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25일, 뉴욕 카네기 홀.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손끝에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흘러나왔습니다. 아리아로 시작해 30개의 변주를 거쳐 다시 아리아로 돌아오는 골드베르크 변주곡. 작곡된 지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술적 완성도와 감정적 깊이로 인해 피아니스트들에게 넘어야 할 산으로 꼽히는 걸작입니다.
글렌 굴드는 약 70년 전, 22살의 나이로 카네기 홀에서 불과 몇 블록 떨어진 스튜디오에서 이 작품을 녹음했고, 이 음반은 전설로 남았습니다. 임윤찬은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왔던 이 작품을 카네기 홀 무대에서 연주했고, 이 실황이 2월 6일 음반으로 발매되었습니다. 임윤찬이 데카 클래식스에서 네 번째로 내는 앨범입니다. 임윤찬은 '이 곡을 음반으로, 그것도 카네기 홀 실황으로 낸다는 것은 피아니스트로서 가장 큰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임윤찬은 한국 기자들과 진행한 서면 인터뷰에서 '이 곡을 연주할 시기가 딱 다가온 것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8살 때 글렌 굴드의 바흐 음반을 모아놓은 박스 세트에서 처음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었습니다.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감탄했고, 그때부터 이 작품은 제 마음속에 늘 자리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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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삶의 여정과 같다사실 임윤찬에게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어린 시절부터 이어온 성장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중학교 1학년 때에는 스승인 손민수 교수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을 듣고 스스로 10번 변주까지 악보를 완벽히 외워와 스승을 놀라게 했다고 하죠. 당시 손 교수는 기초를 위해 잠시 멈출 것을 권유했고, 임윤찬은 내실을 차근차근 다지며 이 큰 산을 넘을 시기를 기다려왔습니다.
뉴욕 타임스는 카네기 홀 공연 이후 '공연이 진행되면서 임윤찬의 골드베르크는 깊이를 점점 더해갔다'면서, '임윤찬이 의도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 바흐의 여정을 한 젊은이가 성장해 가는 이야기로 바꿨는지도 모른다'고 평했습니다. 실제로 임윤찬은 아리아로 시작해 30개의 인간적인 노래가 나오고, 마지막에 다시 아리아가 돌아오는 구성에서 인간 삶의 여정을 떠올렸다고 말합니다.
"저에게 이 곡은 음악으로 들려주는 인간 삶의 여정입니다. 바흐가 그려낸 존재 자체의 이야기죠. 이런 작품을 연주하는 것이야말로 제가 음악을 하는 이유입니다."
임윤찬은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배우면서 '바흐는 우리의 가장 위대한 조상이며 원천이다'라는 말을 새삼 체감했다고 합니다. 그에게 이 작품은 '가장 인간적이고 장난과 유머가 가득한 곡인 동시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정 하나하나가 우러나오는 곡'입니다. 그런 면에서 임윤찬은 이 곡을 한없이 진지하게만 해석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 편이라 했습니다. 그는 특히 마지막 변주곡의 '쿼들리벳(Quodlibet. 널리 알려진 여러 선율들을 대위법으로 결합한 가볍고 유머러스한 음악)'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긴 여정의 끝에, 마지막 변주곡에 쿼들리벳을 배치하다니, 얼마나 인간적인지요. 그 구성에서 저는 어쩐지 통쾌함마저 느낍니다."
작년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임윤찬이 보여준 무대가 떠오릅니다. 거듭되는 커튼콜 끝에 피아노 앞에 다시 앉은 그는 음표 몇 개만 치고 퇴장했습니다. 다름 아닌 아리아의 베이스라인 음표들이었습니다. '이게 출발점이었다'고 일깨워주는 듯한, 앙코르 아닌 앙코르. 임윤찬의 장난기와 유머가 담긴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임윤찬은 바흐를 만난다면 같이 식사를 하고,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아 연주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 '친구들이나 선생님과 저녁을 먹으면서 음악뿐 아니라 스포츠, 미술, 사회 등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를 끝없이 할 때가 즐겁다'고 했습니다.
그의 마음 속 '골드베르크 변주곡'임윤찬은 기존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들 중에 어떤 것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모든 연주자의 버전을 다 들어봤는데, 곡을 깊이 공부하고 제 음악을 찾아가면서 궁극적으로는 제 마음속에 있는 골드베르크 변주곡만을 믿게 된 것 같습니다."
그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그 어떤 연주자와도 다릅니다. 연주할 때마다 또 달라졌습니다. 지난해 통영에서 만났던 지인이 '이전에도 임윤찬의 연주를 몇 번 들었지만, 공연마다 곡을 풀어가는 방식이 달라진다'며 놀라워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임윤찬은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을 깎아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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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국제음악제 다녀와서 쓴 칼럼 '우리는 임윤찬과 이하느리의 시대에 살고 있다'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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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또 다른 음악을 떠올리며 일어나는 것처럼, 매일매일 연습하면서 새롭게 찾아나가고, 깎고, 또다시 깎는 과정을 통해 그날그날의 골드베르크를 찾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22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이후 임윤찬은 '신드롬'급 인기를 누리는 스타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기록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근 소셜미디어를 통해 '지금껏 해온 음악을 완전히 바꾸려 한다'는 파격적인 선언을 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가 연주해 왔던 그야말로 모든 것들이 스스로 꼴 보기 싫어졌어요.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싫었습니다. 매일 새로운 음악을 찾고, 매일 연습하고, 매일 생각하고, 매일 노력하는데 너무 마음에 안 들 만큼 못 치니까요."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당시에도 '연습의 30%밖에 못했다'고 했던 임윤찬입니다. 그의 이런 '불만족'과 '자기 부정'은 절망이 아니라 성장의 과정일 것입니다. 그는 '이제는 조금 더 편하게 생각하는 동시에, 조금 더 '소울'을 담아서 살아가 보려고 한다'고 밝혔습니다.
