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쇼팽 콩쿠르는 어떻게 '최대 콩쿠르'가 됐을까


지금 국회를 출입하고 있다. 국회의 말은 늘 살벌하다. 진영 양극화 한복판, 정치인도 지치겠지만 거친 말을 받아치는 기자도 기가 빨린다. 그나마 기자실에서 틈을 내 이어폰 꽂고 음악 듣는 게 치유책이라면 치유책이다. 자질 없는 기자가 고약한 하루를 버텨내는 나름의 생존 방식이랄까.

혼자 듣고 마는 내향성 취미라지만, 요즘 만큼은 누군가와 교감하고 소통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지금 5년에 한 번 열리는 음악계 최대 축제, 쇼팽 콩쿠르가 열리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나라의 이혁·이효 형제가 3라운드에 진출했다는 소식에 신도 난다.

콩쿠르의 콩쿠르, 세계 최대 콩쿠르. 예술에 위계어를 쓰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만, 어떤 전문가도 이 수식어에 토를 달지 않는다. 쇼팽 콩쿠르는 음악계 최대 축제인 동시에, 명실상부 현대 피아니즘의 산파 역할을 했다. 2000년 임동민·임동혁 형제의 3위 수상을 시작으로, 2015년 조성진이 우승을 거머쥐며 한국과 인연도 깊다.

하지만, 여기서 나오는 질문. 쇼팽 콩쿠르는 왜 '세계 최대'라고 불릴까. 피아노 잘 치는 사람 순위 매겨 솎아 내는 행사일 뿐인데, 음악계는 왜 이렇게 열광하고 환호하는가.

좀 더 본질적인 질문. 권위 있는 콩쿠르, 명망 있는 콩쿠르란 무엇인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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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쇼팽 콩쿠르 3라운드에 진출한 이혁(오른쪽)·이효 형제. (자료 : 쇼팽 콩쿠르 홈페이지)
① 첫 번째 조건 : 콩쿠르 이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시작한다. 권위 있는 콩쿠르 그 첫 번째 조건. 유명한 작곡가 혹은 연주자 이름이 붙어 있다면, 권위가 높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농담 반 진담 반이다. 가볍게 시작하자는 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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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 우스갯소리 뒤에 깔린 역사적 배경을 톺아 보면 마냥 가볍지 만은 않을 것 같다. 극단으로 치달았던 제국주의, 그렇게 발화한 참혹한 세계 대전과 식민지 해방, 전쟁의 비극이 채 식기도 전 지구를 두 동강 냈던 냉전까지, 상당수 권위 있는 음악 콩쿠르는 20세기 역사의 질곡을 숙주 삼아 탄생했고, 성장했으며, 권위를 얻었다.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좌우 이념은 격변의 20세기를 규정하는 이데올로기 그 중심에 있었다. 예술은 이데올로기가 흐트러지지 않게 다잡는 유용한 도구가 됐다. 가령, 우리 민족, 우리 국가를 상징하는 위대한 예술가는 공동체를 똘똘 뭉치게 만드는 정치적 선각자로 승격됐다. 통치자들은 위대한 예술가를 기리는 대규모 행사를 필요로 했고, 그의 이름을 딴 경연대회는 꽤 매력적인 정치적 기획이 됐다. 어쩌면 예술과 프로파간다는 한 끝 차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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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첫 국가원수인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자료 : 영국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홈페이지)

그 정점에 쇼팽 콩쿠르가 있었다. 프레데릭 쇼팽은 폴란드 음악 그 자체였다.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 받는 피아노 작곡가가 폴란드인이라는 민족적 자부심은 폴란드 정치가들에게 좋은 통치 수단이 됐다. 폴란드의 첫 국가원수인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쇼팽을 기리는 대규모 예술 행사의 정치적 쓰임새를 잘 알고 있었다. 폴란드 예술의 위대함을 통해 애국심을 고취하고 공동체 결속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었다. 1927년 그렇게 쇼팽 콩쿠르의 막이 올랐다.

쇼팽 콩쿠르는 폴란드를 도덕적으로 치유하겠다는 피우스트스키 정권의 '사나치아' 운동과도 맞닿아 있었다. 사나치아는 권위주의 독재를 정당화하는 '어용' 이념에 가까웠다. 피우수트스키 정권은 의회민주주의를 부정했다.

