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분 없다"는데 김여정 뜬금없는 '선물'…러시아도 깜짝 [취재파일]

러 외무 대변인 "아는 사이 아냐"…깜짝 선물 건낸 북 속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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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에게 보낸 꽃병 선물(왼쪽). 자하로바 대변인은 답례로 김여정 부부장의 초상화를 선물했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새해를 앞두고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에게 대형 꽃병 선물을 보낸 사실이 러시아 측을 통해 공개됐습니다.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지난달 30일 텔레그램을 통해 모스크바 주재 북한 대사를 통해 선물을 받았다고 밝히며, 답례로 유명 화가에 의뢰해 김여정의 초상화를 제작해 보냈다고 전했습니다.

북러 간 밀착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김여정의 이런 선물 외교 행보는 이례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자하로바 대변인은 "선물을 보낸 것을 전날 저녁에야 알았다"고 밝혀 그 역시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는 또 김여정과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이도 아니라고 덧붙였습니다. 이런 설명들을 종합하면 김여정이 러시아 당국에 보냈다기보다는 개인에 보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그런데 친분도 없는 사이에, 직급 면에서도 차관급인 김여정이 타국 외교부 대변인에게 굳이 선물을 보낸 것은 어색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러시아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차원이라면 정상급 혹은 외교장관 채널을 통하는 것이 정석입니다. 그러므로 김여정이 굳이 그를 특정해 선물을 보냈다면 이는 해당 인물의 발언과 역할에 주목한 결과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하로바 대변인은 최근 북한을 강하게 옹호하는 발언을 잇따라 내놓으며 주목을 받았습니다. 지난달 21일 그는 한국 정부와 북핵 문제 협의를 물밑에서 진행했다는 언론 보도에 대해 전혀 근거 없는 '허위정보'라고 규정하며 북한 비핵화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했습니다.

"핵심은 무엇보다도, 이른바 '비핵화'라는 개념(the so-called de-nuclearisation)이 새로운 지정학적 현실 속에서 더 이상 어떤 의미도 갖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자하로바 대변인은 러시아에는 이른바 '북한 핵 문제'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해당 사안을 담당하는 대표나 창구도 지정된 바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더불어 서울-평양 관계에 대해 한국과 논의하지 않으며 양자 간 중재 의사도 없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비핵화를 '잠꼬대'에 비유하고 한국을 제1의 적대국으로 삼겠다는 북한에 힘을 실어준 것입니다. 북한의 주장을 외국 국가의 당국자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대변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중국도 지난해 11월 내놓은 군축백서에서 '한반도 비핵화' 표현을 삭제했지만, 외교부 브리핑을 통해서는 원론적이고 절제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크렘린궁 대변인 역시 북한, 남북 관계에 대해 자하로바 대변인만큼 노골적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주한 러시아 대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하로바의 '튀는 발언'들은 북한과 관련한 다른 이슈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재작년 12·3 계엄 직후에는 러시아 라디오 채널에 나가 "한국이 한반도 긴장을 초래하는 주체"라며 "북한이 왜 그렇게 열심히 자국 안보를 강화하고 있는지 분명해 진다"고 북한을 두둔했습니다. 지난해 9월에는 한미 연합훈련 을지 자유의 방패를 '또 다른 도발'로 규정했고 훈련 시행은 "북한과 대화를 추진하고 그 국가 체제를 존중하겠다는 미국과 한국 대표들의 발언을 부정하는 조치"라고 주장했습니다. 김정은이 공들여 개발한 원산갈마 리조트에 대해선 "환상적 휴양지"라고 추켜세운 뒤 "(북한은) 서방의 제재로 인간으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살아간다. 이것은 부당함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을 실감나게 한다(지난해 7월)"며 북한에 '존경심'까지 생긴다고 했습니다. 발화자의 이름을 가리고 봤다면 북한 매체에서 나온 주장이었다고 생각할 법 합니다. 그의 주장은 기존 북한의 시각과 거의 유사한 수준입니다.

외교가에서 자하로바 대변인은 '비외교적' 표현을 무기로 쓰는 독설가로도 유명합니다. 전 정권 시기의 일이지만, 지난해 2월 북한의 선제 핵 공격 관련 법제화를 비판한 한국 대통령의 발언에는, '발언이 편향됐다', '혐오스럽다'는 원색적 표현까지 동원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러시아 차관이 방한 중이었는데 우리 정부뿐 아니라 자국의 외교 차관조차도 이런 입장이 나올지 전혀 알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러시아 내부에는 북한과 계속 밀착해야 한다는 입장과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이후 경제적, 외교적 파장을 고려해 한국과의 관계를 관리해야 한다는 입장이 엇갈리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하로바는 후자보다는 전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정리하면, 북한은 자하로바 대변인을 자신들의 논리를 러시아 안팎에 효과적으로 전파할 수 있는, 활용 가치 높은 인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주요 국면에서 북한 속내를 전달하는 창구 역할을 했던 알렉산드르 마체고라 주북 러시아 대사는 지난달 6일 숨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여정이 자하로바 대변인의 올 한 해 '선전'을 기대하며 성의를 표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한편, 이번 깜짝 선물 행보는 김여정의 역할과 위상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김주애의 등장 이후 노동신문과 조선중앙TV 등 북한 대내 매체에서 김여정의 존재감은 거의 사라졌지만, 대외 정책에 있어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선물을 보낼 만큼 여전히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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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10일 주북 러시아 대사관을 찾아 별세한 알렉산드르 마체고라 대사를 추모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1일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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