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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지막 금싸라기' 모두가 콕 집은 용산의 미래 [스프]

[지식의 발견] 김재원 가톨릭대 교수


⚡ 스프 핵심요약

용산은 과거 강남, 마곡에 이어 서울 내 대규모 택지 공급이 가능한 마지막 남은 '금싸라기' 땅으로, 현재 국제업무지구 조성과 1만 3천여 가구 공급이 추진 중입니다.

용산은 러일전쟁을 계기로 철도와 군사 목적의 일본군 기지로 변했고, 일제강점기·미군 주둔을 거치며 오랫동안 우리가 온전히 활용할 수 없는 땅이 됐습니다.

미군 반환 이후 공원화와 개발 논의가 있었지만 환경오염과 국토부·서울시·국방부 등 부처 간 이해관계로 속도가 나지 않고 있습니다.

Q. 1.29 부동산 공급 대책에서 눈에 띄는 지역이 용산이에요. 용산이 서울에서 대규모 택지가 들어설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맞습니까?

지금도 서울 안에서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땅은 있어요. 그런데 이 정도 규모로 될 곳들은 예전에 강남, 80년대 목동, 노원 전체가 개발됐을 때 상계동, 강남 남쪽 지역. 용산 직전 대규모 개발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땅이 마곡. 이제 이 정도 규모로 남아 있는 마지막 땅은 용산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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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마곡 다음 용산. 정부가 용산에 1만 3천여 가구를 공급하겠다고 발표했고, 상당수가 용산 국제업무지구에 짓겠다는 거예요. 드디어 용산역 앞 정비창에 들어오나 봐요. 얘기 나온 지 오래된 곳 아닙니까?

맞습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관련 문제로 물러나기 이전 오세훈 시정 때 이미 이 공간을 어떻게 개발하겠다는 계획이 섰었어요. 실제로 일부는 진행이 됐습니다.

오세훈 | 서울시장 (2007년)

한강을 가로막고 있는 판상형 아파트를 재배치해서 한강으로 열린 경관을 확보하도록 하겠습니다.

건물에 대한 평가, 어느 동네까지 개발에 포함될 거냐, 포함된 동네 안에서도 누가 더 많은 이익을 가져갈 거냐, 이런 문제로 시끄러웠습니다. 제대로 처리가 안 된 상황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이 물러나게 됐죠. 그다음 박원순 서울시장은 국제업무지구에 부정적이었다 보니까 오세훈 시장 때 하기로 했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추진을 하지 않았던 거죠.

Q. 거기에다 고층 건물 세우겠다. 서울시는 이렇게 계획을 발표한 거죠?

오세훈 서울시장이 다시 돌아왔잖아요. 돌아오자마자 다시 속도를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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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의 특별한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Q. 용산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

19세기 말 일제강점기 시절 즈음부터 살펴봐야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조선시대 때도 여기에는 사람은 살고 있었고, 조선 후기 때부터 땅값이 이미 올라요. 서울 주변의 땅값들이 지금도 비싸듯이 이때도 집 가격이 굉장히 높았었던 지역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가 지금의 용산의 위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하는 건 안타까운 역사와도 연결되는데, 러일전쟁과 연결되거든요. 1904년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하죠. 그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 중요한 변화들이 몇 가지 있어요. 용산이랑 관련된 것 딱 하나만 얘기하라면 철도입니다.

원래는 경부선이 있었죠. 부산부터 서울까지 올라가는 경부선에 선을 하나 더 깔아요. 그게 경의선입니다. 경부선도 용산을 거쳐서 올라오기도 하지만 호남에서부터도 올라오죠. 여기서부터 출발해서 더 중요한 것은, 신의주까지 올라가는 열차가 하나 더 만들어지거든요. 러일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는 게 의미심장한 거죠.

Q. 일본이 용산을 북쪽으로 넓혀가는 발판으로 삼았다?

명확히 군사 목적입니다.

Q. 그곳을 출발 지점으로 삼은 이유는 한성과 가까워서인가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크게 두 개. 하나는 이미 용산역 인근에 일본 사람들이 많이 살아요. 일본에서 조선으로 넘어온, 상업이나 무역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삽니다. 이유는 명확하죠. 경인선이 들어오는 길목이기도 하고요. 이미 사대문 안에는 조선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까 그 외곽 쪽에서부터 조금씩 북진해서 올라가는데, 초창기에 많이 살았었던 곳이 지금의 용산역 인근인 거죠.

