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고통'에 시달리는 산청 산사태 생존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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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주민이 남긴 추모 메시지

'할머니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경남 산청군 산청읍 부리 주민 70대 A 씨는 지난 19일 시간당 최고 100㎜에 달하는 비가 퍼붓던 당시 집 주변으로 물이 차오르는 급박한 상황에서 밖에 나가 있던 조카가 손을 흔드는 모습을 이렇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달랐습니다.

알고 보니 조카는 바위 사이에 다리가 끼어 빠져나오지 못해 손을 흔들어 '나 좀 살려달라'는 구조 요청을 한 것이었습니다.

조카는 현장으로 출동한 소방대원에 의해 구조됐으나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병실에 누워있습니다.

A 씨는 조카의 절박한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오히려 태연히 손을 마주 흔들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제가 조카를 구할 수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그런 제가 등신이에요, 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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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적십자사 경남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 심리 상담을 받는 내내 A 씨의 흐느낌은 그칠 줄 몰랐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후회와 죄책감이 뒤섞여 있었고, 그 아픔은 고스란히 상담실을 채웠습니다.

경남을 덮친 극한호우가 그치며, 언제 그랬냐는 듯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 복구 작업이 한창이지만 여전히 피해 주민 다수는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한적십자사 경남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는 경남도 등과 함께 집중호우로 피해를 본 도민을 위한 재난심리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수마가 할퀴고 지나간 산청지역 곳곳에서 상담소를 운영하며 현재까지 상담 168건, 심리적 응급처치 124건 등의 심리지원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록된 피해 주민들의 심리 상담 사례를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했습니다.

산청읍 부리 주민 70대 B 씨는 재해 전날 '맛있는 밥을 해놓고 만나자'는 약속하고 즐겁게 통화한 친구가 수해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에 돌덩이가 얹어진 기분이었습니다.

대한적십자 추모 공간에 '건강하게 잘 있어라 해놓고 이렇게 가버리면 어떡하니. 그 먼 길 잘 가고 조만간 나도 갈 테니 잘 지내고 있어. 다음에 만날 때까지 안녕'이라는 글을 쓰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B 씨처럼 재난은 단순히 물질적 피해를 넘어 깊은 트라우마를 남깁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거나, 눈앞에서 위급한 상황을 목격한 경우 당시 상황이 계속 떠오르며 죄책감, 슬픔, 무력감 등으로 고통받습니다.

이번 상담에서 당시 기억으로 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해 높은 우울, 불안, 극단적 선택 우려 등을 보이는 '고위험군'은 총 8건이었습니다.

전체 내담자 중 2∼3%가 사고 당시의 순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마음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셈입니다.

대한적십자사 경남재난심리회복센터 박새봄 담당은 "나만 살아남았다는 미안함과 같은 감정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전문가 도움 없이 극복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며 "우리 센터는 재난 경험 초기부터 완전한 회복에 이르기까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어 "이번 수해로 피해를 본 주민들이 잃어버린 일상의 조각들을 하나씩 맞춰나가고 마음속 고통이 조금이나마 덜어졌으면 한다"며 "이들이 잃어버린 삶의 온기를 다시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습니다.

(사진=대한적십자사 경남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 제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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