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의 軍심戰심

육군은 끝까지 '흉상 존치' 주저했다…"이들을 어찌 하리오" [취재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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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1주일 전인 지난달 26일 SBS는 "육군사관학교가 홍범도 장군 흉상의 현위치 존치를 최종 결정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정성호 의원실과 육사 간 질의답변 자료와 육군의 모 장성에 대한 취재를 거친 보도였습니다. "아주 늦었지만 육사의 결정을 환영한다"는 반응이 쏟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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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의 홍범도 장군 흉상 존치 결정을 보도한 지난 26일 SBS 뉴스

▶ [단독] 육군사관학교, 홍범도 장군 흉상 '존치' 최종 결정

돌연 황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SBS 보도 이후 육군이 "충무관 앞 현위치에 존치할지, 육사 내 다른 장소로 옮길지 결정된 바 없다"고 말을 바꿨습니다. "존치냐, 재배치냐"는 의원실 질의에 육사는 "존치할 계획"이라고 서면으로 답했고, 육군의 한 장성도 기자에게 "충무관 앞 현위치 존치로 결정됐다"고 밝혔었는데 보도가 나가니까 육군이 딴소리를 한 것입니다.

육군의 기이한 방황은 몇 시간 만에 진압돼서 다행히 "충무관 앞 현위치 존치" 결정은 굳어졌지만 뒷맛이 영 찝찝합니다. 육군 내에 육사 홍범도 흉상 존치를 마뜩치 않게 여기는 세력이 여전히 목소리를 내고 있나 봅니다. 누군지 잘 모르겠지만 홍범도 흉상 철거를 지지하는 대선 후보가 있고, 그의 대선 승리를 확신하는 육군 장군들도 있다는 말이 들립니다. "12·3 계엄이 그냥 일어난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흉상 존치" 공문서 내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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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정성호 의원실이 육사에 던진 서면 질의 내용은 "홍범도 장군 등 독립운동가 흉상의 육사 내 존치 및 재배치 여부가 결정되었는지"였습니다. 육사는 지난달 23일 "흉상은 육사 내 존치할 계획"이라고 의원실에 답변했습니다. 육사의 정책계획장교, 기획과장, 교무기획실장에 이어, 지난달 22일 소형기 육사 교장의 승인을 득한 답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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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가 정성호 의원실에 제출한 답변 자료

의원실이 "존치냐, 재배치냐" 물은 데 대해 육사가 "존치"라고 답했다는 것은 100% "현위치에 그대로 둔다"는 뜻입니다. 존치의 사전적 의미도 "그대로 둠"입니다. 육사 내 다른 장소로 옮길 생각이었다면 사전적 의미가 "다시 배치함"인 "재배치"로 답했을 것입니다. 육사가 정성호 의원실 답변 자료라는 형식을 빌려 존치를 밝힌 공문서를 처음 낸 것이라서 의미가 컸습니다.

기자는 추가 취재했습니다. 육사의 답변 자료를 토대로 지난달 25일 육군의 한 책임있는 장성에게 전화로 "현위치 존치가 맞냐"고 질문했습니다. 그 장군은 "현위치 존치가 맞다"고 답했습니다. "홍 장군 흉상과 함께 육사 충무관 앞에 나란히 설치된 지청천, 이범석, 김좌진 장군과 이회영 선생 흉상도 그대로 두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육사의 공문서, 육군의 관련 장성이 이렇게 밝힌 내용이면 "홍범도 장군 흉상 현위치 존치"는 완전한 팩트입니다. 육사는 3년 만에 돌고 돌아 "홍범도 흉상 충무관 앞 현위치 존치"를 최종 결정했습니다.

'흉상 철거 본심' 들킨 육군…마지못해 '존치' 수용

SBS의 "육사 홍범도 장군 현위치 존치 결정" 보도는 26일 12시 뉴스에 나갔습니다. 5시간 반쯤 지나 한 언론 매체는 "육군 측이 '충무관 앞에 존치할지, 육사 내 다른 장소로 옮길지 결정된 바 없다'고 밝혔다"고 보도했습니다. 육군이 육사 내 다른 장소로 옮기는 재배치의 가능성도 열어뒀다는 뜻입니다. 깜짝 놀라 육군 측에 문의하니까 "육사 내 '다른 장소에 존치'할 수도 있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육사가 의원실에 답변서로 밝힌 "존치 계획"은 "다른 장소에 존치"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육군의 궤변에 말문이 막혔고, 육군 내에 흉상 존치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크다는 점에 경악했습니다.

기자가 정성호 의원실 자료 전체를 육군 측에 전달하자 육군 측은 다소 기가 죽었습니다. 존치와 재배치의 사전적 의미를 들이밀며 "존치냐, 재배치냐" 물었을 때 "존치"라고 답했으면 "현위치에서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라고 꾹꾹 눌러 설명하니까 그제서야 육군 측은 손을 들었습니다. 부랴부랴 육군 당국자들은 몇몇 기자들에게 전화해서 "충무관 앞 현위치 존치"라고 정정했습니다. 약 2시간 만에 육군의 결론은 "홍범도 장군 흉상 충무관 앞 현위치 존치"로 바로 잡혔습니다.

육군 참 안타깝습니다. 육사 충무관 앞에 홍범도 장군 흉상을 지금 그대로 모시는 것이 여전히 불편한 모양입니다. 육군은 요령껏 본심을 잘 숨기는 편인데 이번에는 실패했습니다. 흉상 철거의 본심 들킨 채 마지못해 흉상 존치 결정을 받아들인 꼴입니다. 타군의 한 장교는 "마음속에 '윤 어게인'을 품고 사는 육군 장성들이 여럿 있다", "육사 홍범도 흉상 존치를 얼마나 결정하기 싫었겠나"라고 탄식했습니다. 다른 장교는 "육군은 잊을 만하면 계엄 터뜨려 나라를 혼란에 빠트리고, 군 신뢰 무너뜨리면서 진심으로 반성한 적 없다", "다음 정권 들어서면 제일 발 빠르게 줄 바꿔댈 군인은 12·3 계엄을 추종했던 육군 장성들일 것"이라고 꼬집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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