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학했는데 교과서 없어"…교과서 지급에도 차별이 있다 [취재파일]

매년 늦는 점자 교과서…교육에서 소외되는 시각장애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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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인 유진이(가명)는 앞이 뿌옇게 보이는 시각장애 학생입니다. 동그란 뿔테 안경을 썼지만, 안경 렌즈로 무언가가 뚜렷이 보이진 않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망막에 문제가 있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고, 1급 시각장애 판정을 받았습니다. 카메라로 치면 모든 기능은 정상인데, 상이 맺히지 않는 겁니다.

유진이는 수원의 한 일반 초등학교에 다닙니다. 3학년 4반의 유일한 시각장애 학생이자, 이 학교에 처음으로 입학한 시각장애 학생입니다. 친구들과 함께 똑같은 교실에서, 똑같은 선생님에게, 똑같은 수업을 듣지만 다른 게 하나 있습니다. 책상에 펼쳐진 '교과서'입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교과서를 받았지만, 유진이는 아직 영어와 사회, 도덕, 국어활동, 체육 과목 교과서를 받지 못했습니다. 개학한 지 열흘이 넘었는데 못 받은 교과서가 더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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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자 교과서 없어…엄마가 만들어 준 점자 교재로 수업

3교시 영어수업 시간이 되자, 친구들은 새로 받은 교과서를 폅니다. 올해부터 학교에선 처음으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들이 교과서를 꺼낼 때, 유진이는 엄마가 직접 만들어 준 교재를 꺼냅니다.

유진이가 꺼낸 교재 맨 앞엔 '<영어> 임시 교과서'라는 글씨와 함께 점자 표시가 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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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낸 문제의 답을 찾은 친구들이 손을 번쩍 들 때, 유진이는 엄마가 만들어 준 교재의 쪽수를 찾기 바쁩니다.

양손으로 흰 종이에 가득한 점자를 빨리 읽어봐도 수업을 따라가는 건 여전히 힘겹습니다.

바로 옆자리 짝꿍이 '여기는 몇 쪽이야?' 물으며 도와줬지만, 결국 수업 내용이 교과서 몇 쪽인지 찾는 건 실패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의 교과서는 18쪽에서 19쪽으로 넘어가는 내용인데, 엄마가 만들어 준 교과서는 19쪽에서 18쪽으로 거꾸로 돼 있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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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이가 공부할 때 제일 좋아하는 건 교과서 뒤에 있는 '스티커 붙이기' 활동입니다.

교과서 빈칸에 숫자나 그림 스티커를 붙이는 건데, 엄마가 만들어 준 임시 교재엔 스티커가 없습니다.

정식 점자 교과서를 받을 때까지만 사용하려고 교과서 문장만 급하게 점자로 바꾼 거기 때문에 여러 활동을 할 땐 한계가 있습니다.

김유진(가명)/초등학교 3학년
"저는 엄마가 만들어 준 임시 교과서는 있는데, 진짜 교과서는 없어요. 다른 애들은 다 (교과서가) 있는데 저만 없어서 좀 속상하기도 하고, 엄마가 만들어 주는 건 임시 교과서라서 표지가 없거든요. 붙임 딱지 설명 같은 거도 거기엔 없고요."

(다른 친구들이 스티커 붙이기 활동할 때 유진이는 어떻게 해?)

"못 하거나 그래요. 조금 속상해요. 왜냐하면 스티커 붙이는 걸 좋아해가지고…."

"주말 내내 점역하면 겨우 교과서 10장 나와"

다음 주에 점자 교과서가 없는 수업이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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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이의 어머니 두지원 씨는 주말 내내 임시 교재를 만듭니다. 일반 교과서에 적힌 문장을 일일이 워드로 친 뒤, 특수 프린터로 점역해 책처럼 제본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주말 이틀 동안 작업하면 일반 교과서 열 장 남짓 분량이 나옵니다. 이번 주가 끝나면, 다음 주 수업할 분량을 예상해 또다시 임시 교재를 만들어야 합니다.

전체 교과서를 모두 점역하기까지는 두 달이 걸립니다.