위대한 폴란드 작곡가를 홍보하고 축하하기 위한 경연대회 아이디어는 피우수트스키가 시작한 사나치아 시대 초기의 정치적 분위기에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 사나치아는 좁은 의미의 정치를 넘어 '국가를 정화하고 개혁하며 강화한다'는 광범위한 지지를 통해 도덕적 쇄신과 국가 정체성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 리사 맥코믹 <쇼팽의 포고렐리치 : 콩쿠르 스캔들의 사회학> 60쪽, 더 쇼팽 리뷰,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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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제3회 쇼팽 콩쿠르. 당시에는 연주자 가까이 심사위원들이 앉아 있었다. (자료 : 쇼팽 콩쿠르 홈페이지)

쇼팽 콩쿠르는 순수한 의미의 음악 경연대회를 넘어 국가 이데올로기 전략과 맞물려 있었고, 폴란드의 예술적 역량이 한데 모여 결집된 형태로 나타났다. 공동체의 광범위한 지지와 함께 공적인 권위를 얻었다. 행사 규모는 커졌고 미디어 발달과 맞물리며 유명세를 떨쳤다. 우승자를 배출한 국가들 역시 '자부심'으로 호응했다. 국가 대항전 올림픽처럼, 마치 국력의 척도처럼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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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의 '쇼팽 콩쿠르'에 대한 설명에는 역대 국가별 순위가 매겨져 있다. 올림픽처럼 금, 은, 동메달을 집계하는 식. 콩쿠르를 탄생시킨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의 잔재 임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 아닐까. (자료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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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 콩쿠르 역시 비슷한 역사적 배경을 안고 있었다. 냉전의 그림자였다. 지금은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서구 연주자들이 대대적으로 보이콧하면서 빛이 바랬지만, 한때는 쇼팽 콩쿠르와 함께 20세기 콩쿠르를 양분했을 정도로 위세가 높았다.

미국과 소련의 경쟁은 군비 출혈에 그치지 않았다. 1957년 10월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한 소련은 미국을 앞섰다는 기술적 우월감에 더해, 문화적 우월감으로 그 기세를 이어가고 싶어 했다. 그렇게 러시아 음악의 상징적 존재, 차이콥스키의 이름이 소환됐고, 그의 이름을 딴 콩쿠르가 기획됐다.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막이 오른 건 그 이듬해인 1958년이었다. 위대한 예술가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냉전의 최전선 그 선봉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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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회 차이콥스키 콩쿠르 개막식. (자료 : 글린카 박물관 홈페이지)

러시아에 차이콥스키 콩쿠르가 있다면, 미국에는 반 클라이번 콩쿠르가 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대한 반작용으로 북미 최대 반 클라이번 콩쿠르가 탄생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는 2022년 임윤찬이 만장일치로 우승하면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반 클라이번은 1958년 제1회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였다. 미국 피아니스트가 소련 적진 한 가운데서 경쟁자를 물리치고 우승 메달을 걸었다는 사실은 미국인들을 흥분시켰다. 당시 소련 당국은 미국 연주자 우승 여부를 두고 고민이 많았지만, 관객의 열광적 지지에 우승을 주지 않고는 배겨내기 어려웠다. 그의 결선 연주가 끝난 뒤 8분 동안의 기립 박수가 쏟아졌다. 당시에는 콩쿠르 입상자 발표 전 국가의 승인이 필요했다. 심사 위원들이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흐루쇼프에게 미국인의 우승에 대한 의사를 묻자, "반 클라이번이 최고인가? 그렇다면 그렇게 하라."고 답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19개국에서 온 50명의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참가한 예선전에서, 반은 관중의 대대적 환호를 받았다. 팬들은 그를 반유샤라고 불렀다. 여성팬들이 그의 호텔까지 쫓아갔다. 소련 음반사들은 그에게 무엇이든 녹음해 달라고 청했다. 결승전에서 그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의 마지막 음을 터뜨렸을 때, 모스크바의 열광적인 청중들은 '우승! 우승!'을 외쳤다.
- 미국 매거진 라이프(Life), "저기에 미국인들, 여기 러시아인들" 1958년 4월 28일.

반 클라이번은 소련의 문화적 기획을 초라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예술 이상의 정치적 존재로 격상됐다. 미국 타임지 1958년 10월호는 표지 기사에서 반 클라이번을 "러시아를 정복한 텍사스인"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단순한 콩쿠르 우승자가 아닌, 소련을 정복한 전쟁 영웅에 가까웠다.

미국은 이 영광의 순간을 계속 기억하고 싶어했다. 4년 뒤, 이 젊은 피아니스트의 이름을 딴 반 클라이번 콩쿠르가 만들어졌다. 역사적인 작곡가나 거장급 연주자가 아닌, 막 커리어를 시작한 신인 연주자의 이름으로 명명한 콩쿠르는 음악사에서 반 클라이번이 유일하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28세였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는 공동체의 전격적인 지지에 힘입어 몸집을 키웠다. 거액의 기부금도 몰렸다. 특히, 세계 최대 클래식 시장인 미국은 자신을 한 수 아래로 봤던 클래식의 본고장 유럽의 시선을 불편해 했던 터라, 이에 대항하는 괜찮은 수단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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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이 1958년 제1회 차이콥스키 콩쿠르 참가 당시 연주를 하는 모습. 소련 관객들이 팬심 가득한 얼굴로 그의 연주를 지켜보고 있다. (자료 : 반 클라이번 재단)

20세기를 달궜던 제국주의와 냉전의 역사는 끝났다. 권력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설계된, 정치 기획으로서의 콩쿠르 경향성은 약화됐다. 이제 콩쿠르는 대부분 사적인 재단에서 주최하고 시상한다. 

