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원망 안해요, 제발 만나주세요"…암투병 입양인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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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문

"나는 아기 때 네덜란드로 입양 갔지만 13세 때 양부모로부터 분리됐다. 16세부터는 자립생활을 했다. 힘들었고 무엇보다 외로웠다. 나는 너무 일찍 어른이 됐다. 장을 보고, 요리하고, 세탁하고, 집세를 내고, 학교와 일을 병행하며 살았다. 또래들이 가족과 함께 평범하고 안정된 삶을 사는 모습을 보면 더욱 고통스러웠다. 특히 크리스마스 같은 명절에는 늘 쓸쓸함을 느꼈다. 어떤 때는 방(룸)을 잃고 새 거처를 찾아 헤매기도 했다. 이때 추운 거리에서 눈 덮인 집 창문 너머로 가족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그때는 내 삶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비참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그 경험들이 내 성격을 단단하고 깊게 만들었다."

이는 한국 출신 40대 네덜란드 여성 입양인이 한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입니다.

이 여성은 만 2세 때인 1982년 네덜란드로 입양 갔습니다.

그렇지만 만 13세 때 양부모 집에서 사실상 쫓겨났습니다.

우수한 학교 성적, 활발한 성향 등이 오히려 양엄마와의 미움을 산 듯합니다.

그는 양부모 집에서 나와 보호시설과 위탁가정에서 생활해야 했고, 16세부터는 독립해서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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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40대 중반이 된 이 여성은 한국의 친어머니를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그는 친어머니가 살아 계신 것은 알고 있지만 정확한 주소와 연락처는 모릅니다.

아동권리보장원과 입양기관 모두 이를 확인해주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입양 가족을 찾는 단체 FPF(Find Parents Family)의 공동대표인 류동익 박사(사회복지학)는 "이 여성은 현재 난소암 환자"라면서 "자기 건강 문제로 인해 친엄마를 만나지 못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어서 더욱 애타게 친엄마를 찾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류 박사는 "아동권리보장원(NCRC)에 어머니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한 상태"라면서 "NCRC는 의지만 있다면 이 어머니를 찾아서 모녀가 만날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는 기관"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NCRC와 당국은 이 여성이 빨리 어머니를 만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의 친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어머니 최 여사님께,

저는 지금까지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지만, 제 마음속에는 늘 어머니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누구이신지,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해외로 입양됐습니다. 낯선 땅에서 자라면서도 제 마음 한쪽 편에는 항상 한국과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 어른이 됐으며 이제는 제 뿌리를 찾고 싶고, 제 가족의 이야기를 알고 싶습니다. 어머니, 저는 이미 어머니의 또 다른 자녀, 1983년에 태어난 제 남동생 박oo를 찾았습니다. 저희는 내년 3월 한국에 가서 어머니를 찾으려 합니다. 부디 마음을 열고 저희를 만나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부끄러움이나 두려움 때문에 저희를 피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저희는 어머니의 상황을 존중하며 조심스럽게 다가가겠습니다. 만약 어머니의 남편이나 따님이 이 사실을 몰라야 한다면, 저희는 신중하게 행동할 것입니다.

어머니,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어머니께서 믿음을 가지신 분이라면, 하나님과 그분의 섭리를 믿고 이 과정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만남을 인도해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원망이 없습니다. 오히려 제게 생명을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바라고 기도합니다. 어머니의 삶이 더 나아지고,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사랑합니다, 어머니.

다음은 질문-답변입니다.

● 언제 어느 나라로 입양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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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1980년생이며 1982년 4월에 네덜란드로 입양됐습니다.

● 왜 입양 가게 됐나?

▲ 부모님은 당시 어렸고 혼인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낳을 때 16세 또는 17세였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임신하셨을 때 잠시 지방에 있는 아버지 본가로 옮겨 출산하셨습니다. 이후 어머니는 1년 동안 본가에서 나를 돌보셨습니다. 1981년 11월쯤 어머니는 나를 두고 다시 서울로 올라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뒤로 할머니와 아버지의 누이(고모)가 나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입양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이후 부모님은 각자의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지금, 아버지도 어머니도 각자 가정을 꾸려 살고 계십니다. 어머니는 결혼하셔서 1980년대에 태어난 딸과 함께 살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 양부모님은 어떤 분인가?

▲ 양부모님은 평범하고 성실한 분들이었습니다. (입양한) 세 딸이 이미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신앙심 깊은 주부로서 항상 질서와 청결을 중시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중산층의 성실한 가장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준비가 충분하지 않아서 내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까지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관계를 회복해서 지금은 따뜻하고 안정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 현재 본인의 건강 상태는?

