 거는 절대로 안 하시는 게 좋겠다…]
5. "세상에 공짜는 없다"
보도가 나가고 속인 사람이나 속은 사람이나 다 문제다 같은 반응들 많이 보입니다. 저 역시 취재 과정에서 석연찮으면 사지 않는 게 나았을 텐데 싶으면서도 누구나 의심을 품어도 정교한 설계 앞에선 결국 무력화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댓글 중 새삼 눈에 띈 건 "세상에 공짜 없다"라는 말인데요. 제값 주고사는 게 아니라면 그 차액만큼 혹은 그 이상의 혹독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는 상식이 떠올랐습니다. 화면 너머의 화려함을 보며 상식이라는 안전장치를 잊지 않는다면 속고 속이는 이런 일, 조금은 줄일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가져봅니다.
(취재 : 안희재, 구성 : 신희숙, 영상취재 : 공진구, 영상편집 : 서병욱, 디자인 : 양혜민, 제작 : 디지털뉴스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