다만, 그 권위의 잔재는 관성처럼 남아 대형 콩쿠르라는 상징성을 유지하고 있다. 쇼팽 콩쿠르는 여전히 폴란드 예술 담당 정부 부처 문화유산부의 지원을 받는 국가 축제다. 폴란드 대통령이 직접 나와 수상자 메달을 걸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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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1년 18회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캐나다의 브루스 리우. 당시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이 직접 시상하고 있다. (자료 : 쇼팽 콩쿠르 홈페이지)
② 두 번째 조건 : 넉넉한 상금

콩쿠르와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의 상관 관계를 지난하게 풀어냈으니, 이제는 20세기를 규정하고 있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 자본주의 이야기를 할 차례다. 

권위 있는 콩쿠르의 두 번째 조건. 상금이 많으면 권위 있는 콩쿠르일 가능성이 높다. 예술과 돈, 별로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쩌면 당연한 말이다.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앞서 말한 대로 콩쿠르 사적 재단에서 운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들어가야 할 돈이 한 두 푼이 아니다. 경연장 대관하고, 심사위원 섭외하고, 꽤 높은 사례비도 줘야 한다. 연주 잘 한 수상자에게는 상금도 지급해야 한다. 이 뿐 아니다. 좋은 인재들 많이 참여 시키려면 부담을 낮춰야 하니 숙박비를 제공하기도 한다. 쇼팽 콩쿠르는 참가자들에게 숙박비는 물론 여비를 지원해주고 있다.

하지만, 콩쿠르는 이윤을 창출하는 수익 사업이 아니다. 부가가치 없는 비용들 투성이다. 그렇다면, 그 돈을 어떻게 충당할까. 바로 스폰서다.

쇼팽 콩쿠르는 그야말로 스폰서의 향연이 펼쳐진다. 폴란드의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의 협찬 올림픽 같다고나 할까. 동유럽 최대 석유 회사인 PKN 올렌(PKN Orlen)을 비롯해, 복권회사인 토탈라이저 스포토비(Totalizator Sportowy), 폴란드 국적항공사인 LOT 폴란드 항공 등 동유럽 유명 대기업이 포진해 있다. 

글로벌 기업들도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쇼팽 콩쿠르의 기술 파트너는 구글이다. 일본의 자동차 브랜드 렉서스, 유명 피아노 제작사들도 협찬에 열심히다. 기업들은 바보가 아니다. 쇼팽 콩쿠르 주목도가 높으니, 그만큼 홍보 효과가 크다는 계산이 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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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5년 쇼팽 콩쿠르 당시 스폰서십. (자료 : 쇼팽 콩쿠르 홈페이지)

권위 있는 콩쿠르일 수록 후원이나 협찬이 많아지고 덩달아 씀씀이가 커진다. 큰 시장에 사람들이 많이 꼬이듯 돈이 몰리고 수상자의 상금은 높아진다. 결국, 상금은 콩쿠르의 규모와 권위를 가늠할 수 있는 리트머스지다. 

권위 있다고 알려진 콩쿠르의 상금을 정리했다. 입상할 경우 우리나라에서 병역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피아노 콩쿠르만 따로 뗐다. 정부에서 나름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영향력 있는 콩쿠르를 꼽아 혜택을 주는 것이니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이들 콩쿠르의 우승 상금은 적게는 우리 돈으로 수천 만 원, 많게는 1억 원을 넘나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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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병무청 예술·체육요원 편입인정대회, 각 콩쿠르 홈페이지

쇼팽 콩쿠르, 그 호화로운 협찬의 상징적 장면은 피아노 회사들의 치열한 스폰서 경쟁이다. 대회 참가자들이 연주하는 피아노를 제공해주는 협찬이다. 언뜻 보면 피아노 한 두 대 대주는 게 뭐 그리 대단한가 싶지만, 참가자 입장에서는 어떤 피아노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연주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 피아니스트의 이름 옆에는 연주자의 국적과 함께 연주하는 피아노 상표가 소개되는데, 피아니스트의 이름과 국적 만큼이나 중요한 정보란 의미다. "이혁, 대한민국, 스타인웨이" 이런 식으로. 

쇼팽 콩쿠르 규정을 보면 주최 측의 콧대가 얼마나 높은지 가늠이 된다. 피아노만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그 외 들어가는 비용 모두 너희가 알아서 대라는 식. 마치, 너희 아니라도 협찬해 줄 곳 많다는 으름장같달까.

<제19대 쇼팽 콩쿠르 규정> 11항  
피아노 회사들은 피아노를 자비로 제공하고, 서비스해야 한다. 이는 콩쿠르 연주 도중에 사용될 때는 물론, 콩쿠르 주최 측이 진행하는 모든 절차 모두에 적용된다.
(자료 : 쇼팽 콩쿠르 홈페이지)

올해 콩쿠르에서는 미국과 독일에 거점을 둔 피아노 회사 스타인웨이(Steinway) 두 대를 비롯해, 일본의 야마하(Yamaha), 시게루 가와이(Sigeru Kawai), 이탈리아의 파지올리(Fazioli), 그리고 독일의 C. 베히슈타인(C. Bechstein)이 협찬 브랜드로 나섰다. C. 베히슈타인 피아노는 한동안 쇼팽 콩쿠르에서 자취를 감췄다가 수십 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랐다. 