19세기 말부터 1904년 이전까지 한강을 끼고 있는 용산역 인근 땅들이 이미 일본인들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됐다가, 용산역이 만들어지면서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들을 정비하고 기차들을 만드는 공장이 필요하잖아요. 그 공장이 지금의 정비창입니다.

미군 부대가 빠진 그쪽은 일본군이 주둔하던 곳. 일본군을 태우고 출발해서 신의주·러시아·만주로 넘어가는 기차를 만들고 정비하던 곳이 지금의 정비창. 이렇게 나눠서 생각하시면 됩니다.

Q. 그때부터 용산은 온전히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땅이었네요.

그렇죠. 이미 1904년에 일본군들을 위한 공간으로 변화돼버렸으니까요.

러일전쟁 승리, 일제강점기 시작...용산은 어떻게 달라졌나

Q. 일제강점기의 시작... 용산은 어떻게?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둔 다음에 1910년 일제강점기가 되잖아요. 조금씩 기지를 넓혀갑니다. 일본군 기지들이 만들어지고 한쪽으로는 철도를 중심으로 한 공간이 만들어지고, 그 사이에 일본군과 관련된 사람들이 사는 곳이 용산입니다. 지금의 미군부대 쪽에 일본군부대가 있다면, 나머지 용산의 많은 땅들은 그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거주지가 될 수밖에 없었겠죠. 1910년 이후로는 거기가 다 거주 지역으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Q. 일본이 우리나라를 통치하는 데 필요한 행정·군사 인력이 용산에 많이 거주하게 됐다.

지금도 그 흔적이 많아요. 남영역이나 삼각지, 정비창 가보시면 일본식 주택이 남아 있고요. 당시 문화주택이라고 불린 고급 주거단지들도 중간중간에 있어서 아직도 일제강점기 흔적이 많은 동네죠.

어떻게 용산에 미군이 자리 잡게 되었나

Q. 그러다가 어떻게 미군이 용산에 자리 잡게 되었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고 한반도에서 빠지게 되잖아요. 9월부터 미군이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미군 입장에서는 (용산으로 오는 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거예요.

한국인에게는 기분 나쁠 수도 있지만, 미군이 바라봤을 때 조선과 일본을 굳이 구분하려고 하지 않아요. 미군 입장에서는 본인이 전쟁에서 승리한 거잖아요. 통치가 쉬운 곳에 자리 잡으면 되는 거거든요. 미군이 들어왔는데 가장 통치하기 쉬운 곳이 어디겠어요? 일본군이 주로 있던 곳이겠죠.

그래서 여기를 쓰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 미군이 잠깐 빠집니다. 주한미군사고문단이라는 500명의 미군을 제외하고 나머지 군은 일본으로 빠지거든요. 이 공간이 텅 비겠죠. 그 기간 동안 한국군이 쓰던 시절이 있어요. 2년이 채 안 됩니다. 한국전쟁이 곧 터지니까.

1948년부터 1950년까지는 국방부와 육군 부대 등의 부대들이 조금씩 들어오기는 했어요. 지금의 국방부가 용산에 있잖아요. 이때 들어왔었던 흔적이거든요. 그때부터 쓰기 시작했던 거죠.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지고 난 다음에 대규모 UN군이 들어오게 되고, 1953년 휴전 이후 미8군이 이 공간을 채우기 시작합니다. 어느 정도 규모였냐면, 세계에서 미군이 제일 많은 외국이었어요. 32만 명 정도 수준이었거든요. 그 정도 군이 한국 땅으로 들어와야 되다 보니까 넓은 부지가 필요했었고, 다양한 곳에 흩어져 있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땅은 용산이었고, 미군들이 여기를 오랜 시간 동안 점유해서 사용하고 있었던 땅이 되는 겁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용산 반환, 처음으로 누가 거론했나

Q. 용산 반환, 누가 먼저 거론했나?

당시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선거 공약으로 처음 꺼냅니다. '이 금싸라기 땅 가져오겠다' 용산은 서울에서 가장 가운데, 가장 알짜 땅입니다. 여기에 미군이 들어와 있다? 1990년대가 되면 한국은 어느 정도 중진국을 넘어서 선진국을 바라볼 때였고, 그 가운데서 군사적 주권 문제들이 논의되기 시작했던 때여서 '전시작전권이라도 가져와야 된다' 이런 논의를 하고 있을 때인데, 서울의 가장 한복판에 여의도만 한 땅을 미군이 차지하고 있다? 국민 정서상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이때부터 선거 때가 되면 한두 후보씩 꼭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 땅 반환할 거다'

그런데도 바로 미군이 빠질 수는 없었습니다. 일단 안보 문제에서 오랜 시간 동안 미군이 서울을 지키고 있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그 안정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국민들도 있었던 거죠. 미군이 있으니 서울이 안전하다는 느낌? '안보상 필요하다'는 것이 '그 땅 당연히 우리 땅으로 반환해야지'만큼 여론이 컸어요. 그런 여론도 비등비등했었기 때문에 바로 뺄 수는 없었고.

