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희 원년 8월 15일 오후 2시,
수괴 전봉기(全鳳基)의 부하 80여명이 음죽군(陰竹郡) 순사 분파소를 습격하고 순검 3명을 격퇴하였다"
융희는 1907년부터 사용된 대한제국의 마지막 연호입니다. 즉 위의 서술은 지금으로부터 118년 전, 당시 대한제국에서 벌어진 의병 항쟁에 대한 기록입니다. 음죽군은 현재는 없는 지명으로, 지금으로 치면 경기도 이천시 남부에 해당합니다. 이미 눈치채신 분들이 적지 않겠지만 이 기록의 주체는 일본 제국입니다. 정확히는 1909년 일제 내무성 경무국이 편찬한 '폭도사편집자료'상에 등장하는 문구입니다. 제목이 명확하게 보여주듯 일제는 구한말 의병을 '폭도'로, 의병 활동을 '폭거'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의병장은 '못된 짓을 하는 무리의 우두머리', '수괴'로 불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07년은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고 전국 각지에서 정미의병 항쟁이 전개되던 시기였습니다. 고종은 헤이그 특사 파견이 좌절됨에 따라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대한제국의 행정권과 인사권을 박탈하는 정미7조약이 체결돼 사실상 대한제국 정부 기능은 정지된 상태였습니다. 외교권을 박탈 당한 데 이어 내정까지 일본 통감에 장악 당하면서 대한제국은 사실상 식민지나 다름 없었습니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이 재현하면서 다시금 조명 받은 13인의 무명 의병 사진도 이 즈음 한 외신 기자,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Frederick Arthur McKenzie)가 촬영한 것입니다. 메캔지의 책 '조선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을 보면 의병들은 18~26세로, 한 청년은 군대 제복을 입었으나 몇몇은 낡은 한복 차림을 하고 있었습니다. 각기 다른 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리 성한 것은 없어 보였다고 메켄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메캔지에 밝힌 의병들의 메시지는 명확했습니다. 일본을 이기기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일본의 노예로 죽기보다는 자유민으로 죽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진이 촬영된 날 아침에도 인근 마을에 전투가 있었고 의병 2명이 전사하고 3명이 다쳤다고 이들은 전했습니다.
메캔지의 책이 남아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수많은 의병들은 여전히 '무명'의 '폭도'로만 남아 있습니다. 역사 학자 개개인이 이 시기 의병 활동에 관한 사료들을 분석해 왔지만 부족함이 없지 않습니다. 다수의 연구진이 참여하여 체계적으로 연구가 수행된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경기도 의뢰로 사실상 처음으로 이 지역 의병 전투에 대한 실태 조사가 실시됐습니다. 10여 명의 연구진이 참여해 구한말의 자료 50여 건을 샅샅이 살펴봤습니다. 대상 시기는 1906년부터 1911년까지입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최근까지 의병 연구에 있어 중심이 된 사료는 일본 군부가 1913년 펴낸 '조선폭도토벌지'였습니다. 개별적인 의병 탄압 기록들을 취합하여 한 번에 정리한 자료입니다. 이 조선폭도토벌지에 따르면 동 기간 경기도에서 벌어진 의병 전투 건수는 105건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번 조사에서는 기존 기록보다 7배 가량 많은 783건의 전투 기록이 확인됐습니다. 일본 기록인 '폭도에 관한 편책', '폭도사편집자료', 고베 신문 등 일본 신문과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 국내 신문을 교차 검증한 결과 그동안 발굴되지 않았던 기록들이 파악된 것입니다. 의병 참가자 숫자는 조선폭도토벌지상의 6,971명보다 18배 많은 127,600여 명이 집계됐습니다. 연구진은 의병의 숫자는 당시 의병 측이 열악한 전력을 가리기 위한 목적 등으로 실제보다 부풀렸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보고 신중하게 이에 대한 추가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 전투 기록의 경우에는 신빙성이 높아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의병 활동이 보다 광범위하게 전개됐을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경기도에서 실시된 조사인 만큼 전국 단위의 조사로 확장된다면 그 규모는 훨씬 커질 가능성이 큽니다.
이번 연구를 총괄한 강진갑 역사문화콘텐츠연구소장은 "전사 의병 가운데 현재 우리가 독립 유공자로서 파악되어 기억하는 분은 5%밖에 되지 않는다"며 나머지 95%의 무명 의병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이제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도 변화할 필요가 있다고도 제언했습니다.
강 소장은 "의병 전쟁은 일본 군의 압도적 무력 속에서 민간이 맞섰기 때문에 대부분 패배한 전투였다. 통계에서 보면 전사자 수는 일본과 우리가 100 대 1"이라면서 "우리 역사는 (그동안) 너무 승리에 배고파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역사를 바라봄에 있어서 승리한, 뛰어난 분들 만을 중심으로 할 것이 아니라 이름 없이 사라져 간, 그러나 실제 역사를 만들어간 분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