▲ 올해 2월 나의 몸에 종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 이후로 수술받아서 난소와 복부의 종양을 제거했습니다. 최근 세 번째 수술까지 무사히 마쳤습니다. 현재는 깨끗이 정리된 상태입니다. 앞으로는 3개월마다 정기 검진을 받으며 지켜볼 예정입니다.

● 지금 하는 일은 무엇인가?

▲ 예술문화 분야에서 프리랜서 정책 자문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지방자치단체와 협력하는 일도 합니다.

● 결혼했나?

▲ 현재 동반자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10대 후반의 두 자녀가 있습니다.

● 언제부터 부모를 찾기 시작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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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인이 된 후 내 뿌리, 가족사, 부모님의 이야기를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친부모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또 한국의 문화적 유산, 나의 정체성과 연결되고 싶었습니다.

● 입양 생활은 어떠했나?

▲ 입양 생활은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는 아이였습니다. 배움에서도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양어머니와의 관계는 늘 어렵고 긴장감이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본인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셨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활발하고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학업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뒀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높은 시험 성적을 받았습니다. 학교 측은 좋은 상급 학교로 진학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렇지만 양어머니는 "(입양한) 모든 딸이 같은 길을 가야 한다"는 이유로 나를 더 낮은 학교에 보냈습니다. 나의 지능과 에너지가 위협적으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사춘기에는 갈등이 심해졌고, 양어머니는 나를 집에서 내보냈습니다. 그 결과, 13살 때 암스테르담에 있는 소녀 보호시설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이후에는 위탁가정에서 지내다가 16살부터는 혼자 자립해 살아야 했습니다.

● 양어머니와 긴장 관계가 형성된 이유가 "나에게서 본인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셨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는 무슨 이야기인가?

▲ 양어머니는 나와 성향이 매우 달랐습니다. 나는 활발하고 창의적이며 호기심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다재다능했습니다. 반면에 양어머니는 차분함과 규율, 절제를 중시하셨습니다. 외모나 냄새, 행동 방식 같은 사소한 것까지 나는 어머니에게 낯선 존재였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부모는 자녀에게서 자신과 가족의 특징을 발견하면서 공감대를 쌓습니다. 그렇지만 나의 양어머니는 내 성격과 기질에서 그런 연결고리를 찾지 못하신 듯했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종종 '가정에 침투한 방해자'로 의심받는 것 같았습니다. 1980년대 네덜란드의 개신교적 분위기 속에서 나는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기를 요구받았습니다. 두드러지게 뛰어나서는 안 된다는 압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 양어머니와의 긴장 관계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나?

▲ 신체적 학대는 없었지만, 집 안에는 늘 정서적 긴장이 감돌았습니다. 나는 끊임없이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비판은 많고 인정은 적었습니다. 불신이 지배했습니다. 가끔은 상황이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로 빠지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하지도 않은 일로 억울하게 누명 쓰고 뺨을 맞은 뒤 양어머니에게 머리채를 잡혀 계단 위에서 아래까지 끌려내려간 적도 있었습니다. 이는 고통스러운 사건이었는데, 상습적인 일은 아니었습니다. 양어머니로부터 사랑의 표현은 거의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돌봄은 정해진 시간의 식사, 다림질된 옷, 정돈된 집으로만 나타났습니다. 식사 시간과 저녁 뉴스 시간에는 말조차 삼가야 했습니다. 나는 늘 집 안에서 긴장을 느꼈습니다. 양어머니는 입양 비용과 입양 서류의 문구를 자주 언급하며 나를 '돈 주고 사 온 아이'처럼 느끼게 했습니다. 또 나를 자주 "실패한 입양 프로젝트"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학교에서 그린 그림을 어머니께 자랑스럽게 보여드렸을 때 어머니는 아무런 언급 없이 옆으로 치웠습니다. 나는 체조 훈련에서도 뛰어난 아이여서 코치들이 전국 대회에 추천하려 했지만, 양어머니는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양어머니로부터는 전혀 격려가 없었습니다. 양어머니는 훈련장에 한 번도 오지 않았습니다.

● 13살에 또다시 가정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무섭지 않았나?

