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중립의 언어와 모호한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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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장관급 인선 관련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의 브리핑 가운데 흥미로운 문장이 있었다.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는 원민경 변호사입니다. [... ] 성별 갈등은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인식으로

양성 평등

을 지향하는 대통령의 뜻에 부응해 통합과 포용으로

성평등

대한민국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1)

한 문장에 '양성평등'과 '성평등'을 함께 배치한 것을 우연이라 보기 어렵다. 한국 사회에서 두 용어는 서로 다른 정치적 함의를 가지며 긴장 관계에 놓여있다.

2)

학계에서는 언론 기사 속 두 용어 사용을 분석해, 우리 사회가 이를 어떻게 구분하고 이해하는지 연구가 이뤄졌을 정도다.

3)

'양성평등'은 「양성평등기본법」이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같은 법률·기관의 공식 용어로 주로 사용되며, 일부 보수·종교계에선 남녀 이분법을 전제로 '역할의 조화·균형'을 강조할 때 사용된다. 반면 '성평등(gender equality)'은 2015년 UN이 채택한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의 하나로, 성정체성·성적지향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도 일반권고 제28호에서 교차성(intersectionality)을 차별 이해의 핵심 개념으로 규정하며, 성정체성을 차별금지 범주 중 하나로 포함시켰다.

4)

대통령실이 하나의 문장에 '양성평등'과 '성평등'을 교차 배치한 건, 상이한 청중을 겨냥한 중층적 신호로 보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모호한 메시지는 정교한 계산 끝에 빗나간 파울인 셈이다. 파울은 타석을 연장할 수 있어도 점수를 만들지는 못한다.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려는 애매한 '병기(竝記)'는 중장기적인 답이 될 수 없다. 지금 우리 사회에 진정 필요한 것은 어떠한 상태를 평등한 것이라 전제할지에 대한 '합의'이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임금·돌봄·정치 참여 등 영역의 불평등을 해소할 것인지를 '명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6월 10일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 역시 같은 맥락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이 대통령은 "여성이 구조적으로 차별 받는 억울한 집단임은 분명하다"면서도, 20대 남성, 이른바 '이대남'들이 겪는 차별 문제에 대해서도 대책을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5)

일견 균형 잡힌 접근처럼 보이지만, '차별'과 '역차별'을 동등하게 다루는 것처럼 비칠 우려가 있다. 구조적 불평등의 원인을 해부하는 것이 아닌, 모든 불만을 같은 선상에서 다루려는 정치적 중립 제스처이기 때문이다. 성평등 정책이 전제하는 것은 기울어진 운동장, 즉 애초에 권력·자원·기회의 분배가 불균형하다는 현실이다. 때문에 '젠더 불평등'의 해소와 청년 남성이 감각하는 '역차별'은 대칭이 될 수 없다. 후자는 전자의 산물로 보는 게 더 정확한데, 이를 같은 무게로 올려놓는 순간 많은 가능성을 내포해야 할 성평등 담론이 자칫 개인들 간 감정 대립 구도로 축소될 위험이 있다.

이러한 접근은 국제적 흐름과 엇박자를 낸다는 점에서도 생각할 여지가 있다. UN 여성차별철폐협약(CEDAW)과 2030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는 '성평등'을 포괄적 개념으로 채택하고, 이를 위해 차별의 원인과 구조를 해소하는 조치를 국가 의무로 규정한다. 우리나라도 이를 비준하여 일정 부분 법·정책에 반영해 왔다. '양성평등기본법'이나 '성별영향평가법' 등 일부에선 여전히 남녀 이분법적 언어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 밖의 많은 정책 영역에선 포괄적 성평등 개념을 확장하려는 흐름을 보여 왔다. 성평등은 그저 이상적 구호가 아니라, 성정체성·성적지향 등 다층적 불평등을 제도적으로 반영하려는 방향성을 담고 있다.

젠더 정책에 필요한 것은 축적된 노력과 경험을 기반으로 한 연속성이다. 가부장제 사회의 긴 그림자를 벗어나기까지, 수많은 갈등과 협상이 이뤄졌다. 지난한 과정처럼 보였던 그 시간들은 실패나 답보가 아닌, 다양한 개인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투쟁한 역사였다. 그렇기에 정책은 누적된 합의 위에서 설계돼야 한다. 개인적으로 이 정부가 내세운 '실용주의'가 극단으로 양분된 젠더 영역에서 어떤 식으로 구현될 수 있을지 기대하고 있다. 실용이 목표라면, 구조적 불평등의 실체를 직시하는 것이 첫걸음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선 좀 더 분명한 언어가 필요하다 .

* 원민경 후보자는 언론에 공개한 '여성가족부장관 내정 소감'의 글에서 '양성평등' 대신 모두 '성평등' 개념을 사용하였다.

1)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로 '성차별'이나 '구조적 불평등'이 아닌 '성별 갈등'을 언급한 것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성별 갈등 프레임은 '공동'의 목표로서 성평등을 지우고 단순 대립 구도를 부각한다.

2) 서울신문, [나와, 현장 ] '성'평등과 '양성'평등, 이슬기 기자 (2022.05.26)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20527025013

3) 조수선, 국내 언론의 성평등과 양성평등 용어 사용 분석 : 언론사, 기자의 성, 기사 종류별 차이를 중심으로,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 2019, 0(54), 54, pp.5-49

4) UN CEDAW, General recommendation No. 28 on the core obligations of States parties under article 2 of the Convention on the Elimination of All Forms of Discrimination against Women (2010.12.16)

https://www.icj.org/wp-content/uploads/2013/05/General-Recommendation-CEDAW-28-core-obligations-Article-2-2010-eng.pdf

5) KBS, 이 대통령, '남성 차별' 화두 먼저 꺼냈다…국무회의 기록 보니 [지금뉴스 ], 신선민 기자, (2025.07.17)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306690&re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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