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미애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왼쪽)과 천대엽 법원행정처장(오른쪽)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은 존 롤스(John Rawls)가 정의의 원칙을 주장하면서 사용한 개념이다. 특정한 정책의 선택을 둘러싸고 관련 이해당사자들이 어떠한 대안이 자신에게 유리하고 불리한지를 모르는 상황을 말한다. 정책이 수립된 이후 자신이 어떤 지위를 차지할지 모르는 ‘무지의 베일’에 가려진 상태,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 규칙’을 제정한다는 점 등을 조건으로 하는 ‘원초적 입장’에서 사람들이 규칙에 대해 합의한다면 공정한 정의의 원칙이 도출될 수 있다고 롤스는 주장했다.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의 저자인 롤스의 개념으로 글을 시작한 이유는 내란전담재판부법의 핵심 문제 역시 공정하고 정의로운 배당 원칙이기 때문이다. 어떤 판사에게 어떤 사건 재판을 맡길지를 정하는 행위를 ‘사건 배당’이라고 한다. 그런데 롤스가 설정한 조건 중 ‘무지의 베일’과 ‘일반적 규칙 제정’이라는 두 가지는 사건 배당이 공정하고 정의롭게 이뤄지기 위해서도 핵심적인 요건이다. 내란전담재판부법의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이 두 가지 요건을 무시함으로써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건 배당 원칙을 무너뜨린다는 점이다.
공정한 배당을 위한 2가지 원칙롤스가 정의의 원칙을 도출하기 위한 조건 중 일부로 설정한 ‘무지의 베일’과 ‘일반적 규칙 제정’에 해당하는 법원의 사건 배당 원칙은 무엇일까? ‘무지의 베일’은
⓵ 사건을 배당하는 규칙이 기소 등이 이뤄지기 이전, 즉 사건이 법원 접수되기 이전에 제정되어야 한다는 점(규칙 사전 제정 원칙)에 해당한다고 볼수 있다. ‘일반적 규칙 제정’은
⓶ 특정 사건에만 적용되는 규칙이 아니라 모든 사건 또는 일정 범주의 사건 전체에 적용되는 일반적 규칙이어야 한다는 점(규칙의 일반성 원칙)에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원칙은 헌법재판소 결정문과 헌법학 교과서에서 ‘헌법과 법률에 의해 임명된 법관에게 재판을 받을 권리’(헌법 제27조 1항)를 보장하기 위한 헌법적 원칙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헌법 제27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하여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헌법이 정한 법관이란, 법관의 자격을 갖추고(헌법 제101조 제3항), 물적 독립(헌법 제103조)과 인적 독립(헌법 제106조)이 보장된 법관을 의미하며(헌재 2000. 6. 29. 99헌가9), ‘법률’이 정한 법관이란 개별 사건을 담당할 법관이 법규범에 의하여 가능하면 명확하게 사전에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헌재 2019. 7. 25. 선고 2018헌바209 결정)
외부나 법원 내부의 압력·영향 등에 의하여 사건마다 임의로 법원을 구성하거나 사건을 특정 법원 또는 법관에게 맡긴다면, 사법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보장할 수 없다. [중략] 담당법관이 일반적으로 사전에 정해지는 것이 보장됨으로써, 사건에 따라 또는 소송당사자에 따라 법관이 사후에 임의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방지되는 것이다. (한수웅, 『헌법학(제14판)』, 법문사, 2025, 941면)
「헌법과 법률이 정한 법관」은 개별 사건을 담당할 법관이 법규범에 의하여 사전에 정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부의 세력이나 법원 내부의 압력·영향 등에 의하여 사건마다 임의로 법원을 구성하거나 사건을 특정 법원 또는 법관에게만 맡긴다면 재판의 독립성과 공정성은 보장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사건의 배당을 어떠한 방법으로 하느냐 하는 문제는 헌법적인 문제가 된다. (정종섭, 『헌법학원론』, 박영사, 2025, 889면)법원 '내부/'외부' 문제보다 근본적인 공정한 배당 원칙
내란전담재판부법에 대해 위헌 소지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법원 외부 인사가 배당에 개입하는 점을 핵심적 문제로 지적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외부 인사의 배당 개입은 헌법적 가치인 ‘사법의 독립’과 직결된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법원 외부 인사가 배당에 관여하느냐 법원 내부 인사가 관여하느냐보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배당의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한 요건이 지켜졌는지이다. 설사 법원 내부 인사가 배당을 결정한 경우라고 하더라도, 배당의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한 두 가지 원칙이 무시된다면 합헌성과 정당성을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표적 사례가 2008년 발생한 이른바 ‘제5차 사법 파동’이다. 신영철 전 대법관이 ‘촛불 집회’ 집시법 위반 혐의 사건 배당을 특정 판사에게 몰아줬다는 의혹과 관련해 발생한 사건이다. 2008년 6~7월경 당시 서울중앙지방법원장이었던 신영철 전 대법관은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소고기 수입 정책 등에 반대하며 벌어진 이른바 ‘광우병 촛불 집회’ 관련 사건을 특정 재판부에 몰아서 배당했다. 이에 서울중앙지법 형사 단독판사들은 2008년 7월 14일 ‘시국 사건을 특정 재판부에 몰아주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모아 신영철 전 대법관 등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신영철 전 대법관이 재판 개입 소지가 있어 보이는 이메일을 판사들에게 보내면서 논란이 더 커졌고, 언론에 의혹이 보도되자 대법원은 진상조사단을 구성했다. 진상조사단은 신영철 전 대법관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하며 특히 “특정 판사에게 배당을 몰아준 것도 사법행정권의 남용으로 볼 소지가 있다”고 결론 내렸다. 