▲ 매우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집에 남을 수 있는 선택지는 없었습니다. 갈등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양어머니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습니다. 아동보호기관(네덜란드 아동보호위원회)도 가정 분리를 권고했습니다. 암스테르담의 소녀 보호시설로 옮겨지는 과정은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내 마음은 깊은 상실감에 잠겼습니다. 가족을 다시 잃는 듯한 깊은 애도의 시간이었습니다.

● 양엄마가 강제로 집에서 내보냈다는 것인가?

▲ 사실상 강제 퇴출이었습니다. 격한 말다툼 후에 어머니는 나에게 집에서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다음 날에는 내 개인 물건들이 이미 어머니 손에 의해 가방과 상자에 싸여져 있었습니다. 나는 잠시 친구 집에 머물렀고, 이후 아동보호위원회 조사가 진행됐습니다. 언니가 다니던 상담 기관은 나에게 부적절한 평가를 내렸습니다. 그 기관은 나를 모든 가족 갈등의 '주동자이자 테러리스트'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로 인해 상황은 크게 악화했습니다.

● 집에서 나온 뒤 학교에 다니거나 생활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나?

▲ 학교는 계속 다녔지만, 생활은 불안정했습니다. 보호시설과 위탁가정을 오가며 지냈습니다. 때로는 집이 없어서 며칠 동안 거리를 떠돌기도 했습니다. 빈곤을 겪었고 늘 외로움과 불안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공부가 나를 지켜줬습니다. 나는 암스테르담 대학교에 진학해서 사회학과 교육학을 전공했습니다. 학문을 통해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고 제 삶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학업은 내 삶의 안정과 보호막이었습니다.

● 학교에서 친구들과의 관계는 어떠했나?

▲ 때로는 외로웠지만 배움 자체를 즐겼습니다. 친구가 많지는 않았지만, 공부는 쉽게 따라갔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영리한 아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교사들도 내 지적 호기심을 인정해 줬습니다.

● 초등학교 시절 상급 학교 권유가 있었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학교를 추천받았나?

▲ 내 초등학교 성적과 전국 시험 결과에 따라 교사들은 나를 VWO(대학 진학 준비과정, 네덜란드 최고수준의 중등교육)에 보내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양어머니는 다른 딸들과 마찬가지로 MAVO(중간수준 중등교육)로 보냈습니다.

● 양어머니의 이런 행태 때문에 갈등이 생겨 집을 나가게 된 것인가?

▲ 양어머니의 태도는 갈등의 중요한 원인이었습니다. 입양의 현실에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내 성격과 능력은 존중받지 못했고 이는 양어머니와의 갈등, 그리고 분리로 이어졌습니다.

● 자립생활은 어떠했나?

▲ 16세부터 자립생활을 했는데 작은 고아 연금을 받았습니다. 학업을 병행하며 아르바이트도 했습니다. 오후와 저녁에는 텔레마케팅 회사에서 일했고, 밤에는 우편 분류 센터, 주말에는 가게나 음식점에서 일했습니다. 때로는 일을 하느라 학교에 가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작은 방을 빌렸고, 생활비와 학비를 충당했습니다.

● 입양 생활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은 무엇인가?

▲ 양가정으로부터의 분리와 어린 시절의 외로움이었습니다. 네덜란드 사회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했고, 가족의 울타리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늘 있었습니다. 특히 네덜란드의 보호시설에 들어가면서 또다시 가족을 잃게 된 경험은 내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 기뻤던 일은 무엇인가?

▲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를 믿어 주고 지지해 준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내 인생에서 만난 따뜻한 친구들과 좋은 어른들은 나에게는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 만남이 내 삶을 지탱해 줬고, 내가 버틸 수 있는 힘이 됐습니다. 무엇보다도 내 자녀들의 탄생은 가장 큰 기쁨이며, 삶의 이유가 됐습니다.

● 본인의 삶을 지탱해준 따뜻한 친구들과 좋은 어른이란 어떤 사람들을 말하나?

▲ 나를 가족처럼 품어주거나 보호해 준 분들이 있었습니다. 나를 끝까지 믿어 준 학교 교장 선생님, 많은 결석에도 저를 이해하고 정학시키지 않은 부교장 선생님, 그리고 내가 14세부터 16세까지 1년 6개월 동안 집에 머물 수 있도록 해주신 친구의 어머니가 있습니다. 내 첫 연인의 어머니는 나를 딸처럼 여겨 주셨습니다. 내가 그 연인과 헤어진 후에도 나를 잘 대해주셨습니다. 그분은 올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평생 친구인 C와 P 두 사람은 지금도 나에게 가족과 같은 사람입니다.

(사진=본인 제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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