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빙>과 <조명가게>로 글로벌 OTT 시장에 K-판타지를 소개한 디즈니플러스가 넷플릭스와 또 다른 감성으로 K-콘텐츠 IP의 영상화에 주력하고 있다. 곧 공개될 <북극성>과 <하이퍼나이프>를 비롯, 미스터리 스릴러, 액션 판타지 등 장르물 라인업부터 최근 11부작으로 막을 내린 <파인: 촌뜨기들>(이하 <파인>)까지. 좀 더 대담하고 완성도 높은 서사로 디즈니가 선호하던 가족 위주의 판타지 스토리에서 벗어나 한반도의 특수한 배경과 문화를 담은 다양하고도 독특한 스토리에 집중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디즈니 플러스 채널의 짙푸른 청록색이 주는 로고 이미지는 기존 디즈니의 밝고 알록달록 파스텔톤 색감이 아닌 한없이 어두운 해저로 빨려 들어간 것 같은 인생의 어두운 이면을 보여주는 디즈니의 변화를 상징하는 시도처럼 보인다.
윤태호 원작의 <파인(巴人)>은 10년 전 <미생> 연재를 마치고 차기작으로 2014년 세상에 나왔던 작품이다. <이끼>, <내부자들>, <미생>과 같은 작품에서 보여준 윤태호 작가의 특징은 다양한 인간 군상이 펼치는 탐욕과 광기다. 그 광기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씁쓸함을 통해 잔인하고 추악한 인간을 보여준다. 마지막 말로를 알면서도 그 나락으로 떨어지는 악인들끼리 펼치는 핏빛 사투를 통해 살아남은 자의 공허함을 조명한다. 지리멸렬한 싸움 끝에 승자가 됐지만 '촌뜨기들'이란 부제가 상징하듯 결국 소득 없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간 허무한 결투는 70년대 대한민국,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파인>은 우리의 근과거에서 좀 더 깊숙이 들어간, 반세기 전의 대한민국 70년대가 배경이다. <파인> 시리즈가 전부 공개된 지금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소재로 한 탄탄한 원작 스토리, 강윤성 감독의 검증된 연출력과 연기파 배우들의 대거 출연, 압도적 카리스마의 배우들이 펼친 캐릭터의 향연, 잘 차려진 12첩 반상 같은 진수성찬이다. 그들의 메소드 연기만으로도 매회 꽉 차는 느낌인데, 사실 이 많은 캐릭터의 사연들을 다 풀어가자니 초반 서사는 조금 지루하게 흘러가지만 각각의 사연을 풀어낸 중반부터 바다로 나간 이 고삐 풀린 무지렁이들이 벌이는 배틀은 아주 스릴 있게 전개된다. 이야기 내내 화면을 지배하는 진득하고 눅진한 밤안개 같은 공기와 다들 선수를 자처하지만 실상은 단순 무지 과격한 촌뜨기들이 다 모여든 바다라는 공간은 이제 손을 뻗쳐 첫 희생자를 집어삼키기만을 기다린다.
대한 늬우스, 박정희 대통령, 건축 첫 삽을 뜨는 여의도 아파트, TV 속 박치기를 하는 프로레슬러와 흑백 예능쇼 프로그램 인서트 화면은 <파인> 속 70년대 대한민국의 사회현상을 고증하는 중요한 자료 화면이자 <파인>의 분위기를 제대로 상승시킨다.
표면적으론 <파인>은 바닷속 보물을 캐러 온 도굴범들의 이야기지만 그릇과 도자기는 맥거핀일 뿐, 1970년대 개발 붐, 기업들의 부정축재의 수단이 된 대학교 설립과 정원외 입학, 새마을 운동, 한강의 기적 등 숨가쁘게 쌓아 올린 바벨탑을 보여준다. 흥백산업 축하연 장면에서 한복 입은 요정의 여인들, 초대 가수 현인과 밴드를 불러 여흥을 즐기는 모습은 70년대 고도성장과 현대화를 이룬 한국의 밀실 정치와 유흥 문화를 보여준다.
촌뜨기들의 그릇 건져 올리기가 주된 서사다 보니 이런 이야기가 배경으로만 부분 부분 등장한 점은 아쉽지만 미장센과 영상 미술팀의 성과로만 놓고 본다면 <파인>은 시대 고증을 통해 세트나 촬영 소품에도 꽤나 공을 들인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목포 행운다방과 흥백산업 영상 전반에 흐르는 탁한 녹색의 이미지는 녹색이 주는 푸릇했던 성장과 안식의 기운을 지나쳐 역류하고 썩어가는 조류처럼 곧 닥칠 비극의 상황을 암시한다. <파인>은 그렇게 진한 녹색과 황토색의 70년대 미장센을 통해 우리의 부서지기 직전 기억 속 매몰된 과거를 발굴해 낸다.
"니 골동이 뭔지 아니? 먼저 보고 손에 쥐는 게 골동이야"니 골동이 뭔지 아니? 먼저 보고 손에 쥐는 게 골동이야.
극 중 송사장이 남긴 명대사다. 골동은 무조건 처음 본 사람이 자기 손에 먼저 넣어야 골동이 된다는 의미다. 골동(骨董)의 한자가 가진 의미는 뼈 골에 바로잡을 동. 어쩌면 골동은 누군가에 의해 그 본체가 만들어지고 바로잡아지기도 할 수 있으니 그 가치를 알지 못하는 자에겐 의미가 될 수 없다. 골동을 향한 무서운 집착과 광기가 느껴지는 <파인>의 주제가 압축된 대사가 아니었을까. 가짜인 줄 모르고 뒤 쫓아가 결국 화상을 입고 죽을 뻔한 경찰 홍기에게도 해당된다.
파국을 향해가며 건져 올린 그릇과 도자기는 맥거핀이 되어 의미를 잃어가고 <파인>의 주제는 이 진흙탕 아비규환 속에서 과연 누가 살아남는가다. 황선장이 바닷속에 뛰어든 벌구를 죽이는 장면이나 살아 올라온 전출을 해머로 내리치는 장면은 섬찟함을 넘어 인간의 잔혹함을 보여준다. 누구 하나 믿을 수 없고 모든 캐릭터들이 다 비열하다. 중반부에 희동과 연대하며 연민을 자아낸 전출도 알고 보니 부산에서 또 다른 처자식과 가정을 꾸렸다는 반전이 밝혀지고 양정숙의 친한 동생인 마릴린 양장점 여사장도 은신처로 도피한 정숙의 정보를 넘겨주는 모습은 돈과 권력 앞에서 누구 하나 믿을 것 없는 아사리판을 제대로 보여준다.
강윤성 감독은 <범죄도시>나 <카지노>를 통해 남성성이 극대화된 범죄 스릴러 속 캐릭터를 보여준 연출자다. 이런 거친 남자들 속에서 선자는 타협하지 않고 끝내 자기 꿈을 이루는 것에 성공했다. 반면 극 중 끝내 욕심을 부리고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은 다 죽었다. 멈춰야 할 타이밍을 알았던 사람들은 피해 갔지만 그러지 못한 자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식상한 권선징악 클리셰라 할지라도 <파인>이 주는 명쾌한 메시지는 확실하다. 욕심부린 자, 죽음에 이를지니. 그릇의 저주였을까? 그릇은 다시 바다로 돌아가고 모든 것들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는 희동의 마지막 내레이션이 <파인>의 주제를 명징하게 전달한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