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스 앤 젠틀맨! 그리고 이런, 저런, 그런, 모든 사람들"
뮤지컬 '킹키부츠'(Kinky Boots)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말이다. 인간은 생물학적 차이에 따라 여성과 남성으로 분류되지만, 세상에는 두 개의 성(性)이 채 포용할 수 없는 여러 얼굴의 사람들이 있다. '이런, 저런, 그런'이라는 표현에 얼마나 많은 형용사를 압축하고 있는가를 상상해 보라. 공연에서는 이 대사를 막을 열거나, 관객을 맞이할 때 인사말처럼 사용한다. '당신과 나의 다름을 존중하고 환영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킹키부츠'가 궁극적으로 전하는 메시지기도 하다.
'킹키부츠'는 1980년대 영국 노샘프턴 브룩스 신발공장의 스티브 팻맨 (Steve Pateman)에게 일어난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 '킹키부츠'를 각색한 작품이다.
폐업 위기의 구두공장을 물려받은 찰리는 생각도 스타일도 전혀 다른 여장남자 '롤라'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남자가 신는 80cm 길이의 부츠인 '킹키부츠'를 함께 만들기로 한다. 그러나 킹키부츠 라인을 만드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가치관은 충돌하고 구두 작업에도 영향을 끼친다. 밀라노 슈즈 페어를 목표로 구슬땀을 흘리던 두 사람의 갈등이 폭발하고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하고 만다.
2013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킹키부츠'는 이듬해 한국에도 막을 올렸고, 관객의 뜨거운 성원 속에 최근 일곱 번째 시즌을 시작했다. 이제 막 10여 년이 지난 공연이지만, 스테디셀러를 넘어 레전드 반열에 올랐다고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제목이 가진 상징성을 생각해 보면 이 작품이 말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다. 킹키(Kinky)는 '성적으로 특이한'이란 뜻을 가진 단어고, 킹키부츠는 여장남자를 위한 하이힐 부츠를 일컫는다. 찰리는 킹키부츠의 제작을 틈새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아이디어로 접근하고, 롤라는 킹키부츠를 곧 자신의 개성이자 정체성의 발현으로 여긴다.
왜 신발이고, 부츠일까. 신발의 기능은 어딘가로 데려간다는 것이다. 즉 미지의 세계로의 당도, 도전과 같은 의미가 있다. 또한 부츠가 가진 상징에는 여성성과 섹시함이 있다. 기능과 미를 동시에 취할 수 있는 부츠는 찰리와 롤라를 한데 엮이게 했지만, 대하는 시선 차는 갈등을 유발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종국에 둘을 다시 화해하게 한 것도 부츠였다.
찰리와 롤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일견 닮았다. 두 사람 모두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아들이라는 결핍과 상처를 공유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들은 가족의 기대와 개인의 열망이라는 부조화를 극복하며 '나다움'을 만들어갔다.
'롤라'라는 캐릭터는 '킹키부츠'를 특별하게 한다. 드랙퀸은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편견과 고정관념이 있음을 알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Be your self"(나답게 행동해)를 외치며 인생을 당당하게 살아 나간다. 삶을 대하는 열정적인 태도와 긍정의 에너지는 상처와 역경을 극복하고 만들어낸 결과다. 이런 롤라를 바라보며 관객은 '너와 나의 다름'을 인정하고 '나다움'을 이해하게 된다.
뮤지컬은 장르 특성상 쇼적인 측면이 부각될 수밖에 없지만 '킹키부츠'는 메시지를 실어 나르는 이야기와 감정선을 자극하는 음악의 앙상블이 매우 유려하다. 여기에 원작의 특징을 무대에서도 효율적으로 되살려내며 관객의 몰입을 돕는다.
영화적인 요소가 뮤지컬과 만나 시너지를 낸다. 즉, 드라마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음악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일례로 찰리와 롤라가 밀라노행을 앞두고 싸우는 긴 갈등 파트에서는 두 배우의 연기력이 폭발한다. 중독성 강한 멜로디와 흥겨운 댄스도 없는 이 시간, 감정의 골의 폭발하며 극장의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든다. 이 장면은 후반부의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극대화하기 위해 건너야 하는 아슬아슬한 징검다리 같은 기능을 한다.
또한 영화로 치면 디졸브 방식으로 구현이 될 법한 롤라와 돈의 권투 대결 장면도 뮤지컬에서는 보기 힘든 구성(영화에서는 팔씨름 대결로 등장)이다. 뮤지컬은 영화의 고속촬영기법을 배우들이 슬로우 모션으로 재현하며 극을 긴장감을 일순간 웃음으로 전환시킨다.
신디 로퍼가 작곡한 음악은 그야말로 황금 넘버다. 디스코, 팝, 발라드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노래들은 복고 감성이 물씬 풍기면서도 트렌디하다. 또한 확실한 킬링 파트가 존재해 공연이 끝나고도 흥얼거리게 하는 마법을 발휘한다. 드랙퀸 롤라의 섹시함과 카리스마, 끼와 재능을 만끽할 수 있는 '랜드 오브 롤라(Land of Lola)'와 '섹스 이즈 인 더 힐(Sex Is in the Heel)은 관객의 어깨를 들썩이게 하고, 찰리의 희망찬 각오와 결연한 의지를 압축한 '스텝 원(Step One)'과 '소울 오브 어 맨(Soul of A Man)'은 감정선을 한껏 자극한다.
'킹키부츠'는 매 시즌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 배우들이 출연해 최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줬지만, 스타 탄생의 등용문 같은 역할도 해왔다. 강홍석은 2014년 초연 공연에서 롤라를 연기해 그해 한국 뮤지컬 어워즈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정성화는 이듬해 롤라로 무대에 올라 역시 남우주연상을 받다.
이후 시즌에 롤라로 활약한 최재림, 박은태, 서경수 등은 자신만의 개성을 더해 조금씩 다른 색깔의 룰라를 만들어냈다. 찰리 역에도 김무열, 김호영, 이석훈, 김성규, 신재범 등의 배우들이 활약하며 최고의 앙상블을 보여줬다. 또한 초연 때부터 활약한 한선천을 위시한 6명의 엔젤은 '킹키부츠'의 퍼포먼스를 축제의 장으로 만들어놓는다.
이번 시즌에 새롭게 합류한 백형훈과 이재환은 '킹키부츠'의 첫 무대라고 보기 힘들 만큼 당차고 노련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재환은 '아이돌 출신'이라는 타이틀이 꼬리표가 되지 않을 만큼 성장했고, 백영훈은 '롤라'를 통해 경력의 새 챕터를 열어젖힐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 이들은 첫 도전이 유발하는 긴장감을 신선하고 뜨거운 에너지로 바꾸는데 성공하며 뉴 제너레이션의 도래를 알렸다.
공연의 대미를 장식하는 넘버는 '라이즈 유 업'('Raise You Up')이다. 누군가 "네가 힘들 때 곁에 있을게. 삶이 지칠 때 힘이 돼줄게"라고 말해 준다면 이보다 더 든든할 수 있을까. 새해 벽두를 여는 기분 좋은 희망가다. 관객의 떼창과 환호를 유도하는 피날레는 이 공연의 백미다.
'킹키부츠'는 오는 3월 29일까지 샤롯데시어터에서 만나볼 수 있다.
* [틱틱붐]은 뮤지컬 '렌트'를 남기고 요절한 비운의 천재 작곡가 조나단 라슨의 유작 '틱, 틱... 붐!'에서 따온 코너명입니다. 공연에 관한 다양한 시선을 전하겠습니다.
(SBS연예뉴스 김지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