음악으로 가득 찬 마음임윤찬은 지난해 게릴라 콘서트 수익 전액을 기부하며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이에 대해 '해야 할 일을 했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그는 음악 외의 것에는 욕심이 없습니다.
"제 마음은 이미 전부 음악으로 채워져서, 그 이상의 무언가는 저에게 과분합니다."
앞으로의 음악적 소망에 대해서는 너무 많아서 다 적기 어려울 정도라고 합니다. 다만 며칠 전 꿈에서 리사이틀을 했다며 1부에 쇤베르크의 '3개의 피아노 소품집, Op. 11', 바흐의 '파르티타 6번, BWV 830'을, 2부에는 베토벤의 '디아벨리 변주곡, Op.120'을 연주했던 기억이 난다고 했습니다. 꿈 속에서 했던 연주까지 이렇게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니 놀라웠습니다.
임윤찬은 올해 리사이틀에서 슈베르트와 스크리아빈을 연주할 예정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연주해온 곡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벅차다'며, '그 위대한 산들을 넘어오다가 다음엔 도대체 무엇을 연주해야 할지 모르겠더라'며 프로그램 선택에 고민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슈만과 브람스도 연주해 보고 싶었는데, 이 레퍼토리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신다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슈만의 판타지는 40살 이후에야 정말로 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제 마음에 있는 곡들을 고르게 되었습니다. 슈베르트와 스크리아빈은 워낙 어릴 때부터 마음 깊은 곳에서 노래되던 곡들이니까요."
임윤찬은 존경하는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유리 에고로프(Youri Egorov, 1954-1988)를 여러 번 언급한 바 있습니다. 에고로프는 소련 카잔에서 태어나 화려한 경력을 쌓았으나, 소련 체제의 예술적 제약과 동성애자로서의 억압을 견디지 못하고 1976년, 22살의 나이에 이탈리아 로마 공연 중 망명을 선택했고 암스테르담에 정착했습니다. 이탈리아 난민 수용소에서 쓴 그의 일기집은 고독 속에서 예술에 매달린 젊은 음악가의 내면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네덜란드에서 출간된 『Youri Egorov – His Complete Original Diary, Italy 1976』은 피아니스트 유리 예고로프가 1976년 이탈리아에서 망명을 신청한 뒤 난민 수용소에 머무르며 써 내려간 한 달간의 일기를 원본 그대로 담은 책입니다. 이 일기집은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되어, 음악과 삶의 자유를 향한 갈망과 두려움, 고독 속에서 예술에 매달린 젊은 음악가의 내면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에고로프는 1977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결선 진출에 실패했지만, 관객들의 열렬한 지지로 우승 상금과 같은 액수를 후원 받아 카네기 홀 데뷔 공연을 열었습니다. 그는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디누 리파티,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글렌 굴드 등의 영향을 받았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했고, 슈만, 드뷔시, 바흐 연주로 특히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는 33살의 나이에 요절했는데, 생전의 인터뷰에서 죽음을 예감하듯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제가 이 지구에서 사라지면 사람들이 저에 대해 나의 언어, 나의 통로인 음악으로, 시적인 의미에서 좋은 소리를 가진 피아니스트로 기억해주면 좋겠어요. 재능이 있는 사람은 다른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 있는데, 저도 이전에 살았던 많은 예술가들과 재능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죠. 또한 '저보다 앞서 걸어가는' 동시대 예술가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어요."
진리를 찾기 위해 전력을 다하다임윤찬은 에고로프를 단순히 뛰어난 연주자가 아니라, 음악과 삶을 분리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인 위대한 예술가로 바라봅니다. 에고로프처럼 '음악을 위해 산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고로프는 끝까지 투쟁해서 결국 진리를 찾은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죽기 전 그의 마지막 음악을 들어 보면, 끝까지 자기 음악을 매일매일 찾아 나가다가 결국 어느 한 극단에 있는 음악이 아니라 그 중심에 있는 자신의 것을 찾아서 연주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 사람은 매일 진리를 찾기 위해 전력을 다하다가 세상을 떠난 거니까요."
음악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에고로프의 생애는, 임윤찬에게 음악이 기술이나 커리어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임을 환기시킵니다.
"매일매일 음악을 찾아나가는 것이 진리"오랜 꿈이었던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이 발매된 지금, 임윤찬은 무언가를 '완성'했다는 성취감을 느끼고 있을까요?
"저에게 음악가로 산다는 것은 그저 매일 연습하면서 새로운 음악들을 발견하다가, 연주 당일이 오면 여태 내가 해 왔던 생각들을 무대에서 연주하고, 다음날 또다시 집에서 연습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무언가 완성했다기보다는 '그냥 계속 찾아 나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인터뷰 내내 임윤찬의 답변은 한결같이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저 매일매일 음악을 찾아나가는 것이 가장 진리이고, 제 마음에 있는 것을 믿고 따르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아리아로 시작해 먼 길을 돌아 다시 아리아로 돌아오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처럼, 임윤찬 역시 매일 연습이라는 시작점으로 돌아가 자신만의 진리를 깎아내고 있습니다. 그가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를 통해 들려준 성장하는 인간의 삶은, 어쩌면 임윤찬 자신이 매일 전력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