참가자들은 콩쿠르 시작 전 자신이 연주할 피아노를 선택한다. 쇼팽 콩쿠르 규정상 주어진 시간은 딱 15분. 음색을 꼼꼼히 확인하라는 취지인데, 당초 자신이 선호하는 브랜드를 정해 두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피아노 브랜드들은 콩쿠르 참가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피아노로 연주시키기 위해 사활을 건다. 특히, 요즘 같이 유튜브 생중계로 쇼팽 콩쿠르 전 과정을 볼 수 있는 시대, 그런 경향성은 더 커졌다. 자신들의 피아노를 선택하면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매장 연습실은 물론, 호텔에서 이동할 차량 픽업 서비스, 식사까지 제공해 준다는 식이다. 피아니스트에게 가장 환영받는 브랜드 스타인웨이는 상대적으로 그 혜택이 덜하다. 지난 18회 쇼팽 콩쿠르에서는 75%가 스타인웨이를 택했다. 많은 피아니스트가 선택하다 보니 혜택은 분산될 수밖에 없다.

스타인웨이의 독주가 깨진 건 지난 2010년이었다. 당시 우승자 러시아의 율리아나 아브제예바는 일본 야마하 피아노로 우승한 첫 피아니스트였다. 스타인웨이가 아니어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는 선례가 만들어졌다. 야마하의 몸값은 치솟았고, 대단한 홍보 효과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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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콩쿠르에서는 미국과 독일에 거점을 둔 피아노 회사 스타인웨이(Steinway) 두 대를 비롯해, 일본의 야마하(Yamaha), 시게루 가와이(Sigeru Kawai), 이탈리아의 파지올리(Fazioli), 그리고 독일의 C. 베히슈타인(C. Bechstein)이 협찬 브랜드로 나섰다. (자료 : 쇼팽 콩쿠르 홈페이지)

2015년에는 조성진이 다시 스타인웨이로 우승했지만, 코로나로 1년이 연기된 2021년 콩쿠르에서는 캐나다의 브루스 리우가 파지올리 피아노로 포디움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다른 피아노 브랜드에 비해 역사도 짧았던 파지올리는 상상 이상의 주목을 받았다. "파지올리가 우승했다"는 언론 보도까지 나왔다. 당시 결선 무대에 시게루 가와이 연주자도 3명이나 있었다. 반면, 당시 2010년 우승자를 배출했던 야마하는 단 한 명의 결선 연주자도 배출하지 못했다. 

올해 쇼팽 콩쿠르는 84명의 참가자 가운데 스타인웨이를 선택한 연주자가 43명으로 가장 많았다. 51% 수준으로 지난 콩쿠르 75%에 비해 크게 줄었다. 반면, 22명이 시게루 가와이를, 10명이 파지올리를 골랐다. 야마하는 7명에 불과했다. 간만에 협찬 브랜드로 나선 C. 베히슈타인는 딱 2명이 선택했다.

이렇게 연주자들뿐만 아니라 기업들도 치열한 협찬 경쟁을 펼치는 비즈니스 공간, 이게 쇼팽 콩쿠르다.

③ 세 번째 조건 : 화려한 부상

대회 나가서 잘 하면 상금과 부상이 주어진다. 상금에 대해 말했으니 이젠 부상을 말할 차례.

권위 있는 콩쿠르의 세 번째 조건. 화려한 부상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부상은 냉장고와 세탁기 같은 현물이 아니다. 콩쿠르 부상은 보통 입상 이후 주어지는 '연주 기회'를 칭할 때가 많다. 그리고 피아니스트 입장에서는 거액의 상금보다, 이 기회가 천금보다 소중하다.

콩쿠르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콩쿠르를 올림픽과 비유하기도 하지만, 커리어의 종착역이 금메달인 스포츠와는 또 다르다. 치열한 콩쿠르 경쟁을 통과하고 나면, 프로 세계의 경쟁이 기다리고 있다. 이 경쟁은 훨씬 치열하다. 콩쿠르는 또래 연주자들과 자웅을 겨루지만, 프로의 세계는 예프게니 키신, 다닐 트리포노프, 랑랑과 같은 정상급 연주자들과 비교 당하고 평가 당해야 한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이나 블라디미로 호로비츠처럼 역사가 기억하는 거장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칠순, 팔순까지 분투 연습하고 갈고 닦아야 한다. 예술은 그래서 끝이 없다.

하지만, 콩쿠르에서 우승했다고 연주 기회가 자동적으로 주어지지는 않는다. 제 아무리 콩쿠르 우승자라도 기회를 별로 얻지 못하는 연주자들도 즐비하다. 콩쿠르 우승으로 화려하게 데뷔하고 이내 사그라지는 연주자가 어디 한 둘인가.

