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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과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의대 준비반이 생길 정도로 요즈음 한국에서 가장 선호하는 직업은 의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현실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메디컬 드라마도 꾸준히 제작되고 늘 인기 순위를 차지한다.
드라마에서 의사를 대표하는 이미지는 비슷하다. 흰색 가운을 휘날리며 청진기를 걸친 채 병원 복도를 활기차게 걸어가는 모습, 긴장감 도는 수술방에서 돋보이는 날카로운 눈빛과 흐트러짐 없는 손놀림은 의사에 대한 꿈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환상을 심어준다. 피곤함에 지쳐 병원 한구석에서 웅크린 채 졸고 있거나, 호출을 받고 식사를 제대로 끝내지도 못한 채 허겁지겁 달려 나가는 모습까지도 치열한 삶을 사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비친다.
엇비슷한 서사가 반복되고 더 이상 보여줄 게 없을 것 같은데도 메디컬 드라마는 계속해서 꾸준하게 제작되고 있으며, 지루함과 식상함보다는 병원 안에서 또 다른 영역을 탐구하는 느낌을 준다. 다양한 진료과목이 있고 그에 따라 다른 에피소드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 또한 메디컬 드라마의 장점이다.
메디컬 드라마들은 어떤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꾸준히 인기를 모으고 있을까. 최근에 방영된 메디컬 드라마 두 편은 기존 드라마와 또 다른 차별점을 두고 있다. tvN에서 제작된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시즌3까지 나왔을 만큼 인기를 모았다. 과거의 인기에 힘입어 이번에는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이라는 제목으로 방영 중이다.
이번 시리즈는 산부인과를 중심으로 펼쳐진다는 설정부터 차별점의 시작이다. 산부인과는 산모와 아기, 둘의 생명이 걸려 있기 때문에 의사로서 부담이 더 크다. 그리고 둘 중 한 생명만을 살려야 하는 상황과 맞닥뜨리면 갈등과 아픔, 감동이 교차할 수밖에 없다.
제목에서 시사하듯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은 험난한 수련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실수와 질책, 반성과 자신에 대한 회의가 서사를 이루고 있다. 그렇지만 동료 관계에 중점을 둔다는 점은 기존의 슬기로운 시리즈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전공의 오이영(고윤정)은 특이하게도 의사로서 사명감이나 열정이 없어 보인다. 의사라는 직업이 자신에게 맞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시키는 일만 겨우 해내면서 도망갈 구실만 찾는다. 그럼에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려가고, 환자의 가족에게 깊이 공감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의대 수석 졸업, 의사고시 수석 합격으로 욕심과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전공의, 김사비(한예지)는 공감 능력 부족으로 환자에게 외면과 무시를 당해 처음으로 좌절감을 맛본다. 이렇게 의사가 갖춰야 할 여러 면을 이 드라마는 부각한다.
다른 동료들 역시 실수를 반복하고 교수로부터 지적을 당하며 피곤함에 지치고 풀죽은 얼굴을 하고 있다. 심지어 미용실에 간 의사 두 사람은 귀가 얇아서 헤어 관리 제품을 대량 구매하며 만족해하는데, 그 뒤에서 미용사들은 '병원 밖에서는 헛똑똑이들'이라며 놀려댄다. 다른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의사를 향한 클리셰적인 시각이 여기서는 어떻게 달라지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공부 잘하고 똑똑한 의사로서의 능력을 강조하기보다는, 실수를 연발하면서 어떻게 진정한 의사로, 그리고 한 인간으로 성장하는지가 이 드라마에서는 중요하다. 전공의를 지도하는 선배 의사도 메디컬 드라마에서 흔히 보이는 상명하복식의 무조건적인 굴종을 강요하기보다는 실수를 다독이며 현실적인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거나, 이성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꾸짖는다. 그래서 다른 느낌의 공감을 주는 메디컬 드라마가 됐다.
반면 이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파격적인 메디컬 드라마가 있다. 최근에 선보인 디즈니플러스의 <하이퍼나이프>에는 기존 메디컬 드라마에서 나타나는 동료나 선후배 간의 로맨스가 전혀 없다. 천재라는 지나친 자신감으로 인해 타인과 관계에 문제가 있는 두 주인공을 중심에 두고 연쇄살인 서사가 펼쳐진다. 정세옥(박은빈)과 최덕희(설경구)는 의사로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탁월한 능력을 지녔지만 타인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사이코패스 기질도 지녔다. <하이퍼나이프>는 거울처럼 닮은 두 사람의 기묘한 관계를 끝까지 긴장감 있게 그린다.
하지만 일반적인 연쇄살인마 사이코패스 서사와는 정반대로, 두 사람은 자신의 뜻에 어긋나면 살인도 서슴지 않으면서도 속으로는 서로에게 마치 부녀처럼 끈끈한 애증을 느낀다. 두 사람의 관계는 공감을 얻기는 힘들지만 이 드라마가 노리는 지점은 의사로서의 강한 자존심과, 자신의 능력에 대한 집착과 과시, 그리고 반복되는 반전이다.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직업인 의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을 저지르는 비윤리적인 행태와, 환자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수술에 집착하는 모습은 기존의 메디컬 드라마의 전형을 깨뜨린다. 박은빈과 설경구의 조합이 돋보이는 <하이퍼나이프>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관계에서 발생하는 예측 불허의 긴장감이 서사를 끌고 가는 힘이 된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