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의 미디어 지원 센터 밖에서 한 경찰관이 미국과 이란의 협상에 관한 옥외 광고판 앞을 지나가고 있다.
지난 주말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열렸던 미국과 이란의 첫 종전 협상이 당장 합의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이란으로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집중 공습으로 한자리에 모일 수 없었던 이란 지도부 고위 인사들이 40여 일 만에 처음으로 머리를 맞대고 국정 방향을 논의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입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14일(현지 시간) 이처럼 미국이 이란 지도부에 의도치 않게 안전한 모임 장소를 제공한 셈이라고 전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지난 10일 밤 미국과 평화 협상을 위해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한 이란 대표단은 남성 69명, 여성 2명 등 무려 71명으로 구성됐습니다.
당시 공항에서 바로 시내 5성급 호텔로 향한 이란 대표단에는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이란 국회의장, 아바스 아라그치 외무장관, 압돌나세르 헴마티 중앙은행 총재, 알리 아크바르 아흐마디안 국가안보최고위원회 사무총장이 포함됐습니다.
이밖에 다수의 고위 외교관과 이슬람혁명수비대 참모들도 동행했습니다.
외교적으로 과한 규모였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란의 두 번째 목적에는 부합하는 대표단 구성이었다는 게 텔레그래프의 평가입니다.
미국이 공습을 시작한 2월 28일 이후 처음으로 이란 정부 지도자들이 폭격이나 암살 걱정 없이 한자리에 모이는 기회가 됐다는 것입니다.
이란 정부의 한 관리는 텔레그래프에 "40일 동안 사안을 조율하고 향후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 걱정 없이 만날 기회를 찾고 있었다"면서 "파키스탄 방문이 사안들을 다루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이란은 평화 목적으로 거기에 갔지만, 미국은 의도치 않게 이란이 전쟁 재개의 경우에 대비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란 지도부 인사들이 새 최고지도자인 모즈타바 하메네이의 메시지를 교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이 관리는 전했습니다.
그는 "새 지도자가 어디에 있는지, 심지어 살아있느냐가 요즘 주요 화제였다"면서 이슬라마바드 모임에서 "갈리바프가 '다 괜찮다'고 모두를 안심시켰다. 모두가 갈리바프를 신뢰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전쟁 이후 이란 지도부는 소통과 지시 전달에 큰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따라서 이번 전쟁은 물리적으로 인접해야만 통치가 가능한 이란 신정체제의 근본적인 취약점을 드러냈다고 텔레그래프는 진단했습니다.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이란 최고지도자는 헌법수호위원회에 지시를 내리고, 헌법수호위원회는 의회에서 제출된 법안을 심사하며, 의회는 혁명수비대 지휘관들과 협의하며, 혁명수비대 지휘관들은 국가안보최고위원회를 거쳐 다시 보고를 올립니다.
이 모든 중요 의사결정 과정이 성직자, 군 장성, 관료들 사이의 대면 협의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군 지휘센터와 지도부 관련 시설을 겨냥한 6주간의 미·이스라엘 작전이 이러한 통치 절차를 마비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란의 협상 대표단과 그 구성이 지도부 단합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분열을 초래할지에 관해선 전문가들의 관측이 엇갈린다고 텔레그래프는 짚었습니다.
이론상 핵 협상 경험이 풍부하고 미국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아라그치 장관이 외교 임무를 지휘하는 게 맞지만, 반세기 동안 '미국에 죽음을'이라는 구호로 정당성을 쌓은 이란 정권 입장에선 이런 합리적 기준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신 혁명수비대 지휘관 출신이자 하메네이 전 최고지도자와 가까운 갈리바프 의장이 대표단을 이끈 것은 혁명수비대가 궁극적인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또, 이란 내에서는 미 정보 당국이 이슬라마바드 협상에 참석한 자국 지도부 인사들을 파키스탄 방문 기간은 물론 테헤란으로 복귀한 이후에도 계속 추적·감시해 대화가 최종 결렬되면 공격 표적으로 삼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고 신문은 전했습니다.
(사진=AP,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