법원 내부 인사가 배당을 결정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공정한 배당을 위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면 공정하거나 정의롭다고 평가될 수 없다는 점을 신영철 전 대법관 사건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의회 다수파의 공정성 훼손도 문제가 되는 이유‘임의로’ 사건 배당을 몰아줘 문제가 된 신영철 전 대법관 사건과 법률을 제정해 특정 판사에게 사건 배당을 맡기는 내란전담재판부법은 경우가 다르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신영철 저 대법관의 경우에는 개인의 의사에 따라 임의로 배당을 정한 것이라서 문제가 되는 것이지만, 의회 다수파가가 다수의 의지를 반영해 법률을 만들어 사건을 배당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법률의 형식을 취한다고 해서 사건이 기소된 이후, 즉 ‘사후에’ 배당 관련 규칙이 만들어지는 것과 관련된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후적’ 배당의 문제점, 즉 특정인 또는 특정 세력의 의지가 배당 규칙에 반영된다는 내란전담재판법의 문제는 고스란히 남는다. 게다가 내란전담재판부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배당 규칙은 모든 사건 또는 일정 범주의 모든 사건에 적용되는 ‘일반적 규칙’이 아니다. “12·3 비상계엄 전후로 발생한 관련 사건”이라는 특정 사건에만 적용되는 규칙이다. 결국 ‘사후적으로’ ‘특정한 사건 배당을 위해서’ 만든 규칙은 특정 사건 처리 방향에 대한 특정 세력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법률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해도 공정하다고 평가되기 어렵다.
이는 ‘사후적’으로 규칙을 제정한 ‘특정 세력’이 ‘의회 다수파’일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물론 ‘의회 다수파’는 국민 다수의 의지를 대변한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포함해 민주주의가 정착된 대다수 나라의 헌법이 ‘사법의 독립’을 헌법적 가치로 보장하고 있는 것은 정치적 또는 사회적 ‘다수파’의 의지가 재판 결과를 결정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헌법이 보장하는 ‘공정한 재판’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이 악인(惡人)이든 선인(善人)이든 정치적·사회적 다수파가 재판의 결과를 좌우해서는 안 된다. 이를 막기 위해 미국 헌법 입안자들이 헌법 원리를 직접 설명한 『페더럴리스트 페이퍼』에서는 “다수의 목소리가 헌법에 대한 입법부의 침해를 부추길 경우”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서 “법관의 독립”이 필요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법원의 사명을 말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소수자 보호’에서 의미하는 ‘소수자’ 역시 이른바 ‘마이너리티(minority)’라고 불리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다수파가 입법부와 행정부의 권력을 차지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입법부와 행정부로부터 독립성을 보장받는 법원이 정치적 소수파의 법적 권리를 지켜줘야 한다는 것이 ‘소수자 보호’의 원래 의미에 가깝다. 의회 다수파라고 하더라도 공정한 배당 원칙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훼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헌법은 우리 편에 유리할 때만 지키면 되는 것이 아니다이외에도 내란전담재판부법에는 논란이 되는 대목이 적지 않다. 법무부장관 등 법원 외부 인사가 배당에 관여하는 것을 사법 독립 침해로 해석할 수 있는지, 특정 사건에 대해서는 피고인 구속기간을 특별히 길게 인정할 수 있다고 규정한 대목이 평등권 등을 침해하는 것은 아닌지, 법률에 의한 대통령 사면권 제한은 어디까지 가능한지, 전단재판부의 전속관할 규정과 기존 1심 재판부의 이송 여부 판단 재량 규정의 충돌하는 것은 아니지 등이 논란이 될 수 있다. 모두 가볍게 볼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나 사건 배당의 공정성을 근본적으로 깨뜨린다는 점이야말로 내란전담재판부법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이라고 볼 수 있다.
특정 사건의 재판 진행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의회 다수파가 언제든 사후적으로 새로운 법을 만들어 해당 사건을 누가 재판할지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는 헌정질서와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자리 잡은 곳이라고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란전담재판부법이 공정할 뿐만 아니라 합헌적이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지금부터 말하는 경우에 자신이 어떤 판단을 하게 될지 생각해 보자. 자신이 반대하는 세력이 의회 다수파를 차지하고 있고,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이 형사재판을 받고 있을 때, 의회 다수파가 1심 형사재판 개시 후 새로운 법률을 만들어서 해당 사건을 어떤 판사가 재판할지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을 공정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을 하지 못 하겠다면 내란전담재판부법의 문제점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재판의 공정성은 누가 선거에서 이겼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가치가 아니다.
헌법이 사법의 독립과 공정한 재판의 가치를 특별히 보호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헌법은 우리 편에 유리한 경우에만 지키면 되는 의미 없는 종이 쪼가리가 아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