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화오션과 한화시스템이 100% 지분을 보유한 미국의 필리조선소 전경
"한국 원자력추진잠수함의 미국 필리조선소 건조를 승인했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SNS 파장이 대단합니다. 환영과 기대가 많은 가운데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K-원잠의 길이 열렸다는 점에서 대환영이지만 각론에 들어가 보면 곳곳에 암초가 도사리고 있어서 우려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필리조선소에서 K-원잠을 짓는 것은 정부, 정치권 할 것 없이 대부분 '불가' 판정을 내리고 있습니다. 필리조선소 건조는 한국 기술로 한국 조선소에서 K-원잠 짓는 구상과 근원적으로 배치됩니다. 필리조선소가 미국 정부로부터 방산업체 지정을 받으면 미국의 각종 규제와 통제, 간섭, 그리고 고비용의 덫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거제나 울산의 조선소에서 K-원잠을 건조하는 것도 우울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원잠은 한국 정부나 업체 뜻대로 수출할 수 없는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해군용 4척 짓고 나면 판로가 막힙니다. 정부와 업체의 천문학적 액수의 시설 투자가 회수되지 않는 상황이 필연적으로 옵니다.
그렇다고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수 없습니다. 전문가 사회에서 똘똘한 대안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필리조선소든 미국의 다른 조선소든 원잠을 감당할 정도로 개조한 다음, 원잠을 무더기로 생산해야 하는 미국의 계획에 한국의 조선업계가 올라타는 것입니다. 한국의 조선이 미국의 글로벌 원잠 생태계에 편입된 상태에서 미국 원잠을 제작하면서 이를 통해 원잠 건조의 기술과 설비를 확보해 순차적으로 K-원잠을 짓는 것입니다.
일손 모자란 미국의 원잠 조선소미국의 원잠 건조 조선소는 코네티컷과 버지니아에 한 곳씩 있습니다. 두 조선소는 각각 2년에 1척의 속도로 잠수함을 건조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고작해야 두 조선소 합쳐서 1년에 1척 내놓는 꼴입니다.
미국은 호주에 버지니아급 원잠을 최대 5척 공급한다는 계획입니다. 코네티컷과 버지니아의 조선소들이 다른 일 하지 않고 꼬박 5년을 돌려야 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미국 해군의 버지니아급 원잠 확보 계획도 바쁩니다. 원래 40척 짓기로 했고 현재 24척 취역시켰으니까 앞으로 16척을 더 지어야 합니다.
버지니아급만 놓고 봐도 미국 잠수함 조선소들은 버틸 재간이 없습니다. 이에 더해 공포의 핵무기로 무장한 콜롬비아급과 차세대 전략핵잠수함도 지어야 합니다. 미국의 현재 조선업 상태로는 미 해군의 잠수함 프로젝트는 한여름밤의 꿈입니다. 실현하려면 잠수함 조선소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트럼프 대통령이 필리조선소를 원잠 조선소로 탈바꿈시키려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왕 차려진 밥상…'글로벌 원잠 생태계'로 크게 먹어야한미는 마스가(MASGA) 프로젝트를 진행할 것입니다. 미국 조선업 재건을 위해 1천5백억 달러(약 208조 원)의 조선 협력 펀드가 투입될 예정입니다. 필리조선소를 원잠 조선소로 개조하는 사업도 마스가의 일환으로 보면 됩니다. 원잠 모듈과 블록을 제작하는 미국의 협력업체들 확보에도 조선 협력 펀드를 활용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치면 미국 원잠 계획에 부응할 수 없습니다. 잠재력 큰 한국의 조선 협력업체들이 원잠의 모듈과 블록 생산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손재주와 속도가 뛰어나기 때문에 한국의 협력업체들이 맡을 블록 생산의 몫은 빠르게 확대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 과정에서 미국 원잠 건조 기술의 한국 전이가 동시에 이뤄질 수밖에 없습니다.
원잠의 밥상이 차려졌으니 한국의 조선업계가 우선 마스가를 업고 필리조선소를 기점으로 원잠 건조 기지를 구축해 미국의 버지니아급 잠수함 건조 프로젝트에 뛰어들 필요성이 상당합니다. 미국은 공급에 쫓기는 버지니아급을 충분히 만들 수 있고, 한국은 취약한 원잠 기술과 건조 설비를 폭넓게 확보할 수 있습니다. 한미 양측에 이익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한국 원잠의 필리조선소 건조 승인" 선언과도 부합합니다.
K-원잠은 필리조선소를 중심으로 버지니아급을 건조하면서 얻은 기술과 노하우, 그리고 한국의 모듈·블록 협력업체를 백분 활용해서 국내 조선소에서 건조할 수 있습니다. K-원잠의 완성도는 높이고 리스크는 줄이는 길입니다. 종합하면 한국의 조선업계가 글로벌 원잠 생태계에 들어가 미국 버지니아급과 K-원잠을 투 트랙으로 놓고 한미가 이인삼각으로 실컷 건조하는 방안입니다.
글로벌 원잠 생태계 편입 후 K-원잠 건조는 K-방산의 미래 먹거리로 손색 없습니다. 유지훈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이 "미국은 원자로와 핵연료 기술을, 한국은 잠수함 선체 설계와 조립 역량을 담당하는 분업형 협력체계"를 주창했는데 일맥상통합니다.
문재인 정부 후반기에 한국형 항모 개발 계획으로 시끄러웠습니다. "건조 비용 대비 효과가 낮다"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반론을 딛고 예산을 태울 수 있었던 논리는 "한국형 항모 지어서 해군력 강화하고 해외 수출해서 투자비 뽑자"였습니다. 재래식 항모는 수출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잠은 미국이 점지한 나라가 아니면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K-원잠 독자개발해도 수출 전망이 암담합니다.
필리조선소에서 K-원잠 짓는 구상에는 안규백 장관에 이어 위성락 안보실장도 부정적 의견을 냈습니다. 그렇다고 미국 조선업 부흥을 노래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덜컥 한국의 조선소에 원잠 건조의 길을 터줄 것 같지도 않습니다. 필리조선소가 아니면 미국의 다른 조선소가 대안이 될 터.
시야를 K-원잠으로 한정하면 필리조선소도 안 되고, 국내 조선소도 안 됩니다. 버지니아급과 K-원잠을 투 트랙으로 건조하는 글로벌 원잠 생태계 편입으로 시야를 넓히면 필리조선소와 국내 조선소 둘 다 없어서는 안 될 공생의 자산이 됩니다. 한미 양국 간 각종 협약 뿐 아니라 미국 국내법도 손봐야 할 테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지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부승찬 민주당 의원은 "천재일우의 기회인만큼 트럼프 대통령 임기 내에 못을 박아야 한다", "글로벌 원잠 생태계 편입은 발전적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