이런 면에서 권위 있는 콩쿠르는 충분한 연주 기회로 연주자들의 걱정과 불안을 덜어준다. 물 들어왔을 때 노를 젓게 해주는 콩쿠르라면 출중한 연주자들 사이에 입 소문이 나고, 참가율이 높아지며 콩쿠르의 권위는 올라간다.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면 음악계에서 격이 다른 대접을 받는다. 전 세계 음악계가 쇼팽 콩쿠르 우승자 연주 한 번 들어 보겠다며 섭외에 공을 들인다. 먼저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쇼팽 콩쿠르 입상자 갈라 콘서트로 포문을 연다. 주목도가 더 높아지면 뉴욕 카네기홀이나 영국 위그모어홀 같은 유명 공연장의 리사이틀 요청이 잇따르고, 세계 유명 오케스트라의 협연 요청도 들어온다. 메이저 음반사와의 계약도 수월해진다. 그렇게 커리어를 차곡차곡 쌓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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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쇼팽 콩쿠르 우승 이후, 자신의 시대를 알린 조성진. (자료 : 쇼팽 콩쿠르 홈페이지)

2015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이 딱 그런 사례다. 쇼팽 콩쿠르 우승 이후 몇 년 치 연주 일정이 빼곡히 찼다. 세계 최대 클래식 음반사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쇼팽 콩쿠르 실황 음반을 발매한 데 이어, 이듬해 아예 전속 계약을 맺었다. 그 다음 해에는 미국 카네기홀에 데뷔했다. 세계 유수 오케스트라의 부름을 받더니, 오케스트라 양대 산맥 베를린 필과 빈 필과 협연했고, 지금은 아예 베를린 필 상주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다. 클래식 통계 웹사이트인 바흐트랙(bachtrack.com)은 조성진을 세계에서 가장 바쁜 피아니스트 수위에 올려놓고 있다. 2023년 3위, 2024년에는 5위였다. 부침 없는 조성진의 안정적 피아니즘이 그 중심에 있겠지만, 이 화려한 커리어의 시작이 쇼팽 콩쿠르 우승임을 부인할 수 없다. 조성진의 쇼팽 콩쿠르 우승 소감은 "이제 더는 콩쿠르에 나가지 않아도 돼 기쁘다"였다.

2022년 임윤찬이 우승한 반 클라이번 콩쿠르는 현란한 부상으로 유명하다. 일단, 3위 입상자까지 전미투어의 기회를 주고, 심지어 입상 이후 3년 동안 맞춤형 관리를 해준다. 마치 연습생이 대형 기획사로 직행하는 과정과 같다고 할까. 여기에는 보도자료 배포나 홍보 영상 제작 등이 포함된다. 레코드 라이브 앨범 발매, 우승자에게는 연주회에서 입을 의상까지 제공한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 대한 피아니스트들의 선호도가 유독 높은 이유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자 부상>
- 미국 및 세계 콘서트 투어를 포함한 3년간의 개인 맞춤형 경력 매니지먼트
- 플래툰 레코드 라이브 앨범
- 보도자료, 영상, 웹사이트를 포함한 홍보
- 니만 마커스에서 제공하는 연주회 의상 
(자료 : 반 클라이번 콩쿠르 홈페이지)

물론, 콩쿠르 우승 이후 현란한 부상을 포기한 연주자도 있었다. 1960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탈리아의 마우리치오 폴리니다. 그는 우승 직후 공연을 자제하고 학습의 시간을 가졌다. 20세기 최대 피아니스트라는 수식어가 달리 생긴 건 아니겠지만, 물 들어왔을 때 노 젓지 않겠다는 다짐은 젊은 폴리니에게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거다. 아니, 그만큼 자신감이 있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악보 그 자체를 치밀하게 포착하며 단 한 순간의 이완도 허용하지 않는 그의 완벽함은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쇼팽의 시대를 열었다. 마치, 차은우를 보면, 내면의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하찮은지 알게 됐다는 밈이 생각나는 피아니즘이랄까. 그는 그렇게 자신의 시대가 개막하기 전 숨 고르기를 했다. 그가 우승했을 때, 심사위원장이었던 거장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이 "기술적으로는 그의 연주가 여기 있는 그 어떤 심사위원들보다 낫다"고 말했을 정도니까.

④ 네 번째 조건 : 힘 있는 심사위원

예술은 주관적이다. 수학처럼 정답이 있는 게 아니다. 누구에게 좋은 연주가, 또 누구에게는 성에 차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콩쿠르는 경쟁이다. 결국, 순위를 매겨야 하고 잘 한 사람에게 상을 줘야 한다. 이런 까닭에 권위 있는 콩쿠르라면, 가능한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 훌륭한 연주자를 잘 골라야 한다.

여기서 네 번째 조건이 나온다. 좋은 연주자를 선별해 내는, 혜안 있는 심사 위원이 있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이상은 현실은 다르다.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이 조건을 좀 노골적으로 말할 필요도 있을 것 같다. 