두지원/어머니
"일단은 점자 교과서가 안 온 것부터 치기 시작하는 거예요. 일일이 보고 텍스트를 따서 점역을 해요. 초등학교 교과서는 말풍선도 많고, 주고받는 대화가 많아서 전산으로 칠 수 없고 일일이 다 (타이핑을) 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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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지난해 점자 인쇄가 되는 특수 프린터를 구입했습니다.

점자 교과서가 제때 지급된 적이 이제껏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친구들이 모두 교과서를 펼 때, 유진이만 교과서가 없다고 멍하게 둘 순 없으니, 직접 교과서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어렵게 구입을 결정한 특수 프린터는 700만 원에 달합니다.

두지원/어머니
"유진이가 아무것도 없이 멍하니 있을 수가 없잖아요. 교실에서 너무 소외되잖아요. 선생님도 유진이를 한 번 더 봐주셔야 할 테고, 그러면 다른 아이들의 수업을 방해하는 셈이 되니까요. 사실 그전에는 투명한 종이에 점자를 인쇄한 뒤, 일반 교과서에 하나하나 붙여줬어요. 문장을 일일이 치는 것보다 정확한 위치에 그걸 오려서 붙이는 작업이 더 힘들었어요."

시각장애 자녀를 둔 부모라도,

모든 과목 교과서의 모든 내용을 손수 점자로 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유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2년 전, 두 씨는 전 과목의 임시 교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즉,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전 과목 점자 교과서가 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두 씨는 오히려 1학년 때 교재 만드는 게 지금보다 수월했다고 말합니다.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엔 비교적 글씨가 적어 금방 제작했는데,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글씨가 많아져 점역에도 시간이 꽤 걸린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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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교과서는 '쪽대본'…"1~2단원 내용만 있어"

몇몇 과목은 점자 교과서를 받았지만, 이마저도 교과서 전체가 아닙니다.

교과서가 10단원까지 있다면 유진이는 1~2단원 내용만 점역한 분권을 받았습니다. 뒤 내용을 알 수 없는 '쪽대본' 수준입니다.

사실상 '교과서 조각'을 받은 유진이는 예습을 할 수도, 전체적인 교과 흐름을 알 수도 없습니다. 만약 선생님이 수업 순서를 바꿔 뒤 단원을 먼저 수업하면, 유진이는 내용을 따라가기 힘들어집니다.

교과서를 받았는데, 또 교과서가 없는 겁니다.

두지원/어머니
"(점자 교과서) 통권으로 지급을 완벽하게 다 해준 적은 한 번도 없어요. 1단원 하고, 2단원 안 하고, 3단원이 연계되다 보니 3단원을 먼저 (수업)하시기도 하더라고요. 이 아이는 교과서가 또 없게 되는 거죠."

새 학기 교과서를 5월까지, 세 달에 걸쳐 받은 적도 있습니다.

7월이면 방학이 시작되는데, 학기 중반에 들어서야 교과서를 다 받은 셈입니다. 게다가 '쪽대본' 같은 분권 교과서는 받아도 문제입니다. 1권이 왔으면 2권도 바로 와야 하는데,

2권을 언제 받을 수 있는지 출판사에서 알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씨는 "1권, 2권, 3권, 4권 이런 것들이 언제까지 오는지 계획조차 공유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2권이 오지 않은 상황에서 혹시나 학교 수업 진도가 빠르게 나가면 어떻게 할지, 걱정의 연속입니다.

점자 교과서를 물려받는 것도 방법이지만 이것 역시 문제입니다. 교육 과정이 바뀌지 않아도 미세하게 교과서 내용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지난해 수학익힘책은 A와 B의 게임에서 A가 이겼는데, 올해 수학익힘책은 똑같은 게임인데도 B가 이기도록 바뀝니다. 모든 아이들이 A가 이겼다고 얘기할 때, 지난해 교과서를 물려받은 유진이는 홀로 B가 우승자라고 얘기하게 됩니다. 같은 내용을 배워도 다른 결론이 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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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로 인정 안 된 '점자 교과서'

점자 교과서는 2월 초, 일반 교과서 초판 제작이 어느 정도 끝난 뒤에야 제작을 시작합니다. 교과서에 있는 글자뿐 아니라, 각종 그림과 그래프를 점역해야 해서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애초에 시작 자체가 늦습니다.