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되는 게 노무현 정권부터입니다. 지금의 평택 기지로 이전하겠다는 게 합의되고 평택 기지로 옮기는 과정을 이때부터 조금씩 한 거죠. 여의도만 한 땅에 있었던 미군이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게 1,2년 만에 될 수 있는 사업은 아니다 보니까 일부가 옮기고 옮기고 하는 과정을 거의 10년 넘게 계속하고 있는 거죠.

지금은 거의 다 빠졌고 조금씩 옮기고 있고, 2007년에 이 미군 부대 땅을 어떤 식으로 개발하겠다는 것도 결정은 났어요. '공원화를 하겠다' ' 한국의 센트럴파크를 만들겠다'

용산은 왜 한국의 센트럴파크가 되지 못했나

Q. 용산이 센트럴파크가 되지 못한 이유?

미군 부대가 있던 곳이다 보니까 땅이 굉장히 오염됐었던 거죠. 2007,8년 무렵 벤젠이 나오고 독극물이 나오고 이런 이야기가 나오다 보니 수질 평가나 토양 평가에서 도저히 공원으로는 불릴 수 없는 상태였던 거죠.

Q. 환경 문제가 공원이 바로 쉽게 안 됐던 첫 번째 이유. 두 번째 이유는?

부처 간의 이해관계가 복잡합니다. 반대라고 얘기하면 '우리 반대한 건 아니야'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달랐다'라고 표현하는 게 적합할 것 같은데, 여의도만 한 이 땅을 어떤 부처가 소유할 것인가? 어떤 부처가 개발의 주체가 돼야 될 것인가가 명확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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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지다'라는 입장에서 국토부. '이게 왜 국유지지? 여긴 서울시인데 시유지지'라고 하는 서울시. 국방부는 '이게 왜 너희들 마음대로 그렇게 돼? 여기는 원래 미군 땅이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섰을 때 국방부 있던 땅이야. 국방부가 관리해야지'. 문체부는 '여기는 역사적인 땅이야'. 이 공간을 개발하거나 활용하는 과정에 여러 국가기관들이 숟가락을 얹고 있는 거죠.

Q. 아직도 결론이 안 난 거예요?

공식적으로는 국토부 주관입니다. 국토부가 마음대로 밀어붙이기에는 애매모호한 땅이기 때문에 심포지엄을 계속 열어서 같이 논의를 해본다든가 하는 작업들을 오랫동안 하고 있는 거죠. 그러다 보니 속도가 안 납니다.

Q. 용산을 딱 봤을 때 뭔가 딱 달라진, 정리된 땅은 도대체 언제 볼 수 있는 건가요?

예측하기 힘들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죠. 무엇인가를 하더라도 일단 첫 번째 문제가 계속 걸리는 거예요. 환경평가 기준을 넘어서야 됩니다. 일단 그게 아직까지도 명확하지가 않고요. 두 번째는 서울 시민뿐 아니라 국민들도 '이 공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될까'라고 합의를 보는 게 어려울 거예요.

청와대에서 대통령실로 '용산 이전'은 어떻게 기억될까

Q. 최근에 용산 하면 또 빠질 수가 없는 게 대통령실 있었잖아요? 나중에 역사에서는 이렇게 기록될 거 아니에요? '윤석열 정부 때 갑자기 이전을 해서 여기까지 있었고 이재명 정부 와서 다시 여기로 옮겨졌다'라고 간단히 쓰일 텐데, 어떻게 평가가 나올까?

역사에서 기억되고 기록된다는 건, 지금 2026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이전 정권이 대단히 가깝고, 작년만 하더라도 하루하루가 10년 같았던 순간들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역사는 원래 긴 안목으로 보는 학문이거든요. 멀리 떨어져서 100년, 200년, 1천 년 뒤에 이때를 짠 하고 보면, 용산으로 옮겼었던 문제 같은 건 중간에 한번 삐끗했었던 해프닝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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