음악계 힘 있는 심사 위원이 포진해 있다면, 그 권위도 덩달아 높아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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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쇼팽 콩쿠르 심사위원장인 미국의 게릭 올슨. 1970년 쇼팽 콩쿠르 우승자로, 쇼팽 콩쿠르 역사상 첫 비폴란드인 심사위원장이다. (자료 : 쇼팽 콩쿠르 홈페이지)

쇼팽 콩쿠르 심사 위원들의 면면은 올스타에 가깝다. 올해 쇼팽 콩쿠르 심사 위원장은 1970년 콩쿠르 우승자인 미국의 게릭 올슨이다. 1980년 콩쿠르 우승자인 베트남의 당 타이손, 1970년 3위에 입상했던 폴란드의 피오트르 팔레치니, 1990년 1위 없는 2위 입상자인 미국의 케빈 케너, 폴란드 쇼팽 음악의 대모 카타르지나 포포바-지드론 등이 심사 위원에 이름을 올렸다. 지드론은 지난 대회와 지지난 대회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팔레츠키는 폴란드 음악계 중심에 있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피아노의 여제로 불리는 1960년 우승자 마르타 아르헤리치, 1955년 우승자인 아담 하라셰비치 등도 역대 쇼팽 콩쿠르 심사를 했다.

작게는 폴란드 음악계, 크게는 세계 음악계를 쥐락펴락하는 거물들이다.

힘 있는 사람 앞에는 욕망이 고이는 법. 예술이라고 다르지 않다. 참가자들도 힘 있는 사람들에게 눈 도장이 찍히면 기회가 많아진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초대형 시장인 쇼팽 콩쿠르, 여기에 엄청난 구매력을 자랑하는 큰 손인 심사 위원들은, 자신의 연주를 판매하는 젊은 자영업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영업 대상이다.

너무 정치적으로 해석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스승은 훌륭한 제자를 발굴하고, 제자는 훌륭한 스승을 찾아 나서는 건 당연지사니까. 아무리 실력이 출중해도 자신에게 기회를 줄 버팀목이 없다면, 그 과정은 고될 수밖에 없다. 이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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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쇼팽 콩쿠르 심사위원장들이 참가자들의 연주가 끝난 뒤 평가하고 있다. (자료 : 쇼팽 콩쿠르 홈페이지)

이런 까닭에 쇼팽 콩쿠르 심사 위원들에 대한 섭외 경쟁도 치열하다. 자신의 콩쿠르에 쇼팽 콩쿠르 심사 위원이 있다는 점을 홍보하고, 그렇게 콩쿠르의 위상을 올리기 위해 애를 쓴다.

실제로, 쇼팽 콩쿠르 심사 위원들이 자주 모습을 보이는 콩쿠르들은 이른바 '프리(pre) 쇼팽 콩쿠르'로 알려질 정도다. 대표적으로 일본의 하마마쓰 콩쿠르, 같은 폴란드에서 열리는 페데로프스키 콩쿠르, 이스라엘의 루빈스타인 콩쿠르 등이다. 올해 쇼팽 콩쿠르 심사 위원인 지드론은 2023년 루빈스타인 콩쿠르, 당 타이손은 2024년 하마마쓰 콩쿠르,  팔레치니와 에바 포블로츠카는 2025년 페데로프스키 콩쿠르 심사 위원이었다. 자연히, 연주자들은 쇼팽 콩쿠르에 참가하기 전, 이들 콩쿠르에 거의 의무처럼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그 덕에 이들 콩쿠르의 권위도 올라간다.

물론, 이들 콩쿠르에서 우승하면 쇼팽 콩쿠르 본선 출전권을 얻어낼 수 있다는 이점이 가장 크다. 하지만, 같은 심사 위원이 여럿 있다는 점은 쇼팽 콩쿠르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2005년 우승자 라팔 블레하츠는 2004년 하마마쓰 콩쿠르와 루빈스타인 콩쿠르 2위 입상자였고, 2010년 우승자 율리아나 아브제예바는 2007년 페데로프스키 콩쿠르에서 2위를 했다. 2015년 우승자 조성진은 2009년 하마마쓰 콩쿠르 최연소 우승자이자 2015년 루빈스타인 콩쿠르 3위, 2021년 우승자 브루스 리우는 2017년 루빈스타인 콩쿠르 파이널리스트였다.

⑤ 다섯 번째 조건 : 콩쿠르를 거쳐간 거장

지금까지 조건들이 상관 관계였다면, 이번 조건은 인과 관계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직접적이다.

권위 있는 콩쿠르의 마지막이자, 가장 결정적인 조건. 훌륭한 연주자를 많이 배출해야 한다는 것.

인재를 많이 내보내야 좋은 교육기관이 되는 것처럼, 좋은 연주자를 많이 배출한 콩쿠르는 그만큼 권위가 높아진다. 다만, 그냥 훌륭한 연주자에 머물지 않는다.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이 거쳐간 콩쿠르라면 위상은 치솟는다. 특히, 우승자가 잘 돼야 한다. 우승자는 해당 콩쿠르를 상징하는 인물이니까.

