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세계의 주인'이라는 영화 제목은 세계 안에 속한 주인공을 뜻하기도 하고, 주인공을 둘러싼 세계를 지칭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은 홀로 살아가지 않고 끊임없이 누군가와 관계 맺음 속에서 성장하고 나아간다.
고등학생 '주인'(서수빈)은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많다. 최대 고민은 연애 문제, 남자친구와의 관계가 좀처럼 쉽지 않다.
어느 날 반 친구 '수호'는 출소하는 아동 성폭행범의 동네 주거를 반대하는 서명을 받으러 다니기 시작한다. 전교생이 이미 서명을 마쳤지만, 주인은 거절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 수호가 설득을 시도하자 주인은 '피해자의 영혼을 파괴하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문구에 동의할 수 없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이 실랑이 이후 주인에게 발신자를 알 수 없는 익명의 쪽지가 배달되기 시작한다. 동시에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던 주인의 삶에도 파동이 일기 시작한다.
'세계의 주인'은 자신의 세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한 소녀의 성장담이다. 윤가은 감독은 '우리들'(2016)과 '우리집'(2019), 두 편의 영화를 통해 아이들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관계와 성장에 관한 섬세한 드라마를 써낸 바 있다. 세 번째 장편 영화에서는 어린이가 아닌 10대 소녀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성폭력 피해자를 다룬 영화들은 고통스러운 과거와 과거가 남긴 트라우마를 그리는 데 집중했다. 과거와 과거가 영향을 끼친 현재로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불가피하게 피해자의 피해를 묘사하고, '사건의 진상'에 집중하는 연출을 보여줬다.
'세계의 주인'은 아동 성폭력 피해자의 '현재'와 '지금'을 그린다. 10대 후반의 소녀가 겪는 첫사랑의 성장통과 진로에 대한 고민, 가족과의 갈등, 친구와의 우정과 균열 등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며 주인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삶의 지도를 펼쳐 보인다.
보여주는 것과 보여주지 않는 것이 명확하다. 주인은 타인의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 자신의 깊은 상처를 꺼내보여야 하는 상황에 놓이지만 영화는 주인에게 일어난 일이 어떤 것인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도, 설명하지도 않는다. 또한 주인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설정도 나오지만 그것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감독의 선택을 관객은 영화의 미스터리로 생각하고 짐작해 보지만 헛된 노력이다. 이 영화가 주목한 건 주인의 과거가 아닌 주인의 현재기 때문이다. 감독이 그토록 많은 비중을 할애해 주인의 현재와 일상을 그리는데 집중한 건 '내가 나로 살아가는 삶'을 만들어가고 있는 인물의 단단한 내면과 성장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티 없이 밝고 건강한 주인을 보면서 관객 역시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듯 함께 '까르르' 웃게 된다. 그러다 반 친구와 벌인 사소한 실랑이, 그 이후 배달되는 쪽지의 언어들로 인해 물음표가 발생한다. 특히 고백인지 장난인지 헛갈리게 한 주인의 한마디는 그녀의 눈부셨던 밝음에 의심의 눈초리까지 보내는 결과로 이어진다.
영화에서 '쪽지'는 주인의 심리를 자극하고 상처에 소금을 붓는 트리거 기능을 한다. 보이지 않는 빌런처럼 여겨졌던 쪽지의 발신자를 끝까지 공개하지 않음으로써 연출의 목적은 분명해진다.
'쪽지'는 언뜻 주인과 동일한 아픔을 겪은 어떤 이의 질타처럼 보이지만 그것에 머물지 않고 보다 광범위한 기능을 한다. 이는 반 아이들과 관객까지 포함하는 우리 모두의 시선이다. 이 시선에는 피해자에 대한 고정관념 혹은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폭력성도 내포하고 있다.
또 다른 면도 있다. 엔딩에서 이 쪽지의 발화를 특정인이 아닌 반아이들의 목소리로 읊으면서 주인을 향했던 시선의 폭력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낸다.
'세계의 주인'은 윤가은 감독의 한층 진화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진짜 같은 인물과 삶을 포착하는 시선은 선명하고, 인물의 눈높이에서 화두를 던지는 사려 깊음이 돋보이며, 관객의 다채로운 사유를 끌어내는 너른 포용력까지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주인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사건 그 자체에만 집중해 관심 가지지 않았던 피해자의 '회복'과 '행복'을 언급한다. 또한 여전히 고정관념과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시선에 싸워야 하는 인물의 힘겨운 순간들도 그려내 '나' 그리고 '우리'를 되돌아보게끔 한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