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마다 교과서를 제때 받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취재파일]

장애를 고려하지 않는 교육 구조가 학교에서 벌어지는 차별의 가장 큰 원인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서울 노원구에 있는 한 인쇄소를 방문했습니다. 이 인쇄소는 다른 곳과는 달리 점자 교과서만 전문으로 인쇄하는 곳입니다. 인쇄를 마친 점자 교과서는 검수를 거쳐 전국에 있는 시각장애 학생과 교사들의 책상 위로 배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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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진이 이 인쇄소를 방문한 시점은 지난달 27일. 말 그대로 새 학기를 코앞에 둔 시점이었습니다. 장애가 없는 다른 학생들은 이미 교과서를 다 받았을 시점이었지만, 인쇄소는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지금이 대목이라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점자 교과서를 학교로 보내기 위해 '열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점자 교과서 인쇄소는 학기 초에 가장 바쁜 걸까?

문제는 아무리 서둘러서 점자 교과서를 제작해 학교에 보낸다고 해도 제때 학생과 교사들이 받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는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매년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반복되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한 힌트를 인쇄소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일반 교과서를 보내주셔야 저희가 작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점자 교과소 인쇄소 직원-


점자 교과서 제작은 출판사에서 일반 교과서 제작을 마친 뒤에야 비로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일반 교과서를 보내면 교과 내용을 점자로 옮기는 '점역' 작업에 착수합니다. 점역을 마친 뒤엔 그 내용을 인쇄하고 오류가 없는지 검수까지 하면 그제야 점자 교과서가 만들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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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일반 교과서를 보내주는 시점은 '1월 말~2월 초'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일반 교과서를 기반으로 점자 교과서를 만들 수 있는 시간이 한 달 남짓인 것입니다. 물론, 몇 개의 일반 교과서만 점자 교과서로 만들어 배포하는 거라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출판사가 학년 및 과목 별로 펴내는 교과서를 고려해보면 제작해야 할 점자 교과서 종류는 1천 개가 넘고,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이렇게 되면 새 학기 전에 교과서를 만들어 배포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집니다.

"매년 점자 교과서 지급이 늦어지는 건 구조적 문제"

결국, 새 학기마다 점자 교과서 지급이 늦어지는 이유는 제작 구조에 있었습니다. 출판사가 일반 교과서 제작을 마친 뒤에야 점자 교과서를 만들어야 하는 구조 탓에 제때 지급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쪽대본' 형식으로 일단 인쇄를 마친 단원 만이라도 '분권' 형식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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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구조 속에서도 점자 교과서 제작을 더 빠르게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출판사가 일반 교과서 제작을 더 빨리 하면 됩니다. 물론, 이런 방식은 자칫 제작을 서두르는 과정에서 교과서의 질을 떨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일반 교과서와 점자 교과서를 함께 만들도록 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출판사가 이런 노력을 하도록 강제할 어떠한 근거나 수단이 없는 게 현실입니다.

새로운 근거를 만들 수 있는 기회는 있었습니다. 지난해 「초·중등교육법」을 개정함으로써 교과용 도서에 관한 내용이 처음으로 법률에 담겼습니다. 그 동안은 대통령령인 「교과용도서에 관한 규정」을 통해 다루고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대통령령보다 더 강력하고 구속력 있는 법률로 업그레이드된 것이지만 장애 학생들을 위한 내용은 이번에도 담기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교과서 늑장 지급이 불가피한 '점자 교과서 제작 구조'는 수십 년째 유지되고 있습니다. 교육의 기본이 되는 교과서조차 제때 받지 못하는 차별이 학기 초마다 반복되고 있고,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제도가 없는 탓에 이런 차별은 고착화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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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육 제도는 비장애 학생과 교사에 맞춰 설계돼 있고 운영되고 있습니다. 아주 단순한 교과서 지급부터 학습 과정과 평가 등 교육 전반에 걸쳐 차별적인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시각장애가 있는 학생만 겪는 게 아니라 교사들도 똑같이 겪는 문제입니다. 이런 구조가 계속해서 유지된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김헌용 중학교 영어 교사-
헌법소원, 그 다음은?

일반 교과서 없이는 점자 교과서를 제작할 수 없는 종속적인 구조, 이로 인해 매년 교과서를 제때 받지 못하는 고착화된 차별, 이런 현실에 무관심한 교육 당국과 법 제도. 시각장애를 가진 학생과 교사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해 말 헌법소원을 제기한 이유입니다. 다만, 헌법소원을 통해 '헌법 불합치'와 같은 결정이 나온다 해도 과제는 남습니다.

어떻게 법을 바꾸고 제도를 설계해야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지 고민과 성찰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취재파일 3편에서 벤치마킹할 수 있는 해외 사례와 이를 토대로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 "장애 학생에게 교과서 적시 지급" 의무화한 미국…우리는? [취재파일]

▶ 새 학기마다 교과서를 제때 받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취재파일]

▶ "개학했는데 교과서 없어"…교과서 지급에도 차별이 있다 [취재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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