이런 면에서 쇼팽 콩쿠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1960년 우승자는 마우리치오 폴리니, 1965년은 마르타 아르헤리치, 1975년은 크리스티안 짐머만이었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들이다. 폴리니는 위대한 족적을 남기고 지난해 노환으로 별세했지만, 아르헤리치와 짐머만은 여전히 현장에서 위대한 연주를 보여주고 있다. 여전히 티켓 파워가 엄청나다. 쇼팽 콩쿠르 우승은 이들에게 무려 60여년 전의 이력이지만 우승자 꼬리표는 여전히 그들을 상징하는 수식어다.

이는 단순히 거장의 영광스러운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쇼팽 콩쿠르 입장에서도 대단한 영광이다. "우리 콩쿠르 입상자를 보라, 한 세기를 상징하는 대표하는 연주자들이 우리 출신이다" 이런 자부심으로 충만하다. 쇼팽 콩쿠르는 아르헤리치의 스펙이자, 동시에 아르헤리치는 쇼팽 콩쿠르의 스펙이다.

위대한 연주자를 많이 배출해 낸 다른 콩쿠르로는 러시아의 차이콥스키 콩쿠르와 벨기에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꼽을 수 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와 그레고리 소콜로프, 미하엘 플레트네프, 그리고 우리 시대 막강 티켓 파워를 자랑하는 다닐 트레프뇨프가 우승자 출신이다. 앞서 말했듯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세계 콩쿠르 연맹에서 퇴출되면서 그 권위는 예전 같지 않지만, 그 화려한 역사와 전통을 부정할 수는 없다. 20세기 피아노 음악의 중심 자리를 꿰찼던 러시아 피아니즘의 산파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바이올린에서는 기돈 크레머와 빅토리아 뮬로바가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자 출신이다.

퀸 엘리자케스 콩쿠르는 피아노 분야에서는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와 에밀 길렐스를 배출했다. 바이올린 면면이 특히나 화려하다. 당초 퀸 엘리자세브 콩쿠르는 벨기에가 배출한 바이올린 거장 외젠 이자이를 기리기 위해 1937년부터 시작된 '이자이 콩쿠르'에서 유래했다. 1937년 다이드 오이스트라흐, 1951년은 레오니드 코간이 우승했다. 오이스트라흐와 코간은, 야사 하이페츠와 더불어 20세기를 대표하는 바이올린 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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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콩쿠르는 보통 '3대 음악 콩쿠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사실 음악의 본고장 유럽에서는 자주 쓰이지는 않는 말이다. 쇼팽 피아노 음악만 다루는 쇼팽 콩쿠르와, 기악은 물론 성악까지 두루 다루는 두 콩쿠르를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수도 없을 뿐더러, 이 말 자체가 '3대'라는 말을 좋아하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넘어왔다는 게 정설인 만큼 불편한 시선도 있다. 다만, 그 불편함 때문에 이들 콩쿠르의 업적을 과소 평가할 필요는 없다. 시대를 대표하는 이 거장들을 설명할 때, 쇼팽과 차이콥스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이름은 늘 소환될 수밖에 없으니까.

영국의 리즈 콩쿠르는 머레이 페라이어와 라두 루푸, 스위스 제네바 콩쿠르는 아르투로 베네디티 미켈란젤리와 프리드리히 굴다, 미국의 반 클라이번 콩쿠르 역시 라두 루푸가 콩쿠르 우승자 출신 임을 늘 자랑 거리로 여기고 있다. 

콩쿠르, 그리고 예술의 공론장

이제껏 지난하게 풀어낸 것들은 콩쿠르의 권위를 구성하는 요건일 뿐이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 요건이란 적어도 이 질문 앞에서 부스러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콩쿠르 때마다 인이 박이게 나오는 이 질문. 과연 콩쿠르는 예술의 목적에 부합하는가. 위계와 예술은 공존 가능한가. 되레 예술을 망가뜨리는 건 아닌가.

예술은 다양성을 통해 진보했다. 보편 타당한 예술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 주류 예술 곁에는 비주류 예술이 반작용처럼 맴돌았고 그 긴장을 통해 예술은 살을 찌웠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추앙하는 상당수의 예술가는 살아 생전 배척 받았지만, 다양성의 다이내믹 덕분에 그 위대함을 증명해 냈다. 다소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안타깝게도 연주자의 예술을 우위와 열위로 나누는 콩쿠르는 예술의 다양성에 반한다. 콩쿠르가 예술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가 애호가들 사이에서 나오는 이유다. 이런 우려는 충분히 존중 받을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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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라지비우 가문의 살롱에서 연주하는 쇼팽. 폴란드 화가 헨릭 시에미라츠키의 유화.

하지만,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진리란 무엇인가' 고민하듯,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 역시 '진정한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자주 마주하곤 한다. 물론, 진정한 예술 그 언저리라도 가기 위해 애 쓸 뿐, 이 추상적 질문에 대한 적확한 답은 내릴 수 없다.