또, 언제까지 만들어서 언제 제공해야 한다는 규정조차 없습니다. 교과서 제작, 검수, 인쇄, 보급 등 전 과정에 대한 세부 규정이 없고, 이를 관리할 주체도 명확하지 않다 보니 점자 교과서 늑장 지급은 매년 반복되는 일입니다.

전문가들은 현행법상 '교과서'의 범위에 점자 교과서가 빠져 있는 게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초·중등교육법」과 대통령령인 「교과용도서에 관한 규정」에서 정한 교과서 범위에 '점자 교과서'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현행법상 점자 교과서는 법적으로 교과서의 지위를 갖지 못하고, 교과서의 대체 자료인 '대체 교과서'의 지위만 갖습니다.

일반 교과서 제작이 끝난 뒤에야 대체 교과서가 만들어지니, 시각장애 학생들은 구조적으로 개학 후에 교과서를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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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변호사 (헌법소원 대리)
"만약에 점자 교과서가 교과서의 지위를 가지게 되면, 교과서가 만들어지면서 함께 점자 교과서가 만들어지는 거거든요. 함께 만들어진다는 것과, 교과서가 만들어진 이후에 점자로 바꾼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유진이 등 시각장애 학생들과 학부모, 시각장애 교사는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와 함께 헌법소원을 제기했습니다. 점자 교과서를 제때 제공 받지 못해서 헌법에 명시된 '균등하게 교육 받을 권리'가 침해됐다는 이유입니다.

헌법소원 청구서 내용 일부
"청구인들은 점자 교과서를 적기에 제공받지 못함으로써 수업 내용을 미리 예습할 수 없으며,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고, 시험을 준비할 수 없습니다. 결국 다른 학생들과 동등한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는 청구인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실질적으로 침해하는 것입니다."

헌법소원을 대리하는 김정환 변호사는 헌법소원의 목표를 간단하게 설명했습니다.

교과서에 '점자 교과서를 포함한다'는 표현을 넣어서 점자 교과서가 초·중등교육법상 교과서의 지위를 가질 수 있게 하자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일반 교과서 제작과 동시에 점자 교과서도 제작에 들어가고, 비장애인 학생들이 교과서를 받는 동시에 시각장애 학생들도 점자 교과서를 받을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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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서 '장애'가 차별의 이유가 되지 않도록

지난해 전국의 시각장애 학생은 1천678명입니다. 유진이처럼 일반 학급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17% 정도 됩니다. 유진이는 지금 다니는 초등학교의 첫 시각장애 학생이지만, 마지막 시각장애 학생은 아닐 겁니다.

장애 학생이 비장애 학생과 함께 차별 없이 교육받도록 하겠다는 건 이번 정부의 장애인 공약 가운데 하나입니다.

만약 개학 후, 비장애 학생들에게 교과서가 지급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학부모들의 제보가 쏟아지고, 언론도 앞다퉈 보도할 겁니다. 교육부 장관이 나서 해결책 마련을 지시하고, 일사불란하게 대안과 재발 방지책이 마련될 겁니다.

비장애 학생들에게는 벌어지지 않는, 벌어질 수도 없는 일이 장애 학생들에게는 일상적으로 벌어집니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소수란 이유로 교육에서 소외되고, 심지어 해결해 달라는 목소리는 늘 묻혀 수년째 문제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두지원/어머니
"이 친구가 무슨 잘못을 해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냥 어쩌다 보니, 살다 보니 만나게 된 친구가 '장애'라는 친구인 것뿐이에요. 우리 모두가 언젠가 장애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친구들은 당연히 학기 전에 모두 지급받는 교과서를 받을 수 없다는 건 구조적인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개학한 지 곧 3주 차가 됩니다. 유진이가 더 이상 엄마가 만들어 준 교재로 공부하지 않아도 되기를 바랍니다.

영어 시간에 모양은 각기 다르지만 같은 내용의 교과서를 펴고 같은 활동을 하며 공부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교과서조차 제때 지급 받지 못하는 차별이 새 학기마다 왜 반복되는 것인지, 다음 취재파일에서 좀 더 짚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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