어쩌면 콩쿠르는 이런 물음에 대한 최소한의 가처분 결정일지도 모른다. 가령, 쇼팽 콩쿠르는 오로지 쇼팽의 음악 만으로 자웅을 가린다. 연주자들이 자신 만의 쇼팽다움을 제시하면, 우리 시대 최고의 쇼팽 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어떤 쇼팽다움이 우리 시대 미학에 부합하는지 일시적 판정을 내린다. 우리가 쉽게 규정할 수 없는 쇼팽다움이 협의되고 합의되며, 발표될 뿐이다. 점수와 순위라는 콩쿠르의 위계어를 통해.

당연히 콩쿠르 결과는 진정한 예술의 정답지가 아니다. 이 가처분 결정은 다시 평가 대상이 된다. "그는 콩쿠르 우승자 자격이 있는가" 혹은 "그는 출중한 실력에도 왜 수상하지 못했는가"라는 식의 즉각적인 반응들이 나온다. 누구는 불편해 하고 심지어 반발한다. 콩쿠르의 공정성 논란이다.

콩쿠르는 숙명처럼 공정성의 부담을 이고 간다. 쇼팽 콩쿠르 역시 때마다 공정성 논란이 불거졌다. 특히, 평가자인 심사 위원과 피평가자인 참가자들의 사적 관계가 늘 구설에 올랐다. 발 빠른 음악 애호가들은 콩쿠르 전부터 참가자 가운데 심사 위원 제자가 누가 있는지 솎아내려 애쓴다. 물론, 쇼팽 콩쿠르는 스승이 제자의 연주 실력을 채점할 수 없도록 명문화 돼 있지만, 내 제자 밀어주면 너 제자도 밀어주겠다는 식의 '짬짜미 의혹'이 동시에 나왔다. 이번 콩쿠르에도 쇼팽 콩쿠르 심사 위원 터줏대감인 당 타이손과 팔레치니, 지드론의 제자들이 다수 포진해 있다. 이미 공정성 논란은 시작된 셈이다. 지금이야 모두 훌륭한 커리어를 쌓고 있는 피아니스트들이지만, 2005년 우승자 라팔 블레하츠는 지드론, 2021년 우승자 브루스 리우는 당 타이손의 제자였다. 2010년 우승자 율리아나 아브제예바 역시 당시 심사 위원이었던 중국계 영국 피아니스트 푸총의 교육을 받았다.

개인적으로도 이런 식의 의심이 없지는 않다. 이번 콩쿠르에서 인상 깊었던 연주자 가운데 한 명이 불가리아 출신의 하산 이그나토프였다. 음과 음 사이 간격에 심혈을 기울여 호흡하며, 이렇게 감미롭게 완급 조절을 해 내는 젊은 연주자를 최근 보지 못했다. 루바토나 프레이징이 특이하다 싶으면서도 결코 불편하지 않게 들리는 비범한 재주가 있었다. 그간 보기 어려웠던 나름 신선한 쇼팽이었다. 하지만 1라운드에서 보기 좋게 탈락했다. 쇼팽 콩쿠르 심사 위원 중에 그의 스승은 없었다. 그가 공부하고 있는 네덜란드의 마스트리흐트 음악원은 쇼팽 콩쿠르와 별 인연이 없는 학교다. 적어도 내 기준에 그를 떨어뜨린 건 공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의심조차도 진정한 쇼팽다움을 찾기 위한 '비공식적' 협의 과정의 일부일 수도 있다. 애호가들은 연주가 한 명 한 명 떨궈지는 과정 속에서 자신이 가진 예술 철학을 총동원해 사유하고, 판단한다. 심사 위원 입장에서는 그게 또 신경이 쓰일 거다. 콩쿠르 모든 일정이 유튜브로 생중계되는 시대, 이런 비공식적 커뮤니케이션은 보다 적나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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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콩쿠르는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된다. 생중계 도중 채팅방도 활성화되는데 애호가들이 연주자에 대한 의견을 가감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자료 : 쇼팽협회 유튜브)

협의와 합의의 결과물, 여기에 더해 그 반작용까지 아우르며, 5년에 한 번 씩 쇼팽 예술에 대한 공론장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달리 말하면, 콩쿠르의 공정성 논란 역시 진정한 예술을 탐색하는 여정에 복속되는 것은 아닐까. 쇼팽다움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지는 공간이 자주 마련되는 것은 아닐 테니까. 우리가 차마 답을 내리지 못하고, 내릴 수도 없는 '진정한 쇼팽다움'에 대한 질문. 그래도 여기에 한 발짝 다가가기 위한 별 수 없는 성장통이라면, 기꺼이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건 또 아닐까. 예술을 우위와 열위로 나눈다는 경박함에 불구하고 말이다.

무르익는 쇼팽의 계절, 그 공론장에 참여해보는 건 어떨까. 쇼팽 콩쿠르 유튜브 채널(www.youtube.com/c/chopininstitute)에서는 참가자의 연주가 생중계된다. 채팅창을 보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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